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86화 (187/232)

186화

깜빡?

칼 손잡이에 박힌 눈깔이 당황한다.

‘어라?’

나도 당황했다. 생각보다 블레이드의 기능인 칼날의 소환 범위가 시원찮았던 탓이다.

...혹시?

진동에 놀란 에로나를 돌아봤다.

“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저의 신께 기도했습니다. 이 주위의 모든 악(惡)을 박멸해달라고.”

아무래도 이 여자가 ‘동료’로 인식된 것 같다. 매우 억울하지만, 위대한 선배님의 판정이니 따를 수밖에!

그나저나...

‘정말로 시작됐네.’

아무래도 사랑하는 동료들의 떼죽음이 크게 적용된 것 같았다. 한 명만 죽어도 정신이 혼미해질 텐데, 단시간에 무더기로 사망했으니...

버티는 게 이상한 거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테냐.’

동료가 죽었다. 검귀에게 동료애나 동료의식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부분은 마녀들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반응을 한 번 보자.

생각할 줄 안다면 틀림없이 침투를 멈추고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다.

“신께서 직접...?”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비밀입니다.”

“비밀이 많네요.”

“저만 비밀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건 곤란합니다. 특히나 공적인 일은.”

“후우... 좋아요. 안 물어볼께요. 그런데 저희만으로 이들을 영지까지 옮기는 건 힘들어요. 마차도 없고...”

“흠.”

저희?

나는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당연하게 생각하는군.

“어떡하죠?”

“......”

성가시게 됐다. 내가 라누벨 환자의 뒤치다꺼리를 할 이유는 없지만, 도의적인 문제라고 할까. 그리고 이들의 장례식을 치르면 꽁꽁 숨은 환자가 올 수도 있다.

그때, 만나서 대화 한 번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깨울 수 있을지도?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묻을까요?”

이 여자도 귀찮은 모양이다.

고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의 시체는 잠깐만 방치해도 냄새가 지독하고, 몸속에 가스가 차면서 팽창... 미녀든 추녀든 매우 끔찍해진다.

“아니요.”

현지에 묻어버리거나 태우는 편이 가장 간단하고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아름답게 자라준 소중한 딸의 죽음을 안 믿는 자가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시신 없는 장례식은 좀 그렇잖아? 상태가 좀 그렇더라도 말이다.

“흠. 나무덩굴 같은 것에 묶어서 제가 전부 업고 가겠습니다.”

“어? 가능하시겠어요?”

“그 가녀린 팔로 바위도 드시는 분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시체잖아요.”

“허리에 찬 칼로 사람을 수없이 베신 분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지인은 다르죠.”

“그래서 제가 업는 겁니다. 저는 지인이 아니기에. 도착해서 퍼즐처럼 섞이면 안 되니 모아놓지 마십시오.”

“네에...”

나는 환자들의 꿈속에서 괴물을 많이 죽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람도 많이 죽였다. 그게 악인이든 선인이든.

꿈도 현실처럼 취급하고, 동족을 죽인 숫자로 선악(善惡)을 판단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가리라.

즉, 온몸이 이리저리 분리된 시체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

깜빡~

“저 여자는 안 돼.”

깜빡...

우리의 귀여운 눈깔 촉수는 저 여자도 베어버리고 전부 이곳에 묻어버리고 싶은 것 같다.

“누구랑 대화하세요?”

“신의 사도.”

“아...”

에로나가 시신들을 묶을 나무 덩굴을 구하러 숲으로 들어갔다.

실력에 자신 있어서 저렇게 행동하는 건 이해하지만, 이 근방에 검귀가 숨어있으면 순식간에 썰리리라.

물론, 내가 혈신의 위대함으로 주변 청소를 해놔서 매우 안전하긴 하지만.

“흠.”

뚝뚝.

피가 떨어지는 시신들을 등에 짊어지고 뛰는 날이 올 줄이야.

나를 신처럼 우러러보았던 로맨스 판타지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나 헌터물 의 원주민들이 봤다면 무척 놀라워하리라.

“천천히 갈게요.”

“아뇨. 말이 지칠 때까지 전속력으로 뛰어도 됩니다.”

“어? 정말요?”

“네.”

이것도 ‘업적’이 있으면 좋겠다.

* * *

용사를 만난다는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우리는 공작령까지 무사히 귀환했다.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마을 같은 곳도 들르지 못했지만, 나도 오래 업고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별 문제는...

“냄새가 안 지워져요.”

저들처럼 용사를 따라다니면 자기도 언젠가는 시체가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은 걸까? 에로나가 내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었다.

“저는 더 납니다.”

그녀는 잠깐 옮겼을 뿐이지만, 나는 등에 장시간 짊어졌다.

“코가 마비됐나 봐요. 저랑 똑같은 것 같은데.”

“......”

“씻으셨어요?”

“당연히...”

나의 세계를 활용하면 말끔히 지울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사람들이 귀찮게 하니까. 다가오다가도 냄새에 코를 막고 달아나는 걸 보면 매우 만족스럽다.

“씻어도 계속 나요.”

“시체를 처음 만져봅니까? 시체 냄새는 원래 잘 안 지워집니다.”

“네. 처음이었어요.”

“용사랑 모험하는 동안 산적 같은 적들을 죽인 후에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우리가 옮긴 시신 중에 정령사가 있어요. 그녀가 땅의 정령에게 시켜서 시신들을 묻었어요.”

“호오~”

정령사(精靈士).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도 있었던 직업.

내 몸을 조종한 망령이 아리따운 요정 정령사들을 제압하고 모욕한 후에 죽이는 광경을 몇 번 보았다.

‘굉장히 불편해 보였는데...’

자신의 마법을 쓰는 마법사랑 달리, 정령사는 정령에게 일을 시키려면 정령의 부탁도 들어줘야 했던 까닭이다.

먼저 혹은 후에.

정령의 부탁이 쉬우면 다행이지만, 숲을 만들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할 때도 있다고...

만약, 도움만 받고 부탁을 안 들어주면 정령이 분노해서 완전히 떠나거나 훼방을 놓는다.

“그런 하찮은 일에 정령을 동원했습니까?”

“왜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정령은 매우 강력하다.

홍수, 화산, 지진, 폭우, 태풍, 가뭄...

6차 전직 이상의 대단한 마법사도 어려운 광범위한 영역에 재앙 혹은 축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땅의 정령에게 노동의 대가로 뭘 줬습니까?”

“대가요?”

“네.”

“...딱히?”

“설마... 없습니까? 여러분이 만든 시체를 정령이 대신 치워줬는데.”

“고맙다고는 했죠.”

“......”

정령을 대가 없이 노예처럼 부렸다는 소리였다.

작가 출신의 라누벨 환자가 상상한 세계관 설정이 그렇다면야 내가 할 말 없지만, 무보수는 좀 심한걸?

“실례합니다, 아몰랑 씨.”

“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검호(劍豪)의 장례식을 마친 공작령은 정상업무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전(前) 공작’의 복수를 해준 공적을 인정받아서 귀빈 대접을 받는 중인데...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새로운 영주에게 충성하는 기사가 코를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흠. 가죠.”

“저는 여기 있을게요.”

전혀 궁금하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대답한 에로나가 숨듯이 몸을 낮췄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이쪽은 믿었던 용사가 엉망이 돼버렸으니까.

약혼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가출, 일방적으로 파혼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정략혼 상대의 수준도 더 내려갔다.

쉽게 말해, 인생이 꼬였다.

“들어가십시오.”

“흠.”

끼익-

공작의 집무실로 갈 줄 알았는데, 여기는 다수의 손님을 맞이하는 파티용 접견실이었다.

물론, 현재는 파티 중이 아니라서 티타임용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왔군.”

“어서 오게.”

공작 외의 선객이 잔뜩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관인 아몰랑이라고 합니다. 교파는 개인적인 사유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깜빡~

소매 속에서 살짝 눈깔을 내민 발렌타인도 두리번거렸다.

“차가운 대지 위에서 썩을 뻔한 자식을 데려다준 감사 인사를 직접 전하고 싶다 하여 불렀네.”

“아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용사를 믿고 딸을 맡긴 자들인 것 같다.

아름다웠던 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충격받아서 얼굴이 하나 같이 반쪽이 된 사람들.

무척 안타까웠다.

“아몰랑 신관. 내 딸아이의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좋을지...”

“후우!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군. 표정이 좋지 못한 건 이해해주게.”

“괜찮습니다.”

단순히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부른 것 같지 않다.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가?”

“모릅니다. 용사의 동료였던 에로나 영애의 설명에 따르면,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법사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둘이서만 도망쳤다고?”

“네.”

“허허허... 내 딸을 버리고 둘이서 도망을 쳐? 이 새끼들이...!”

쾅!

격분한 남자가 탁자를 맨손으로 후려치며 화풀이했다.

“자네도 용사를 찾고 있다고 들었네.”

“그랬습니다. 블레이드 팬텀이 당신을 쫓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주려고 했습니다. 늦었지만.”

“용사를 찾을 수 있는가?”

“현재로선 없습니다. 하늘로 도망치면서 흔적이 끊겼으니까요.”

“흠...”

딸을 지키지 못한 사위에게 분노하는 부모 모임인가?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섬뜩했다.

‘만약, 송선영이 그때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으아아...’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용사 놈...”

“기껏 허락해줬더니...”

“내가 미쳤지...”

용사에게 따지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하지만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오!”

“있는가!”

아주 간단하다.

“블레이드 팬텀은 유적을 도굴한 용사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세계 끝에 숨더라도.”

침투하면 꿈의 주체자 근처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팬텀...”

“그건 방법이...”

“하지만 위험하군.”

판단은 그들의 몫. 그리고 나는 검귀를 쓰러트리는 방법도 새로운 공작에게 가르쳐줬다.

활, 석궁, 대포, 투석기...

안전한 원거리에서 물리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이건 나에게도 효과가 있지.’

마법 같은 판타지 요소가 조금이라도 가미된 쪽이 훨씬 만만하다.

“장례식부터 치러야지.”

“부활도 안 된다니...”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도 벌떡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이 세계의 귀족들은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때,

댕! 댕! 댕!

위험을 알리는 종이 또 울렸다.

“뭔...”

탕!

접견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들어온 병사가 다급히 외쳤다.

“공작님! 공작님! 블레이드 팬텀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몰려온다고?”

사색이 된 병사의 말에 공작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네! 10마리도 넘는다고 합니다!”

“미친!”

나에게 정보를 듣고 나름의 대비를 해뒀던 공작이지만, 놈들의 숫자를 듣고는 경악했다.

반면,

“놈들이 왔다는 건...”

“쥐새끼가 영지에 숨어 들었군.”

“허! 내 딸을 죽이고 잘도...”

멀리서 추모라도 하려고 몰래 공작령에 잠입한 걸까?

라누벨 환자가 돌아왔다.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아몰랑 신관?”

“물론, 돕겠습니다.”

겨우 10마리?

그럴 리 없다. 용의 둥지에서 파악한 놈들만 3마리였으니까.

환자의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인 지금은 세계에 균열이 더 커졌다. 10마리만 왔을 리 없다.

그게 아니면...

‘나 때문에 탐색하는 건가?’

뭐가 됐든 일단은 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쿠구구구!

“...음?”

갑작스러운 지진. 유리와 도자기 같은 섬세한 물건들이 깨질 정도로 심한 흔들림이었다.

이번에는 또 뭐야?

덜컥!

가장 먼저 반응한 공작이 깨진 창문을 열며 외쳤다.

“저건...!”

멋진 광경이었다.

“그렇군.”

용사의 행복을 빌어주며 이 세계로 초대한 신(神)이 강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