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예의를 안다면 질문하기 전에 당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히시오.”
기사로 짐작되는 남자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아몰랑. 신에게 저항하는 블레이드 팬텀을 쫓는 신관입니다.”
“신관... 어디 교단이오.”
“비밀입니다. 구해준 대가로 중요한 정보를 유출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도 어쩌지 못한 블레이드 팬텀을 간단히 쓰러트린 검사를 추궁할 목적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소.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아몰랑 신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용사는?
“영지를 구해줘서 고맙소. 나는 이 땅을 다스리는 아이젠 공작이오.”
“아, 공작님이셨군요.”
“그 건방진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소.”
“오!”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릴 것 같다.
“오라버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 상황에 공작 행세를 하실 셈인가요?!”
사내처럼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여성 기사가 참견했다.
“사랑하는 동생아. 그건 오해란다. 무적 같았던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두가 충격에 빠진 이 비상 상황에 정통후계자마저 우왕좌왕하면 영지는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장례식이 우선이에요. 후계자 문제는 그 다음이고요.”
“동생아. 너야말로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구나.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는 용사가 올 때까지 장례식 핑계로 시간을 끌고 싶은 것 아니냐?”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용사님은 아버지도 인정한 분이세요.”
“인정이라... 인정 안 했으면? 야만인처럼 쳐들어와서 칼로 위협한 용사가 아버지와 나를 살려뒀을까?”
“용사님은 저를 위해 나서신 거예요.”
“그래. 너의 정략혼을 깨기 위해 말이지. 그 일로 무역로를 잡고 있는 백작 가문이랑 틀어져서 거래가 끊겼다. 지금도 상인들이 통곡하고 있지.”
“애초에 그 정략혼은 아버지가...”
“적당히 해라.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욕할 셈이냐?”
“...저는 싫다고 했었어요.”
“귀족은 싫은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 그래서 오라버니는 날마다 여자 끼고 술을 드셨어요?”
“잠입 수사 중이었다.”
“핑계도 설득력 있는 걸 해주세요.”
이러중저러쿵.
금방 끝날 줄 알고 기다렸는데, 사이 안 좋은 남매 때문에 대화가 진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이젠 초보가 아니라고.’
신사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의 말다툼에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실례지만, 여러분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음?”
“뭐죠?”
“블레이드 팬텀은 유적을 약탈한 용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놈들은 용사와 용사의 동료를 노립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블레이드 팬텀이 나타난 장소와 시간을 조사해보십시오. 용사의 동선이랑 거의 일치할 겁니다.”
검귀의 목적은 명확하니까. 환자도 없는 지구 반대편에서 학살과 파괴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의미가 없다.
“듣고 보니...”
“억측이에요!”
용사에게 호감을 품은 여성 기사가 무작정 발끈했지만, 다른 한 명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절반의 성공.
하지만 아직 실망하긴 이르다.
“안 믿는 건 자유지만, 그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용사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용사님은 강해요.”
“그래서 소중한 동료를 잃었습니까?”
“그, 그건... 공주님이 무모하게 돌격해서 벌어진 사고였어요.”
“그렇습니까? 오늘 죽은 분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해보십시오. 무모하게 돌격한 네 잘못이라고.”
“......”
절대 못 하겠지. 그 죽은 분 중에 자신의 부친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
“용사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건 나도 궁금하군.”
우리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새로운 남성 목소리.
그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도 이용자들에게 가장 인기 좋았던 종족 ‘요정’이었다.
누구?
곧 공작이 되는 기사가 무척 호의적인 말투로 대신 소개했다.
“이쪽은 요정왕국에서 블레이드 팬텀을 사냥하기 위해...”
“대원로의 아들 레고리스다. 내 약혼녀를 지키지 못한 인간에게 따지기 위해 이곳까지 왔지.”
“아아.”
그쪽도 용사 때문에 정략결혼이 깨지셨군요?
전직 소설 작가 출신의 라누벨 환자 ‘정용상’은 정략결혼을 깨는 것을 즐기는 변태가 틀림없다.
“신성한 결혼식을 방해하고 신부를 빼앗아가서 이 꼴이라니. 내 여자가 됐으면 아이나 낳으며 편하게 살았을 텐데.”
“그건 이 용사를 만나면 하실 얘기 같은데요, 레고리스 씨?”
“흠. 나에게 옳은 말을 하는 인간도 있군. 이름은?”
“아몰랑. 신관입니다.”
“신관인가. 복장은 여행자 같은데.”
“눈속임이죠. 이렇게.”
깜빡!
집중된 시선을 피하기 위해 소매 안에 숨이었던 발렌타인이 형태를 바꿨다.
“검... 블레이드 팬텀을 일격에 쓰러트렸던 검이군.”
“보셨습니까?”
“멀리서. 나는 검사가 아니니까.”
요정은 등에 멘 커다란 활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과연...’
철판처럼 단단한 검귀의 피부를 뚫을 수만 있다면 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아니, 자살이나 다름없는 칼보다 100배 낫다!
아무튼,
“용사는 어디로 갔습니까?”
“후우... 가르쳐 줄게요.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여성 기사가 정보를 대가로 수작을 부리려고 했다.
“...공작님. 신전에 부탁해서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례는 하겠습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신전을 설득하긴 쉽지 않소.”
호의적인 기사조차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녀석 봐라?’
아는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걸더니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영지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한다면 가능하오.”
바로 속내를 내비쳤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제가 아는 블레이드 팬텀의 정보를 공작님께 넘기겠습니다.”
“내가 용병도 아니고...”
“공작님께는 그 정보가 필요 없겠지만, 블레이드 팬텀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에게는 꼭 필요하겠죠. 안 그렇습니까, 레고리스 씨?”
요정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아, 그래. 딸의 복수를 원하는 폐하께는 그 정보가 꼭 필요하겠군. 나에게 팔면 본국의 대표로서 새로운 공작을 지지해주지.”
“오오!”
기사는 살짝 아둔해 보였지만, 이 요정은 똑똑했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딱딱 알아들으니까.
주인공이 탐내는 공주랑 결혼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느낌?
무능하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이건 명백한 내정간섭이에요...!”
여성 기사가 발끈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면 공작님. 여관에서 좋은 소식이 오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하! 금방 가겠소!”
넷 중 셋이 만족하는 합리적인 거래가 마무리됐다.
* * *
판타지 원주민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전부 설명해줬다.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라누벨 환자의 건강이 위태로워지면 검귀가 무더기로 난입할 테니까. 그 귀족 아저씨처럼 허무하게 안 죽으려면 이 정보를 많은 이가 공유해야 한다.
그나저나...
“당신은 뭡니까?”
“에로나에요.”
“이름을 묻는 게 아닙니다.”
여행자 복장으로 갈아입은 여성 기사가 멋대로 따라왔다.
“오라버니가 공작이 되면 정략결혼을 다시 진행하려고 할 테니까요.”
“그래서 아버지의 장례식도 안 가고 가출한 겁니까?”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예요.”
“당신이 저만큼이나 이기적인 여자라는 건 알겠습니다.”
황녀가 나를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외모 빼고 전부 마음에 안 든다.
‘솔직히 외모도...’
얼굴만 예쁘고 다리는 평범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용사 주위에는 이런 여자만 꼬이는 모양이군.”
나에게 정식으로 의뢰한 요정 레고리스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
“......”
그의 후방에는 공주를 살해한 블레이드 팬텀을 죽이고, 용사에게 항의하라는 특명을 받은 정예군이 함께했다.
내가 동행을 허락한 이유?
‘이들은 방아쇠야.’
이야기를 들어보니, 용사의 탈을 쓴 라누벨 환자는 이 요정들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도망치듯 떠났다.
솔직히 답이 없잖아?
결혼식을 엉망으로 만들고 신부를 빼앗았는데, 행복하게 해주긴커녕 차가운 시체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이 정도면 자결 외에는 책임질 방법이 없다.
“제가 어때서요?”
멋대로 따라온 여성 기사, 에로나가 발끈했다.
이에 요정이 짜증 섞인 말투로,
“제멋대로지. 그녀도 그랬다. 파혼으로 두 부족은 완전히 갈라섰고, 용사가 더 나은 사위라는 식으로 나에게 모욕을 줬던 폐하는 딸과 민심(民心)을 잃고 폐인처럼 살고 계신다.”
“아...”
“공작령도 비슷하더군. 아니, 블레이드 팬텀이 변변찮은 신부 대신 그랜드 소드마스터를 죽였으니 더 심각할지도? 애초에 파혼을 주도한 자가 책임도 안 지고 도망치는 건 무슨 경우인지...”
이 요정도 죽은 약혼녀랑 처지가 비슷한 인간 여자 ‘에로나’가 매우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용사님은 모르는 게 없으세요. 분명히 이번에도 해결해주실 거예요.”
“그러길 고대하지.”
용사가 향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런 분위기이려나?
나도 포기했다.
‘좋게 생각하자고.’
검귀는 틀림없이 온다. 그리고 라누벨 환자가 지금처럼 장기간 수세에 몰려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질수록 세계의 균열이 커지리라.
그 끝은?
검귀의 대규모 공세!
내가 원하는 순간이다.
“용사님은 블레이드 팬텀에게 당한 공주님을 되살리려면 용왕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용왕의 심장이라... 그럴싸하게 들리긴 하군요.”
아무래도 자신의 소설에 있는 설정을 그대로 활용할 심산인 모양이다.
“성녀도 비슷한 보고를 신전에 하고 용사를 따라갔지. 하지만 용왕을 건드린 것치고는 너무 조용하군.”
레고리스가 의문을 제시했다.
“확실히 좀 이상하네요.”
헌터물 에서도 강력한 괴물이랑 싸움이 벌어지면 주위가 초토화됐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도 마찬가지. 마지막 전투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며 발생한 충격파가 대재앙에 버금가는 폭풍으로 돌변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용의 둥지로 이어지는 숲길의 옆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무슨 뜻이지?”
“이 나무를 자세히 보세요.”
“나무가... 음?!”
내 손끝을 따라간 요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소나무의 줄기에 일직선으로 생긴 송진(松津).
송진은 침엽수에 상처가 생기면 분비되는 물질이다. 식물의 피딱지라고 할까?
검귀가 좁은 나무 사이를 지나가며 건드린 것 같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까닭에 이런 식의 흔적이 생긴 것이다.
“블레이드 팬텀입니다.”
“흐음. 송진이 약간 뿌옇고 점성이 있군. 놈은 한참 전에 여길 지나갔어.”
그 송진을 손으로 만져본 레고리스가 덧붙였다.
“잘 아시네요.”
“숲에 사는 요정이라면 상식이지.”
그런 우리를 에로나가 가슴을 두드리며 다그쳤다.
“그러면 한가하게 송진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에로나 양, 걱정하지 마세요. 용사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라누벨 환자가 죽었다면 지금처럼 꿈이 계속될 리 없으니까. 아니면 이미 검귀로 변해서 학살을 벌이고 있던가.
“레고리스 대장!”
“대장! 찾았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송진을 중심으로 수색을 개시한 요정 대원들의 외침. 우리는 그들이 발견한 것을 보자마자 같은 생각을 했다.
“둘이네요.”
“둘이군.”
나무 사이로 얌전히 지나가는 것에 질려버린 놈들이 걸리적거리는 모든 걸 베어서 길을 만들었다.
한 마리에도 쩔쩔매는데 둘?
강력한 총화기의 대체품인 마법이 주류인 이 세계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용사님~!”
에로나가 용사를 애타게 부르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무모한... 저러다가 죽지.”
“저희도 조금 서두르죠. 레고리스 씨도 시체에게 항의하고 싶진 않으실 것 아닙니까?”
“쯧. 속도를 높인다!”
우리는 두 검귀가 만들어놓은 숲길을 달리며 빠르게 추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