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초능력을 각성하는 헌터물, 내공으로 강해지는 무협물, 경험치를 쌓는 게임물, 순수한 판타지도 해봤다.
내 예상을 벗어나는 힘이 있을까?
설사 있더라도 나를 위협할 힘이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덤벼라, 애송이!”
용병 길드에 마련된 대련장에 도착하자마자 용병이 호기롭게 외쳤다.
“뭐... 좋습니다.”
우선은 가볍게 실력을 보기로 했다.
깜빡~
귀여운 눈깔 촉수, 발렌타인이 눈앞의 용병을 베어버릴 것을 추천했다.
기다려. 이따가 검귀를 포함해서 실컷 베게 해줄 테니까.
팟!
돌진하듯 도약하며 가볍게 발차기.
내 속도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용병이 반응했다.
“제법이군!”
푸른 기운으로 뒤덮인 큼직한 주먹을 내 안면을 향해 내질렀다.
부웅-
인간의 기준을 한참 벗어난 속도. 재능이 아닌 힘으로 밀어붙이는 내 움직임을 예측한 회피도 수준급이었다.
‘일류 용병이란 건가.’
편의점 사장님 정도의 재능일지는 곁에 선배가 없어서 알 수 없지만, 나보다 뛰어난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불끈!
상대에 맞춰서 나도 속도를 높였다.
“흡!”
빗나간 오른발 발차기에 실망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른발을 축으로 왼발 뒤돌려차기.
태권도의 신으로 불린 고무신 관장님처럼 깔끔하진 않지만, 부족한 부분은 몸으로 충당했다.
부웅-
“헛?!”
퍽!
복부를 때렸으나 얕다. 죽일 의도가 없기도 했지만, 이 용병의 반응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탓이다.
“제법이시네요.”
나는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며 씩 웃었다.
대충 이 정도인가.
일류 용병이라고 했으니, 헌터물 기준으로는 A급 헌터쯤 될 것 같다.
“허! 내 물주가 될 것 같아서 봐줬더니 애송이가 기고만장해졌군.”
우우웅-
표정이 매우 불편해진 용병의 온몸이 푸른 기운에 휩싸였다.
“야! 여긴 훈련장이야!”
“아무리 봐도 진심 같은데?!”
“저 바보가...!”
구경꾼들이 식겁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는 자는 없었다.
“간다! 우오옷!”
팡!
용병 사내가 공기를 찢으며 육중한 몸으로 돌격했다.
“호오~”
온몸이 푸른 기운에 둘러싸이면서 더욱 빨라졌다.
내공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여기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세계관 설정이란 건 틀림없다.
‘죽일 필요는 없으니.’
이 용병은 검사다. 등에 맨 대검(大劍)이 그 증거.
하지만 흥분한 와중에도 뽑지 않고 주먹만으로 싸우고 있었다. 살기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도 적당히 맨손으로 싸우다가 끝내는 게 맞다.
“자...”
애초에 이 싸움은 내가 원주민의 전투력을 보고 싶었기에 성립될 수 있는 싸움이었다.
5배나 확장된 나의 세계.
육체에서 주변 공간까지로 범위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게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어...?”
빠각!
상대의 몸을 건드리지도 않고 판타지 능력을 취소한다거나?
반면, 내 육체는 인간의 영역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평범한 인간을 쓰러트리는 건 갓난아기의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 간단한 일.
싸움이 될 리 없다.
“수고요.”
“......”
털썩.
뇌진탕이 온 용병은 눈이 뒤집힌 채로 고꾸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봐! 설명 좀 해줘!”
혼란에 빠진 구경꾼들을 향해 겸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용병 길드 훈련장을 빠져 나왔다.
딱히 자랑할 일도 아니잖아?
애초에 우리는 평등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변수 없이 이겼을 뿐이다.
“어디 보자...”
나는 의뢰 게시판으로 향했다.
블레이드 팬텀.
벽에 붙은 의뢰서에서 그 이름을 꼼꼼히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저...”
접수처 아가씨가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조금 전의 질문도 그렇고, 용병 길드는 처음이신가요?”
“네. 처음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용병을 쓰러트린 뒤부터 접수처 아가씨의 목소리가 더욱 다정해졌다는 건 알겠다.
“그러셨구나! 그러면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려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딱히 용병이 될 생각은 없어서요.”
“하지만 블레이드 팬텀을 노리고 계시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의식주(衣食住)에서 완전히 해방된 까닭에 돈도 딱히 필요 없다.
아! 하나 있군.
공복은 없어도 맛있는 요리를 돈 주고 사 먹을 의향은 있다.
“의뢰서 하단에 보면 예상 위험도가 적혀 있어요. 초급, 하급, 중급, 상급.”
“그건 봤습니다.”
“하지만 최상급과 특급으로 분류되는 의뢰는 따로 관리되기 때문에 게시판에 없어요.”
“아!”
“그리고 블레이드 팬텀은 최상급으로 분류돼요. 그러니 시청을 가보시면 원하시는 정보가 있을 거예요. 어디서 누구를 습격한 몬스터가 토벌될 때까지 어디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아하!”
내가 가야 할 곳은 용병 길드가 아니라 시청이었군?
좋은 정보를 얻었다.
“제가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그냥 떠나시겠죠? 얼굴에 쓰여 있어요.”
“......”
정답이다.
“통행 금지구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요.”
“아아, 충분한 실력이 되는 용병만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군요.”
“네! 맞아요!”
접수처 아가씨가 화사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흠... 오래 걸립니까?”
통행 금지구역에 몰래 들어가도 되긴 하지만, 보험 가입 유도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준 접수처 아가씨의 성의를 생각해서 고려해보기로 했다.
“전혀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정말로 보험 가입 권유를 받는 기분인데?
“원래는 자격심사 같은 오래 걸리는 절차가 있지만, 조금 전에 훈련장에서 보여준 실력으로 검증될 거예요.”
“좋군요.”
“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가입비만 내시면 끝나요!”
“...가입비요?”
“네. 모든 용병은 용병 보험을 의무적으로 드셔야 해요. 사망 시에 시신과 위로금이 유가족들에게 전달되고, 장례식까지 진행해줍니다. 가입비 외에도 의뢰에 성공할 때마다 수수료와 중계료로 30% 정도 차감되고요.”
“......”
용병 길드, 완전히 날강도인데?
“길드에서 30%를 전부 갖는 게 아니에요. 15%는 유가족들에게 전달되고, 은퇴해도 노후자금으로 15%를 돌려줘요. 그 대신에 은퇴 후에 재가입은 불가합니다.”
“오...”
수수료의 절반은 용병에게 다시 돌려준다는 건가?
“그리고 용병 길드랑 협업하는 신전과 치료소에서 50% 할인된 가격으로 치료받을 수 있어요. 엄청나죠?”
“흠...”
좋긴 한데, 팔다리가 잘려도 알아서 치료할 수 있는 나에겐 불필요했다.
“그리고 실종 시에 길드 차원에서 구조를 의뢰해요. 이 경우에는 의뢰 비용이 경매로 진행되고 노후자금에서 자동으로 차감됩니다.”
“호오~”
이건 상당히 좋은 시스템인데?
“그밖에도 세세한 혜택이 있지만, 전부 설명하려면 하루도 부족해요.”
“...돈을 갖고 올게요.”
“네!”
“아! 혹시,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신전은 알고 있을 거예요. 용사 파티에는 신전 소속의 성녀님도 계시니까요. 외부인에게 가르쳐줄지는 미지수지만.”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나는 마음속으로 접수처 아가씨에게 사죄하며 시청으로 향했다.
* * *
시청 앞에는 도시 주변을 세세하게 묘사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출입금지」
「드래곤 서식지」
「산적 주의!」
......
거기에는 시민들이 봉변을 당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통행이 금지된 장소나 위험지역이 표시되어 있었으니!
내가 찾던 ‘블레이드 팬텀’이 나타난 장소도 그중에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한걸.’
검귀는 지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사람을 죽이는 목적이 연쇄살인마랑 비슷하다.
즉, 이 세계에 소환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
“가볼까?”
깜빡!
검귀가 출몰했다는 숲으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댕! 댕! 댕...!
도시의 위기를 알리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무, 무슨 일이야?!”
“어서 집으로!”
그 경고음에 반응한 시민들은 허둥대지 않고 신속하게 가까운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이게 일상이란 거겠지.
“......”
순식간에 한산해진 시청 앞. 건물에 숨지 않은 사람은 용병이나 병사 같은 싸울 줄 아는 자들뿐.
다그닥다그닥!
말을 탄 기사가 텅텅 빈 대로를 달리며 외쳤다.
“최상급 이상의 용병만 북문으로! 서둘러라! 블레이드 팬텀이다~!”
“오! 맙소사!”
“팬텀이라고?!”
“신이시여...”
실력에 자신 없는 용병들이 무기를 내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괜히 고생했네.”
숲을 헤매면서 쉬지 않고 살인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이어졌다는...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딱 좋은 시기네.”
검귀는 어느 꿈에서나 나타날 순 있지만, 놈들에게도 조건이 있다.
세계의 균열.
라누벨 환자의 현실 혹은 꿈속에서 건강이 심각하게 위태로울 때만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이 균열이 커지면 대규모로 침공해서 세계를 파괴. 최종적으로 환자를 동료로 만든다.
‘아직은 선발대겠지.’
사극 <궁녀 덕춘이> 혹은 헌터물 의 세계 때처럼 검귀가 바글바글하려면 ‘용사 정용상’의 건강이 악화해야 한다.
즉, 마녀는 환자(연료)를 오래 쓸 수 있도록 세계를 돌아다니며 건강을 챙겨주는 간호사 비슷한 역할...
진짜 비효율적이다.
끼기긱!
끼긱-!
“으악~?!”
“팔을 조심해!”
“미, 미친...!”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귀를 상대로 판타지 원주민들이 일방적으로 썰리고 있었다. 내가 어서 정리를...
“비켜라! 내가 상대하겠다!”
“그랜드 소드마스터다!”
“공작님께서 오셨다...!”
가서 만류하고 싶었지만, 자신감이 충만한 어떤 아저씨가 한발 빨랐다.
화르륵~!
그는 칼날 전체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을 빼 들고 호기롭게 돌진.
결판은 순식간에 났다.
“뭣-”
댕강!
검귀의 날카로운 팔에 닿자마자 푸른 불꽃이 썰물처럼 밀려나고, 칼은 공기처럼 썰리면서 대응하거나 회피할 시간조차 없었다.
검술(劍術)도 검(劍)이 있어야 하지.
“고, 공작님이?!”
“그랜드 소드마스터가 당했어!”
“왕국 최고의 검호가...!”
사기가 뚝 떨어진 용병과 병사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끼기긱!
검귀는 아무런 감흥 없다는 듯이 계속 도시 안으로 진격했다.
“저런.”
검귀를 상대로 검사라니?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헬파이어(Hell-fire)!”
“아이스 에로우(Ice arrow)~!”
“다크스톰(Dark-storm)...!”
헌터물 에서는 멀쩡한 모국어 놔두고 영어를 짜깁기한 시대착오적인 ‘괴물 이름’을 썼는데, 여기는 한술 더 떠서 마법 주문이었다.
영어만 잘하면 나도 대마법사?
진짜 무성의한 설정이다.
파스스...
“마, 마법이 안 통해!”
“나의 헬파이어가...!”
“마법 저항력이 너무 높아!”
초등학생보다 못한 영어 실력으로 마법사가 된 판타지 원주민들이 절망했다.
끼기긱-!
검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발렌타인.”
깜빡!
나는 무서운 게 없는 놈의 측면을 파고들며 발렌타인을 내리그었다.
끼-?
“놀랐지?”
너에게 당한 어떤 아저씨도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댕강!
두부처럼 부드럽게 양분된 검귀가 내 발밑에 쓰러졌다.
“......”
“......”
상식을 벗어난 상황에 넋을 놔버린 판타지 원주민들의 시선.
깜빡~
나는 발렌타인을 다시 눈깔 촉수로 되돌리며 물었다.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 분?”
선발대가 죽었으니 새로운 선발대가 투입될 터.
그리고 그 검귀는 틀림없이 환자 근처로 소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