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85화 (186/232)

185화

[10장-3절] 혈신 만세!

라누벨 환자가 꿈속에서 고생하면 마녀가 가서 도와준다. 조기에 사망하거나 고통받다가 연료로 바뀌지 않도록 나름의 복지를 신경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이지.’

난임 혹은 사고로 마녀들이 죽고, 유일하게 활동하던 라누벨라 13세는 돌연히 2년 동안 휴업 선언!

이젠 환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요.”

검귀가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으로 뚫어놓은 숲길을 질주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넓은 구릉을 마주했다.

그리고 구릉 위에는 깔끔히 머리가 양단된 거대한 용 1마리.

처음 보는 생명체를 관찰하다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당한 듯했다.

“정말로 용사님을 노리고 있네요...”

내 말을 믿지 않았던 에로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정하세요.”

“하, 하지만... 제가 용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블레이드 팬텀이 영지로 안 왔을 테고, 그러면 아버지도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아아!”

털썩!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용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대지에 주저앉았다.

정략혼 때문에 부모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수색해라.”

“네!”

요정 레고리스의 지시를 받은 수하들이 용의 둥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도 놀고 있을 순 없지.

“어디 보자...”

용의 목이 아닌 두개골을 수직으로 두 동강 내서 죽였다. 그건 딱히 놀랍지도 않지만, 시체에 상처가 너무 없다는 게 특이했다. 일반적인 검귀라면 죽인 뒤에도 난도질했을 테니까.

용의 심장은?

레고리스가 다가왔다.

“용의 심장. 그건 진짜 심장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용의 목 안쪽에 있는 힘의 결정체지.”

“있을까요?”

“매우 높은 확률로.”

푸른 기운에 감싸인 단검을 역수로 쥔 레고리스가 용의 비늘을 찔렀다.

푹!

매우 천천히, 힘겨운 표정을 지은 채 비늘을 벗겨냈다.

“...도와줄까요?”

“흠...”

망설인다.

“용의 심장의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용사가 이곳에 왔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뭘 원하지?”

“없습니다.”

“용의 심장도 귀하지만, 용왕의 심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물인데. 욕심을 안 낸다니? 그 가치를 몰라서 그런가?”

“그 반대입니다.”

깜빡!

발렌타인을 검으로 바꾼 후에 용의 목을 절단했다.

“아...?”

용의 비늘 1장 벗기는 것도 벅찼던 레고리스가 넋을 놔버렸다.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필요한 분이 사용해야죠.”

“...고맙게 받지.”

레고리스의 말투가 이전보다 정중해진 것 같다.

내가 자른 절단면의 목구멍에 직접 기어서 들어가네?

어지간히 갖고 싶은 모양이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주변 수색을 마친 레고리스의 수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잠시 뒤,

“푸하...!”

참았던 숨을 내뱉듯 목구멍 밖으로 나온 레고리스. 그는 온몸에 용의 피와 타액을 뒤집어쓴 상태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찾으셨습니까?”

“있습니까?”

수하들도 용의 심장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이다.”

반짝반짝!

레고리스가 품에서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야구공 크기의 구슬을 꺼냈다.

“오오!”

“저것이...”

함께 감동해주고 싶지만, 전혀 공감이 안 됐던 나는 이곳에 온 우리의 ‘목적’을 상기시켜줬다.

“레고리스 씨.”

“흠. 미안하다. 내 욕심 때문에 지체하고 말았군.”

그의 말투가 겸손을 넘어서서 대단히 친근해졌는데? 표정은 10년 만에 만난 고향 사람을 보는 듯하고.

용의 심장을 양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친구가 됐다.

“아무래도 용사는 목적지까지 오지 못한 것 같네요.”

“그렇군. 용의 심장이 그대로 있는 것만 봐도... 이 근방이 조용했던 이유도 납득이 가.”

전투는 없었다.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 밟은 개미처럼 죽은 생물만 있을 뿐.

레고리스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알아낸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요정들이 차분히 보고했다.

“대장님. 블레이드 팬텀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공유하지 않은 게 아니라 공유할 게 없었던 거였군.

“유령처럼 발자국을 안 남기고, 털도 없는 괴물. 성가신 놈들이야.”

“알아낸 거라곤... 우리가 추적한 팬텀과 이 용을 살해한 팬텀이 다르다는 겁니다.”

“새로운 팬텀이라고?”

“네. 용왕을 사냥한 후에 둥지 앞에서 합류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소 3마리란 얘기군.”

3마리.

나에게는 1마리나 3마리나 큰 차이가 없지만, 1마리도 쉽지 않은 이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놈들이 합류해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습니까?”

내 질문에 요정이 레고리스에게 허락을 구하듯 쳐다봤다.

“괜찮아. 우리는 친구니까.”

어?! 진짜로?

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족의 벽을 허물 정도의 우정일 줄은 몰랐다.

“합류해서 기존의 숲길을 따라 내려간 것 같습니다.”

“아!”

검귀들의 계획을 깨달았다.

‘머리를 잘 썼네!’

숲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만들어서 후발대랑 빠르게 합류, 둥지로 올라오는 중인 용사를 마중 나갔다.

다만,

‘이상한걸. 환자가 검귀 3마리를 이길 기량은 아닐 텐데?’

내가 고민하는 동안 수하들을 치하한 레고리스가 말했다.

“가보면 알겠지.”

“흠.”

서둘러야겠다. 환자가 죽으면 헛걸음한 꼴이니까.

* * *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에로나는 서두르듯 앞장섰다.

만류해야 정상이지만, 요정들은 그녀가 ‘용사의 여자’라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죽으면 방아쇠 역할이 될 수 있기에 말리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놔뒀다.

그때,

“저기...!”

에로나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 늦었군요.”

사선으로 몸이 절단된 여성이 숲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당연히 즉사.

라누벨 환자 ‘정용상’의 소설 설정이 묻어난 이 판타지 세계는 부활에 관대한 편이지만, 마법 같은 판타지가 안 통하는 검귀에게 당하면 그것도 무리. 완전히 죽었다고 봐야 한다.

“저쪽에 더 있군요.”

미녀(美女)는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게 불문율이지만, 검귀는 ‘용사의 여자’들을 가차 없이 몰살시켰다.

하나, 둘, 셋, 넷...

보고받은 인원보다 시체가 적은 것으로 봐서는 전멸까진 아닌 모양이다.

“성녀님마저...?”

에로나가 깔끔히 양단된 여인을 보고는 넋을 놔버렸다.

성녀(聖女).

성스러운 여인.

작품 설정을 대충 훑어봐서 잘은 모르지만, 교황이랑 비슷하거나 살짝 높은 계급이라고 보면 된다.

“또...”

숨어있다가 깜짝 등장한 암살이나 습격은 아니지만, 그녀들은 무기를 뽑을 틈도 없이 검귀에게 살해됐다.

역량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다는 의미.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됐다..

“그녀도 이렇게 당했군.”

용사를 선택한 약혼녀가 떠오른 레고리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이건...?”

나는 싹뚝 잘려서 못 쓰게 된 칼을 수풀에서 주웠다.

매우 정교한 세공.

이 판타지 세계관의 야금술 수준은 모르지만, 이건 인간의 손으로 구현하기 힘든 경지였다. 실전보다는 의전용으로 적합할 것 같은?

깜빡~

내 오른쪽 어깨에 장식처럼 기대고 있던 눈깔 촉수가 견적을 뽑았다.

“그래?”

깔보지 않고 인정하는 듯한 눈빛이 의외로 고평가다.

즉,

“성검이려나...?”

작품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용사의 전용 무기인 ‘성검’은 날이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는 설정이 일반적이다.

왜?

신(神)이 만든 검이니까. 부러진다면 신성모독보다는 설정 붕괴에 가까운 상황이다.

물론, 적이 신보다 강하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맞아요. 성검이 틀림없어요!”

용사랑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친한 에로나가 보증했다.

“확실합니까?”

“확실해요...”

그녀는 길바닥에 고철처럼 버려진 ‘반쪽짜리 성검’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동료들은 죽었지만, 용사는 무사히 도망친 것 같네요.”

세계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 환자가 살아있다는 증거.

“용사 일행을 습격한 블레이드 팬텀 무리의 흔적이 끊겼습니다.”

애도는 인간들에게 맡기고, 사무적으로 일대를 조사한 요정들이 말했다.

“흐음...”

라누벨 환자는 판타지 능력을 활용해서 하늘로 도망친 것 같다.

그렇게 예상하는 이유?

내가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따라올 기세로 놈들에게 추적당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멸하겠는데?’

사랑하는 여자들이 눈앞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이러고도 정신이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마법사가 안 보여요.”

용사 일행의 명단을 속속들이 아는 에로나가 말했다.

드디어 밥값을 하는군?

“아리따운 마녀의 허리를 잡고 하늘로 도망쳤다는 거군요.”

“확실해요.”

“흠...”

인간도 그렇지만, 손발이 칼날처럼 생긴 검귀는 하늘을 날 수 없다.

유일한 약점일지도?

‘아니지.’

섣부른 결론은 좋지 않다.

“이제 어쩌죠?”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 에로나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그야... 용사와 마법사가 사랑의 도피를 떠났으니 저희도 이만 퇴근해야죠.”

“예?”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누구요?”

“블레이드 팬텀. 셋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쩌저적-

환자의 정신 상태가 반영되면서 세계의 균열이 크게 벌어졌음을!

“아몰랑. 짧은 여정이었지만, 함께하는 동안 즐거웠다. 우리는 여기서 곧바로 본국으로 귀환할 생각이다.”

국보급 가치가 있는 ‘용왕의 심장’을 들고 타국에 머무르기 불안했던 걸까?

얼떨결에 친구가 된 레고리스가 귀환을 통보했다.

“여기서 작별이군요.”

“언제든지 요정왕국으로 오게. 나의 친구 아몰랑이여.”

“네. 기회가 된다면.”

숲에서는 말보다 빠른 ‘숲의 요정’들이 잽싸게 떠났다.

“......”

“......”

어느새 나와 에로나만 남았다.

“...그러면 저도 이만.”

“자, 잠깐만요! 저를 이 위험한 곳에 버려두고 갈 셈인가요?!”

“당신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칼은 장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랜드 소드마스터도 일격에 죽인 괴물을 상대로는 무의미해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을 보호할 의무는 없습니다. 기사면 기사답게 어깨를 펴고 당당히 죽으십시오.”

“거봐요. 죽으란 소리잖아요...”

“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몰랑 씨. 공작령까지 절 호위해주세요.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몇 초쯤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요?”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챙기세요. 저는 안 도와줍니다.”

“혼자서요? 그것도 얼마 전까지 함께 웃었던 그녀들을...?”

“싫으면 관두십시오.”

“기다려요! 안 한다고는 안 했어요!”

“시간이...”

깜빡!

사소한 대화 도중에 눈깔 촉수가 위기를 알려왔다.

녀석이 ‘위기’라고 느낄 수 있는 조건은 딱 하나뿐.

검귀.

놈들이 드디어 대규모 침투를 시작한 것 같다.

“시간이...?”

“...시간이 없습니다.”

“아몰랑 씨가 도와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동안 저는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아! 신관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님. 어딘가에서 잘 보고 계세요.

깜빡!

나는 형태를 바꾼 발렌타인의 칼끝을 대지에 꽂으며 힘차게 외쳤다.

“혈신 만세~!”

푹!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발렌타인]

혈신 소운현이 답답한 후배를 위해 솔로늄으로 제작한 신화급 마검.

힘차게 ‘혈신 만세!’를 외치면 적의 숫자만큼 칼날이 소환된다.

동료나 연인이 주위에 없으면 효과 범위가 대폭 상승한다!

※선배를 능가해야 수정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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