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91화 (192/232)
  • 191화

    [11장-1절] 발목을 잡혔다

    내가 따로 할 건 없었다. 이미 발렌타인이 올림픽 참가 신청을 해뒀기 때문에 출전하기만 하면 끝.

    문제는 스포츠 기초지식이랄까. 나는 스케이트, 스키, 눈썰매, 하키, 피구, 배구, 승마, 역도, 검도, 사격, 양궁의 규칙을 전혀 모른다!

    동계 올림픽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기사도 빼면 백지나 다름없다.

    “어휴! 시간이 없네.”

    내가 못 돌아올 것에 대비해서 발렌타인은 모든 종목의 규칙을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지금부터 하나하나...

    “문수야~!”

    “진짜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여자친구 송선영의 모친이기도 한 장서연 감독님!

    “사적인 자리에서는 장모님이라고 불러도 돼.”

    “자, 장모님이요...?”

    내가 아는 ‘장모님’이란 단어는 아내의 모친에게 붙이는 호칭인데...?

    “왜? 싫어?”

    “그건 아니지만...”

    장서연 감독님이 ‘장모님’을 자칭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장난으로 들었다.

    앞으로도 송선영이랑 쭉 함께할 생각이긴 하지만, 결혼이란 단어는 나에게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할까.

    “어머님이 굉장한 미인이시던걸? 뵙고 깜짝 놀랐어.”

    “저도 놀랐습니다.”

    격세유전이란 소리를 듣긴 했지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외모의 격차가 컸다.

    “오늘부터 이틀 동안 11종목의 규칙을 속성으로 배운 후, 연습장을 방문해서 실전에 들어갈 거야. 올림픽 개막식 이틀 전까지.”

    “허...”

    일정이 매우 빠듯했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이건 내 영역 밖이라서...”

    “음?”

    이건 무슨 소리? 올림픽 국가대표 감독에게 올림픽이 영역 밖이면, 뭐가 영역이란 말인가.

    “문수야. 나중에 공항에서 만나자.”

    “어... 아, 네.”

    힘들게 육군사령부 관사(집)까지 찾아오신 장모님(?)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 엄마. 벌써 가려고?”

    오! 맙소사!

    샤워를 마친 송선영이 옷을 제대로 입지도 않고 거실로 나왔다.

    같이 살자고 제안한 건 나지만, 내가 곧바로 꿈속에 처박히면서 그녀가 이 집에 더 익숙해졌다.

    내가 손님이 된 기분?

    침실과 화장실에 여자친구의 어른스러운 속옷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방해꾼은 가요~”

    “잘 가.”

    “네 아빠가 시간 될 때 병원에 한 번 오라더라.”

    “만나고 싶으면 직접 전화하면 되지.”

    “부끄럼쟁이니까.”

    “부끄럼쟁이는 무슨... 또 병원 모델이 되어달라는 거겠지.”

    참으로 정다운 가족의 대화로군!

    “진짜 간다!”

    “잘 가!”

    “조심히 가세요.”

    부우웅~

    관사에 늘 대기 중인 방탄 차량을 이용해서 장서연 감독님이 떠났다.

    “......”

    대접받는 것 같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할 필요 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좋지 않다.

    언제, 어디서 저격수가 내 머리통을 노릴지 알 수 없으니까.

    그나마 나는 날아오는 총알을 예측하고 피할 수 있지만, 송선영과 장서연 감독님은 전혀 아니다.

    “왜?”

    여전히 허술한 복장을 한 송선영이 물었다.

    “흠... 조금 진부하고 철학적일 수 있는데, 남들에게 주목받지 않는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됐달까.”

    “많이 주목받을수록 돈을 버는 방송인들이 늘 하는 불평이네.”

    “그래?”

    “돈은 많이 벌고 싶지만, 사생활은 침해받기 싫고. 얼마 전에도 방송국에서 여자애 하나가 질질 짜고 있더라.”

    “왜?”

    “예쁘고 끼도 많아서 신인상을 받았는데, 그 바로 다음 날에 중학교 동창이 과거를 폭로해서 망했어.”

    “아...”

    흔한 일이다. 가수나 배우로 성공해서 이름을 알리자마자 학교폭력 가해자로 드러나면서 몰락하는 이야기.

    방송인은 얼굴을 파는 직종이라서 편견 아닌 편견이 한 번 씌워지면 돌이킬 수 없다.

    철없는 시절의 실수?

    학교폭력 피해자가 트라우마로 여전히 고통받는 중이라고 해버리면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

    “이름은 이나연.”

    “음?”

    “눈을 뜬 정용상 씨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사망한 직후에 잠들었어.”

    “아...”

    “현재는 엘몰랑스 병원에 입원 중이야.”

    “그런데 갑자기 왜...”

    송선영이 나에게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 이야기를 한 적은 처음이 아닐까? 그녀는 공황에서 황녀랑 싸우려고 했던 전적도 있을 만큼 내가 다른 여자랑 가까워지는 걸 꺼린다.

    “올림픽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그런데?”

    “이나연의 꿈속에 들어가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그녀는 매우 건강해서 시간도 매우 느리게 흘러가거든.”

    “......”

    어머니가 송선영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준 것 같았다.

    “어때?”

    “...사연만 들어봐도 알겠네. 성공의 걸림돌이 된 과거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든 꿈인가.”

    “정답.”

    배경은 현대. 당연히 동계 올림픽도 열리고, 규칙도 현실이랑 똑같을 것이다.

    “흠...”

    “나는 괜찮아.”

    “정말?”

    “어. 정말이야.”

    내가 다른 여자의 다리만 쳐다봐도 짜증을 냈던 송선영에게서 여유와 관용이 느껴졌다.

    이건 무슨 변화지?

    송선영이 웬일로 내 시선을 피하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받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돈도 많은 애가 나에게 뭘 받고 싶다는 걸까.

    “청혼.”

    “......”

    쿵!

    심장에 묵직한 한 방이 들어왔다.

    “피메달을 따고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청혼해줬으면 좋겠어.”

    “어... 굉장히 구체적이네.”

    “그래야 나중에 딴소리 못하지. 어머님은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어.”

    “......”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익귀의 계략에 말려서 꿈속에 10년 동안 갇혀 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지도?

    송선영이 재촉했다.

    “싫어?”

    “...해볼게. 피메달을 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면 충분해.”

    나에게 다시 고개를 돌린 송선영은 울고 있었다.

    “어디 아파?”

    “바보야. 좋아서 우는 거야.”

    “......”

    내가 그동안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것 같아서 미안했다. 실제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짓도 좀 했고!

    “눈물이 계속 나오네.”

    “선영아.”

    “왜? 훌쩍.”

    “냉장고를 보니, 전에 없었던 술이랑 과일이 있더라고.”

    “어머님이 고향에서 가져오신 거야.”

    “마실래?”

    “나만?”

    “당연히 나도 마시지.”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면서 술주정하는 손님들에게 너무 고통받은 탓에 혐오 비슷한 거부감이 있으니까.

    내가 그들처럼 취해서 모르는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칠 것을 생각하면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가질 않는다.

    “...좋아.”

    잠시 망설이던 송선영의 승낙에 심장이 펄쩍펄쩍 뛰었다.

    “가져올게.”

    “아니, 술이랑 안주는 내가 준비할게. 너는 씻고 와.”

    “...그래.”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 * *

    천천히 준비를 마치고 엘몰랑스 병원으로 향했다.

    어젯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이유를 깨달았으며,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할 마음으로 충만해졌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원장님.”

    내가 신성로마제국 황족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 다시 중요도 1순위로 올린 서혜주 원장.

    사람이 이 정도로 권력과 명예에 충실해도 되는가, 싶으면서도 그녀의 빠른 승진을 보면 수긍이 됐다.

    “표정이 좋아.”

    “제가요?”

    “이전까지는 취업준비생처럼 조급해하는 게 있었다면, 오늘은 인생의 승리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가 있네.”

    “하핫!”

    “정말로 뭔가가 있구나?”

    “비밀입니다.”

    원래는 병원에 같이 올 계획이었던 송선영은 촬영 일정도 전부 취소하고 집에서 쉴 예정이다.

    내가 좀 심하긴 했지.

    술은 사람의 절제력을 빼앗는다. 그 대신에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었던 용기와 과감한 행동력을 주입...

    야수로 만든다.

    “비밀이라... 이성친구랑 동거 중인 20대가 생각하는 비밀은 뻔하지만, 굳이 말하진 않을게. 선영이에게 이야기는 좀 들었어?”

    “네. 이나연 씨라고요.”

    “맞아. 따라 와.”

    가장 최근에 잠든 라누벨 환자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아들~ 어서 와요~”

    어머니가 병실 앞 복도에 앉아서 책을 읽고 계셨다.

    “역시... 계실 줄 알았어요.”

    “어머!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환자의 꿈을 송선영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예리한데요? 맞아요.”

    덤으로, 라누벨라 10세의 특기였던 단체최면술로 불필요한 시선의 집중도 피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말을 걸면서 최면이 풀리고 말았지만.

    “와...”

    “와아...”

    지나가는 남성들이 어머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억?!”

    급기야 심장에 무리가 온 환자가 쓰러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그래요~”

    서혜주 원장님이 보안을 위해 보호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가족, 매니저, 의사, 간호사...

    “흑흑!”

    “......”

    눈부시게 성공할 줄 알았던 딸의 몰락에 모친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 바빴고, 부친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부모도 문제가 있네요.”

    학교폭력은 사춘기, 정신병을 포함한 무슨 변명을 해도 용납될 수 없다.

    결국은 딸의 인성 교육과 학창 시절을 방관한 부모의 잘못.

    저렇게 억울해할 게 아니다.

    “엄마는 바르게 자라준 아들에게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무당이 된 뒤로 상당히 폭력적으로 바뀌었습니다만...”

    “그러면, 부모 없이 자라서 삐뚤어진 아들을 바르게 잡아준 소운현 씨에게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킁.”

    할 말이 없다. 내가 힘에 취해서 폭주할 때마다 선배가 잡아줬으니까. 정말 힘들어할 때는 도와주고.

    “예쁜 아가씨네요.”

    “뭐... 예쁘긴 하네요.”

    적성이 얼굴로 먹고사는 방송인인데, 안 예쁘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배우는 배역에 따라 다양한 외모가 필요해서 연기력을 높이 보지만, 가수 적성은 외모와 가창력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나올 수 없다.

    못생긴 실력파 가수?

    구시대에나 통하던 옛날이야기다.

    “이나연 양은 문제가 된 학창 시절부터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어요.”

    “회귀로군요.”

    “이미 적성을 알기에 공부는 거의 안 하고, 노래방에서 혼자 연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주식이나 부동산을 안 하네요?”

    “관심이 없으면 그쪽 정보는 전혀 모르죠. 알더라도 저 나이에는 돈이 없고, 부모가 어린 딸의 말만 믿고 투자할 리도 없고요.”

    “뭐...”

    “그리고 엄마의 경험인데요. 주식이 적성이 아닌 사람이 회귀해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면 결국에 망해요. 적당히 먹고 빠지면 괜찮지만.”

    “에? 어째서요?”

    그건 좀 이해가 안 됐다.

    “주식의 미래가 환자 탓에 바뀌었으니까요. 자신의 정보를 맹신하는 비전문가는 투자자들에게 좋은 장난감이죠.”

    “......”

    아버지는 맹신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좋은 장난감이었다.

    “슬슬 시작할까요?”

    “엄마도 들어오시게요?”

    “당연하죠.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기술이 정말 많으니까요. 하지만 아들처럼 꿈속에 들어가진 않아요. 마녀답게 간접적으로.”

    “차이가 큽니까?”

    “매우 크죠. 간접은 꿈속에서 힘을 거의 쓰지 못하니까요. 그 대신, 현실의 생활에 지장이 없고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답니다.”

    “흠... 저는 안 되겠네요.”

    검귀를 부지런히 썰려면 힘이 줄어들어선 안 된다.

    “시작할게요.”

    “아들, 잠시만요. 들어가는 타이밍이 중요해요.”

    “......”

    “어디 보자... 시간이 제법 흘렀네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됐고... 어머! 아들에게 접근하는데요?”

    “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현실이랑 똑같은 세계니까요. 당연히 강문수도 존재하죠.”

    “......”

    “미래이긴 하지만, 올림픽 국가대표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족. 기억상실에 걸린 백마 탄 왕자님이나 다름없잖아요?”

    “참 못생긴 왕자네요.”

    “어머! 아들이 어때서요? 13세도 아들이 잘생겼다고 한걸요?”

    “그 황녀님이요?”

    “네. 진짜로요.”

    “...믿기지 않네요.”

    “어머? 슬슬 들어가지 않으면 아들의 순결이 위험하겠는데요?”

    “헉!”

    식겁한 나는 이나연의 손을 신속하게 건드리며 꿈속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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