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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89화 (190/232)
  • 189화

    ‘뻔하지.’

    사기적인 날개로 어디든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익귀가 번거로운 대화를 먼저 제안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 정체를 이토록 잘 안다면, 꿈속에 들어올 때마다 죽이면 된다. 번거롭게 대화를 시도할 필요 없이.

    결정적으로, 제법 거리를 벌린 채 ‘나의 세계’ 밖에서 말하고 있다.

    “아니라고는 말하지 마.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게 증거니까.”

    “......”

    “......”

    으스대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가 선배의 말을 듣지 않고 ‘나의 세계’를 전부 사용했다면? 그래서 영역이 좁아졌다면?

    놈들은 순식간에 내 옆으로 이동해서 멱을 땄을 것이다.

    계속, 계속, 계속...

    죽을 때마다 ‘나의 세계’가 좁아지기에 나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이어갈 순 없잖은가?

    운이 좋았다.

    “자! 이젠 어쩔 셈이지?”

    “...인정하마. 너는 우리보다 강해.”

    “우리는 마녀들에게 가려진 너의 존재를 너무 늦게 발견했다.”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네?

    “알면 앞으로 P를 괴롭히지 말고 곱게 성불해. 아니면 나에게 싹 죽던가.”

    “하핫!”

    “푸하하!”

    그러자 갑자기 웃는다.

    “뭐가 웃겨?”

    “확실히... 우리는 너를 못 이겨. 날개로 접근 불가. 팔은 역으로 절단. 이길 방법이 없지.”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어떻게 잡을 셈인 건가?”

    “......”

    내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이자 녀석들은 순식간에 다시 거리를 벌렸다.

    나의 영역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날개를 봉인하고 발렌타인으로 썰어버릴 수 있을 터.

    그러나 놈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칼을 또 사용한다면 대화는 여기까지다.”

    “사용해도 어차피 닿지 않을 테지만, 궁금하면 써봐라.”

    “......”

    칼날 촉수가 놈들을 부지런히 추적해도 저 날개가 있는 이상, 쓰러트릴 방법이 없었다.

    익귀들은 나를 못 이기고, 나도 놈들을 죽일 수 없는 상황!

    무승부였다.

    “이해했으면 우리의 요구를 전하지.”

    “네가 P를 설득해서 우리의 꿈을 되돌려라.”

    “직접 해.”

    “했다. 수천 번도 더! 하지만 P는 꿈쩍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P는 이런 설정 덩어리랑 격이 다른 진짜 여신(女神)이니까. 하지만 그 완벽한 존재도 가족에게는 무른 것 같더군.”

    시위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그들도 지친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해. 그게 가능했다면 P가 진즉 해줬을 거야.”

    “......”

    “......”

    “냉정하게 생각해.”

    이 녀석들을 쓰러트릴 방법을 아무리 궁리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득뿐!

    “포기? 행복하게 살다가 갑자기 모든 걸 잃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아내, 자식, 손자, 친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괴물로 변한 이 손으로 전부 죽였지.”

    “어차피 꿈이야.”

    내가 할 말은 바뀌지 않는다.

    “현실과 꿈의 차이가 뭐지? 어차피 살아가는 건 똑같다.”

    “네가 사는 곳은 정말로 현실인가? 무슨 근거로 확신하지?”

    “철학적인 얘기는 됐어. 너희의 존재가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P에게 걸림돌이란 사실만 있을 뿐.”

    인류는 P의 적성검사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P의 희생 또한 바라지 않는다.

    즉, 그 둘을 전부 이루려면 이것들이 사라져야 한다!

    “P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자손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족을 잃은 것처럼!”

    “너희가 무슨 수로?”

    익귀와 검귀가 무더기로 덤벼도 나를 이길 수 없다.

    “이기진 못해도 이 꿈속에 널 가둬둘 순 있지.”

    “너를 도와주던 혈신도 이젠 없다. 어떻게 빠져나갈 텐가?”

    “......”

    어? 어라? 잠깐! 저놈들에게 살해된 여신이랑 함께 있던 라누벨 환자는 어떻게 됐지?!

    너무 하찮아서 깜빡했다.

    “열심히 찾아봐라.”

    “10년 뒤에 돌아오지.”

    “뭐?! 이 미친...!”

    깜빡!

    눈깔 촉수가 칼날을 날렸지만, 익귀들은 날갯짓 한 번으로 순식간에 도망쳤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날개.

    너무 사기잖아!

    “P의 자손이여. 10년 뒤에 보자.”

    “네가 아끼는 현실이 망가지는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봐라.”

    “이 새끼들이...!”

    팟! 팟!

    할 말을 마친 익귀들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끼기긱!

    끼긱!

    날개가 없는 검귀들은 나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살육을 벌이다가 공작령의 병사와 용병들에 의해 하나둘 사냥당하다가 전멸했다.

    “와아아!”

    “와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하지만 저들처럼 기뻐할 수 없었던 나는 목이 잘린 여신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야. 눈을 떠.”

    저놈들에게 살해된 생명은 되살릴 수 없지만, 익귀도 무서워하는 나의 영역 안이라면 다르다.

    파르르르-

    “...아?”

    천천히 눈을 뜬 여신이 눈알을 좌우로 움직이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용사는 어디 있지?”

    “감히! 당장 놔라!”

    “그래.”

    툭!

    소원대로 머리채를 놔줬다.

    “어?!”

    나는 흙바닥에 처박힌 여신의 머리를 발로 밟으며 재차 질문했다.

    “용사는 어디 있지?”

    “이, 이게 대체...?!”

    “반응을 보니,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모양이네.”

    “......”

    굴욕으로 새하얀 얼굴이 새빨개진 여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다시 죽어라.”

    “자, 잠깐...!”

    “할 말이 있나?”

    “나는 이 세계의 신(神)이다! 힘을 되찾으면 용사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과연...”

    그럴싸한 주장이었다.

    “아악?!”

    밟고 있던 여신의 머리채를 다시 움켜쥐며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지금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

    “으윽...!”

    “용사를 지킬 수 있을 것처럼 거만하게 말하더니 이게 뭐야? 쓸모없는 운석이나 떨구고.”

    익귀에게 살해되지 않은 천사들이 우리의 주위로 몰려왔다.

    “당장 놔라!”

    “신성모독이다!”

    “여신님?!”

    이전의 나였다면 여유를 갖고 장단에 맞춰줬겠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10년이나 꿈속에?

    익귀들의 예언처럼 나의 소중한 현실이 망가질 것이다.

    “닥쳐. 죽기 싫으면.”

    “이놈이... 허억?!”

    콰당!

    겁도 없이 내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천사가 흙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현실적으로 저 몸을 띄우기에는 날개가 너무 작고 약했으니까. 판타지가 빠지면서 추락하는 게 당연하다.

    “죽어라.”

    댕강!

    추락한 천사의 목이 칼날 촉수에 절단되며 떨어졌다.

    천사가 어쨌다고?

    나의 영역 안에서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거추장스러운 날개 때문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니 인간 이하의 생물이라고 해야 할까.

    “겁먹지 마라!”

    “여신님을 구하자!”

    “전원 공격...!”

    천사들이 형광등으로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용감하게 날아왔고, 추락하고, 칼날 촉수에 모두 죽었다.

    혈신 만세를 외칠 필요도 없었다. 너무 느려서 눈깔이 조종하는 칼날 촉수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모두 멈춰!”

    “......”

    “......”

    머리만 남은 여신의 외침에 모든 천사가 무의미한 죽음을 멈췄다.

    “말리는 게 늦네.”

    “......”

    여신이 도톰한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을 아꼈다.

    “다행히 깔끔히 잘라놨군.”

    부서진 장난감처럼 다시 조립해야 하면 귀찮을 뻔했는데, 목의 절단면만 붙이면 될 것 같았다.

    톡.

    출혈이 심하고 장기의 기능도 전부 멈췄지만, 그 정도는 여신의 힘으로 복구가 가능하리라.

    “으윽...!”

    비틀~ 털썩!

    부활의 후유증 탓에 스스로 서질 못한 여신이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자, 여신님? 살려드렸으니 약속대로 용사를 찾아주세요.”

    “...두고 보자.”

    번쩍!

    엉뚱한 말을 한 여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헉! 여신님?!”

    “여신님~?!”

    공간을 도약해서 내 영역을 벗어난 여신의 목이 바로 분리됐다.

    때구르르~

    그리고 그녀의 머리는 다시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너는 인간을 순진한 바보로 아는 것 같네.”

    애초에 완전한 부활은 무리다. 여신은 익귀의 팔에 절단됐으니까.

    나의 영역 안에선 ‘목이 잘려도 여신은 살아있다.’라는 설정이 적용되지만, 벗어나면 익귀의 규칙으로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구조.

    즉, 지금의 여신은 내 영역에서만 살 수 있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다.

    “이, 이게 대체...?!”

    “나를 한 번만 더 자극하면 똥통에 머리를 담가버릴 거야.”

    “......”

    “이해했어?”

    다시 목이 연결된 여신이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용사는 어디에 있지?”

    신(神)부터 병신인 이딴 세계에 10년씩이나 갇혀 있을 생각은 없다.

    “못 찾겠다.”

    “하아?”

    진짜 쓸모없는 신이네!

    “기, 기다려라! 무언가가 나와 용사 사이에서 방해하고 있다.”

    “......”

    짜증이 다시 몰려왔지만, 여신에게 화풀이하진 않았다.

    ‘철저하네!’

    익귀들은 내가 이럴 것까지 예상하고 대비책을 마련해둔 것 같다.

    “무조건 찾아.”

    “알겠다...”

    내게서 멀어질 수 없는 여신이 천사들에게 명령했다.

    용사를 찾으라고.

    * * *

    내 목숨이 타인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면?

    그 삶은 매우 절망적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일 정신력이 없다면 비굴해질 테고.

    “주인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이 여신이 딱 그랬다.

    자존심을 세우던 처음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어떻게든 불안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양 떨기 바빴다.

    “후우...”

    “소녀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아니. 용사를 여태 못 찾아서 살짝 짜증이 났을 뿐.”

    “주인님! 열심히 찾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여신이 벌벌 떨면서 애원했다.

    이게 정녕 신(神)인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도록 일하는 흔한 맞벌이 부부보다 못한 정신력에 기가 찰 따름이다.

    “주인님~”

    여신은 틈만 나면 자극적인 옷을 입고 나를 유혹했다. 내 손을 풍만한 가슴이나 엉덩이로 유도하거나, 다리를 벌리고 내 몸에 비비거나...

    “당장 떨어져.”

    “어머!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느릿느릿 물러서는 여신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내 아이를 낳아서 목숨을 보장받겠다는 얄팍한 계획.

    성공만 한다면 내가 그녀를 못 죽이는 건 맞다. 성공만 한다면.

    ‘미치겠네!’

    시간이 덧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라누벨 환자 ‘정용상’의 건강이 처음부터 안 좋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은 수개월이 흘렀으리라.

    “주인님~ 함께 목욕하고 싶어요~”

    “하아...”

    하늘의 궁전에서 아름다운 여신을 노예처럼 거느리며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주인님~”

    “정신 사나우니 좀 닥쳐...!”

    “히익?!”

    겁에 질린 여신이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박듯 엎드리며 용서를 빌었다.

    “진짜 미치겠네!”

    “아무리 짜증이 나도 숙녀에게 그런 말을 쓰면 안 돼요.”

    “......”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목이 부러질 기세로 뒤를 돌아봤다.

    “안녕~!”

    “...환각인가?”

    “아들. 엄마의 예쁜 얼굴에 슬슬 익숙해지는 게 어때요?”

    “진짜...?”

    “네. 진짜예요. 세상에서 가장 먼진 남자의 엄마랍니다!”

    “아...”

    라누벨라 10세.

    검은색 고딕풍 드레스와 양산으로 치장한 어머니가 생긋 웃으셨다.

    “어때요?”

    “어... 흡혈귀 귀부인 같아요.”

    “0점! 엄마는 이만 갈게요.”

    “아아! 눈을 씻고 다시 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 같습니다...!”

    “합격.”

    “......”

    나는 여신의 비굴한 태도를 이해하게 됐다.

    “아들. 도와줄까요?”

    “네! 제발! 이 환자 새끼를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가족에게 무얼 숨기겠는가? 바로 솔직하게 털어놨다.

    “못 찾는 게 당연해요.”

    “왜요?”

    “우주에 던져놨으니까요. 검귀 1마리가 외롭게 허우적거리고 있던데요?”

    “......”

    혈압이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쭉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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