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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81화 (182/232)
  • 181화

    나는 현재 머무는 체육대학교 기숙사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타국의 ‘황족’으로 알려지면서 정든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정부 관계자가 말하길,

    “강문수 씨에게 문제가 생기면 외교적으로 큰 마찰이 생깁니다.”

    “그런가요?”

    “그럴 리 없겠지만, 봉변이라도 당하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게 신성로마제국의 입장입니다.”

    “......”

    내가 죽으면 전쟁?

    그럴 리 없겠지만,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봉변 안 당하게 주의해야겠다.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 비밀리에 입국할 예정인 귀빈은 제국에서 보호하기로 했고, 강문수 씨는 이 땅에서 태어난 자국민인 만큼 본국에서 책임지고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귀빈은 어머니를 의미할 터.

    어머니는 ‘라누벨라’답게 은밀히 입국할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은?

    “저희는 국가전복을 바라는 사회부적응자들이 강문수 씨의 목숨을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

    여기가 지금 현실이 맞나요?

    마녀를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에 다녀온 뒤부터 내 인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무당 다음은 서바이벌?

    황당했다.

    “그래서 그 괴뢰조직 소탕이 완료될 때까지 저희가 마련한 관저(官邸)에서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실례지만, 이건 부탁이 아닌 권고사항입니다. 제국은 진심으로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제가 제국으로 이민 가는 건 어떨까요?”

    추기경이 나를 순순히 보내준 이유를 알 것 같다. 억지로 제국에 붙잡아두면 반발할 테니까.

    내가 신성로마제국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

    “......”

    “강문수 씨가 정 원하시면 이민을 막을 방법이 현재로선 없습니다. 하지만 올림픽 영웅을 제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흐음...”

    “강문수 씨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저희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체육대학교 기숙사에서 육군사령부의 관저로 이사했다.

    얼마 전까지 육군참모장의 일가가 사용했었다는데...

    「출입금지」

    「감시카메라 작동 중」

    「드론 금지」

    「어길 시에 징역...」

    살벌한 경고문이 높은 담장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2층 단독주택.

    주차장에는 웬만한 전차보다 튼튼하다고 소개한 방탄 차량과 운전기사가 항시 대기 중이고, 2층에선 순찰하는 군인들과 초소가 어디서나 잘 보였다.

    운동은?

    늦어도 1시간 전에만 얘기해주면 군인들이 이용하는 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비워준다고...

    * * *

    “그게 저 차구나?”

    최강훈이 추천해준 고급 레스토랑까지 타고 온 방탄 차량을 본 송선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온 경호원도 무려 넷!

    복장은 민간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군인처럼 생겼다.

    “뭐... 익숙해지겠지.”

    정 힘들면 라누벨라 7세가 의도한 대로 이민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렇게 노력하는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불쑥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네가 왜?”

    “남들이 뭐라고 하는 건 신경 쓰지 않는데, 집에서 너무 멀어.”

    “아...”

    체육대학교는 송선영의 집 근처였기에 왕래가 무척 쉬웠다. 내가 꿈속에 처박혀서 자주 못 만났을 뿐.

    그러나 관사는 매우 멀었다. 거리는 멀지 않은데, 혼잡한 도심을 가로질러야 해서 1시간 정도.

    도로가 한산한 새벽에만 데이트할 게 아니라면 왕복만 2시간이다.

    “내가 그쪽으로 이사 갈까?”

    “...선영아.”

    “부모님이랑 떨어져 사는 건 처음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이 기회에 집안일도 배우고.”

    “선영아.”

    “왜?”

    “그러지 말고 같이 살자.”

    “......”

    내 고백에 송선영의 움직임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 그러니까... 관저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더라고. 화장실도 많아서 나눠 쓰면 되고...”

    “진심이야?”

    “어... 응. 내가 엄청난 변태인 건 인정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짓은 안 할게. 내 조상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신이시여! 제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이름을 팔아서 죄송합니다!

    “그게 가능해?”

    “집에서 눈가리개하고 있을게. 참을 수 있어.”

    “이 바보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어? 아니야?”

    “아니야!”

    “마음껏 봐도 돼?”

    “...네가 변태라는 사실을 굳이 이 레스토랑에서 광고하지 마. 그거야말로 조상님께 민폐니까.”

    “어흠!”

    변태라서 죄송합니다.

    “어머님께서 허락해주실까?”

    “엄마는 신경 쓸 것 없어. 본인도 가출해서 아빠랑 결혼했거든.”

    “사랑을 위해 가출하시다니. 굉장히 낭만적이시네.”

    “......”

    내 설명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다.

    “어머님도 같이 사셔?”

    “아니.”

    송선영이 나 이외의 사람을 신경 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렇다면... 좋아.”

    “오예!”

    “너무 좋아하는데. 그나저나 좀 신경 쓰이는걸. 운현 오빠도 같이 살게 된다는 뜻이잖아. 그건 좀 싫은데.”

    “...아직 몰라.”

    “응?”

    “확인 후에 설명해줄게.”

    엄마를 구해준 선배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 * *

    음란마귀가 득실거리는 내 마음 같아서는 송선영이 허락한 동거생활을 만끽하고 싶지만, 선배의 안전이 계속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얼굴이 활짝 피셨네요, 원장님.”

    송선영의 이사를 돕고 단 하루 만에 엘몰랑스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보이니?”

    “네.”

    “제대로 봤어. 드디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됐거든.”

    아무리 본인이 잘났어도 상관이 있으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 연구를 하고 싶어도 ‘시간이 비네? 이 환자 맡아!’라고 하면 다시 바빠지니까.

    하지만 이젠 원장!

    엘몰랑스 병원의 일인자가 된 서혜주 원장은 환자를 안 맡게 됐다.

    나만 빼고.

    “각서는 뭔 말이에요?”

    “고귀한 혈통의 피를 함부로 뽑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어. 나는 주치의라고 버티면서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거부하기에는 너무 큰 제안이었지.”

    “그게 원장이었군요.”

    “응.”

    “권력에 참 약하시네요.”

    “황자님.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재능만으로 성공하는 시대는 없었답니다.”

    “황자라니...”

    닭살이 돋았다.

    “앞으로는 돈도 안 받겠다며? 제국에서 뭔가를 들었구나?”

    “네.”

    이건 자세히 설명해줄 순 없다.

    “네가 쫓던 마녀의 정체가 신성로마제국 황녀님일 때부터 예상했지. 그러면 이것만 말해줘. 지금처럼 계속 치료하면 라누벨 환자가 줄긴 해?”

    “으음?”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 일을 시작한 뒤부터 라누벨 환자의 숫자를 쭉 조사했지. 외국은 변동이 거의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새로운 환자가 여럿 나왔어.”

    “......”

    “줄어든 만큼 도로 채워진 느낌? 네 표정을 보아하니, 내 추측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네.”

    “...참 솔직하죠?”

    “그게 네 장점이야.”

    최근에 비슷한 말을 자주 듣는 것 같다.

    “환자는요?”

    “후보중에 건강이 너무 안 좋은 사람은 제외했어. 현실 시간이 미친 속도로 흘러가면 아깝잖아? 동계 올림픽도 얼마 안 남았고.”

    “네.”

    선수들의 노력을 짓밟는다는 추기경의 말이 비수처럼 꽂혀서 올림픽도 그만둘지 고민했지만,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무당도 적성이잖아?

    내가 반칙이면 적성으로 일반인들의 노력을 찍어 누르는 운동선수들도 똑같이 반칙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황족’이 아닌 ‘강문수’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

    “후보가 제법 많아.”

    “남해수 씨처럼 당장 내일 죽어도 원망을 안 듣는 환자로 또 추리면요?”

    “목적이 전쟁이란 말은 그것 때문이었구나.”

    “네.”

    “어디 보자... 생각보다 적네. 당장 죽으면 아쉬운 분들이 주로 신청했거든.”

    “아아, 그렇겠네요.”

    환자가 죽어도 크게 상관없는 보호자가 먼 타국까지 올 리 없었다.

    “그래도 아예 없진 않아. 내가 아까 말했지? 우리가 치료한 만큼 새로운 환자가 생겼다고.”

    “아!”

    “그중 한 사람이야.”

    “최근에 생겼는데, 벌써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요?”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잖아? 내 조수인 윤소라는 훨씬 심했어.”

    “그랬죠.”

    그녀는 잘 지내고 있나?

    “바빠.”

    “예?”

    “내 밑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거든.”

    “아!”

    “적성이 간호사가 아니기도 하고, 내 후계자 자리를 노리려면 현재 능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

    “그렇겠죠.”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후배 최강훈만 한가한 것 같다.

    겨우 5분 대화하려고 공항에서 1시간 가까이 기다리다니?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일은 고맙지만, 녀석이 시간을 좀 더 유익하게 썼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 환자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준비해뒀어. 가족들이 협조적이지 않아서 고생했지만.”

    “가족이... 그렇군요.”

    환자를 설득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자료를 살펴봤다.

    * * *

    이름은 정용상.

    판타지 소설, 만화, 게임 등을 포괄적으로 좋아하는 26살 남성.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도 3년 가까이 했지만, 더 높은 레벨의 이용자에게 얻어터지고 5년 전에 그만둠.

    적성은 소설 작가.

    초창기에는 인기 작가였지만, 유흥과 담배에 찌들면서 차츰 몰락. 돈이 떨어진 뒤부터는 폐인처럼 생활했다고...

    “어렵네.”

    구시대 작품을 살펴보면 담배 같은 마약이, 창작하는 직업군의 필수품처럼 묘사된다.

    작가, 화가, 작곡가, 예술가...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일시적인 각성, 환각 효과의 도움을 받을 순 있지만, 조금씩 뇌를 깡통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살이나 다름없다. 한 작품하고 그만둘 게 아니라면.

    “할래?”

    “네.”

    이 환자는 이미 유흥과 담배로 재능을 망가트렸다. 2년 전에 완결한 최신작의 성적만 봐도 알 수 있다.

    소생이 거의 불가능.

    현실로 돌아오라는 설득이 매우 어려우리란 건 자명했다.

    ‘그래도 해야지.’

    환자를 어떻게든 깨워야 한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일까. 마음이 편했다.

    “바로 시작할래?”

    “잠시만요.”

    선배의 지원을 못 받는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했다.

    <내가 SSS급 용사라니?>

    <용사가 내 마누라>

    <힘을 숨긴 최강의 용사>

    <못 말리는 용사님!>

    인기 작가에서 몰락하기까지 이 환자가 써온 작품의 줄거리만 대충 훑었다.

    “용사라...”

    판타지 작품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처럼 변수가 전혀 안 보였다.

    틀림없이 환자가 용사!

    모든 작품의 공통점은 성장형 주인공이고, 현대 지구인의 기억을 가졌으며, 아름다운 여성 동료가 주위에 많다.

    “끝났니?”

    “네. 대충 파악이 끝났습니다.”

    뇌가 담배에 찌들었어도 일단은 창작으로 먹고사는 작가.

    기존 작품이 아닌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작품의 성향까진 안 바뀔 것이다.

    성장형, 지구인, 하렘...

    그리고 여신(女神).

    주인공을 편애하는 ‘신’의 존재가 가장 신경 쓰였다. 선배 ‘혈신 소운현’의 능력을 잘 알기에 더욱!

    “누워.”

    “네.”

    내 옆에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히쭉히쭉 웃는 환자가 누워있었다.

    “......”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주인공이 되는 꿈속에 갇힌 김은정처럼 특수한 상태. 그녀도 자기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책을 꼭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왜?”

    “뭔가... 아픈 환자에게 이런 말을 하면 미안하지만, 오염된 구정물에 잠수하는 기분이에요.”

    “문수야. 잘 들어. 이 말이 도움이 될 거야.”

    “뭔데요?”

    “환자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야.”

    “아, 네.”

    “도움이 좀 됐어?”

    “...조금?”

    톡.

    나는 환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세계에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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