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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79화 (180/232)
  • 179화

    “그리고 저도 강문수 신도님의 결정을 따를 겁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당신의 선배에게 빚이 있으니까요.”

    추기경이 마침표를 찍었다.

    “선배가 뭘...”

    “이건 우리만의 비밀입니다. 동생이랑 상관없는.”

    “그렇군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선배에게 빚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피로」

    “강문수 신도님. 슬슬 나가죠. 동생이 피곤한 듯하니.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면 천천히 해도 상관없습니다.”

    “...네.”

    「축복」

    “감사합니다.”

    후손의 행복을 빌어주고 존중하는 P에게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했다.

    * * *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의 궁전으로 올라왔다. 추기경도 밀린 업무를 보기 위해 급히 떠나고...

    어른은 다르구나.

    나도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여전히 시야가 좁고 자기밖에 모르는 애송이란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수고했어요!”

    어머니만 빼고!

    이쪽은 너무 만만해서, 어머니보다는 비슷한 처지의 누나 같았다.

    “어머니는 전혀 안 늙으셨네요.”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내가 역전해서 오빠로 보일 것 같다.

    “마녀니까요. 사고로 죽지만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살 수 있어요. 그건 아들도 똑같고.”

    “저도요?”

    “올림픽 마라톤을 떠올리면 쉬워요. 체력처럼 수명을 늘리는 겁니다. 모두가 결승선에 가까워질수록 지칠 때, 저희는 계속 달릴 수 있어요.”

    “아...”

    단번에 이해됐다.

    “앞으로 하나하나 가르쳐줄게요. 꿈으로 전수해주면 간단하지만, 아들이 여성스럽게 변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꿈으로...?”

    “라누벨라는 선대의 삶을 꿈으로 간접경험하는 방식으로 지식을 전수해요. 재능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교육에 걸리는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어요.”

    “와!”

    반칙이잖아?!

    “문제는... 아들은 남자잖아요? 여자의 몸을 경험해보고 싶나요?”

    “아뇨!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한 나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바로 거절했다.

    띠리링~♪

    “음?”

    호주머니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부재중 통화(8건)」

    “아...”

    그 지하에서는 신호가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누구에요?”

    “여자친구입니다.”

    “어머어머! 그렇구나! 아들도 그럴 나이가 됐구나! 어서 받아봐요!”

    나잇값 못하는 어머니의 재촉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수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송선영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네 말투는 그 능글맞은 오빠랑 완전히 다르니까.)

    “아하!”

    (뭐 하고 있어? 깨어났으면 깨어났다고 나에게 바로 연락부터 했어야지!)

    “어머니랑 대화 중이었어.”

    (...뭐?)

    “어머니랑 대화 중이었어.”

    (......)

    갑자기 애가 말이 없다.

    “여보세요?”

    (지금, 옆에 어머니가 계신다는 거예요? 실종되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송선영의 말투가 다소곳한 아가씨처럼 바뀌었다.

    “찾았어.”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라서 무척 유감이지만!

    (그랬군요. 그렇다면 이해해요.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었다면 통화할 정신이 없었겠네요.)

    “......”

    송선영이 많이 아픈 것 같다.

    “아들~ 바꿔줘요.”

    “싫은데요.”

    “혹시, 결혼할 사이는 아니라서 소개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이상한 추측은 사절입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아서 싫다는 겁니다.”

    “아들도 고조모님처럼 가족을 한 번 믿어봐요.”

    “......”

    P를 끌어들이는 아머니.

    여기서 못 믿겠다고 대답하면 P의 가족애를 무시하는 게 아닐까.

    “어서요~ 여자친구가 기다리잖아요?”

    “...좋습니다.”

    슥-

    스마트폰을 어머니에게 넘겼다.

    “여보세요!”

    (히익?!)

    박력 있는 목소리에 송선영이 식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수의 엄마에요!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돼요?”

    (아, 안녕하세요. 송선영입니다.)

    “송선영! 예쁜 이름이네요! 나중에 만나면 같이 식사해요!”

    (네네! 어머님...!)

    “다시 아들을 바꿔줄까요?”

    (괜찮습니다!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말씀 더 나누세요!)

    “목소리도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송선영 양. 나중에 만나요~”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뚝.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통화가 진행되다가 끝났다.

    “봤죠? 이상하지 않잖아요?”

    “...네.”

    어머니가 딱히 이상한 말을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송선영이 이상해졌다.

    괜찮은 걸까?

    살짝 걱정됐다.

    “아들이 결정을 내리면 제국을 떠날 거예요.”

    “어머니도 가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신용도가 밑바닥이라서 감시자와 추적장치가 붙겠지만, 장로님께 허락을 받았어요.”

    “순순히 보내주시네요.”

    라누벨라의 혈통이 끊기거나 타국에 흘러가는 걸 꺼렸던 과거를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이것도 선배 때문입니까?”

    “절반은 그렇겠네요.”

    “절반?”

    “나머지는 스스로 생각해봐요.”

    “...네.”

    아리송한 답변이었지만, 추기경이 선배에게 진 빚(비밀)이랑 연관이 있어서 설명을 꺼리는 것 같았다.

    “아들, 이쪽이에요. 엄마가 가출하기 전에 쓰던 방입니다.”

    “좋네요.”

    어머니의 공주병은 외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여긴 진짜 ‘공주님의 방’ 같았으니까. 이런 환경을 놔두고 평범한 아버지를 선택한 이유를 모르겠다.

    “편하게 있어요.”

    “저도 여기서 지내는 겁니까?”

    “물론이죠. 가족이니까요.”

    가족.

    내가 약해지는 단어를 어머니가 눈치챈 것 같다.

    “아들, 오랜만에 같이 잘래요?”

    “저도 이제 성인입니다.”

    “엄마는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저런. 소중한 시기를 놓친다는 건 슬픈 일이네요.”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고, 어머니는 넓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결정했나요?”

    “아직 못 정했습니다.”

    나의 한마디면 인류를 구원한 P의 적성검사기가 사라진다.

    그 중압감과 책임감.

    생각할 때마다 숨이 탁탁 막혔다.

    “엄마의 생각을 말해도 될까요?”

    “...어머니에서 엄마로 호칭을 은근슬쩍 바꾸시네요.”

    “아들, 이런 젊은 어머니를 봤나요? 엄마가 딱 적당해요.”

    “......”

    마녀는 진짜 반칙이다.

    “세상에 대가 없는 완벽한 연료는 없어요. 극단적인 예로, 구시대를 지배했던 화석연료가 그랬죠. 하나뿐인 지구를 병들게 한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멈췄네요.”

    “네. P의 적성검사기 덕분에요.”

    “......”

    “화석연료의 사용량을 줄이려면 모두가 공평하게 불편함을 감수하고 협조해야 했어요. 하지만 구시대에는 이기적인 정치인과 사업가를 근절할 방법이 없어서 실패했죠.”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P의 적성검사기로 적성을 검증받은 신세대 정치인과 사업가가 기존의 썩은 기득권들을 차츰 밀어냈다.

    그 결과가 직업혁명!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지구촌의 화합이 간단히 이루어지고, 진보된 과학기술의 수혈까지 받은 지구는 산업혁명 이전의 건강을 되찾았다.

    “아들, P의 적성검사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학교에서 지겹도록 다룬 주제네요.”

    “어머! 그래요?”

    “대체로 지옥이란 표현을 씁니다. 학생을 돈으로 보는 엽기적인 교사가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악마가 애들을 가르친다니? 믿기지 않지만, 그럴싸해서 충격적이더라고요.”

    “구시대에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졌죠.”

    “그것도 간접경험입니까?”

    “네.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돌아가신 9세의 경험입니다.”

    “......”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유감이 무척 많은 것 같다.

    “엄마의 생각을 말해도 될까요?”

    “이미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P의 적성검사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어머! 전혀요.”

    “예?”

    “오해했네요. 엄마는 그 반대입니다. 모르는 인간들을 위해 8세가 고통받으며 살 필요는 없어요. 9세도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모르는 인간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장례식 도중에 가출하셨군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태어날 수 있었고요.”

    “그것도 맞아요!”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셨다.

    “흠...”

    “아직도 고민인가요?”

    “네.”

    “그러면 하나만 더 얘기해줄게요. 우리에게는 P의 적성검사기가 사라지는 편이 좋아요.”

    “어째서입니까?”

    “구시대가 모두에게 안 좋았던 건 아니니까요. 부자와 정치인들은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그때가 천국이었습니다.”

    “아...”

    “아들은 아직 실감이 안 되겠지만, 우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상류층입니다. P의 적성검사기가 사라지면 8세도 자유로워지고 마음껏 살 수 있어요.”

    “......”

    “솔직히 조금 섭섭했어요. 내가 가출할 때는 꼼짝도 안 했던 8세가 아들을 보자마자 흔들렸다는 사실에.”

    “그렇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인간들을 위해 행복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죠~ P의 적성검사기도 영원하진 않아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자원은 유한해요. 무한할 것 같은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도 보수하는 과정에서 자원이 소진되잖아요?”

    “...P의 건강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당장은 아니지만, 검귀가 계속 늘어나면 언젠가는.”

    검귀.

    선배가 검귀에게 포위됐다는 얘기를 들었던 만큼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것들의 목적은 뭡니까?”

    “시위입니다.”

    “시위...?”

    “P에게 자신들의 행복한 꿈을 돌려달라고 시위하는 겁니다.”

    행복한 꿈.

    검귀의 탄생 조건을 생각하면 그리 새로운 얘기도 아니었다.

    “그러면 검귀들이 P를 괴롭히는 원흉인 겁니까?”

    “네. 라누벨의 환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났던 8세도 처음에는 정정했어요. 하지만 검귀가 차츰 늘어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됐어요.”

    “......”

    “8세는 사람이 너무 착해요! 고집을 꺾고 후손들의 재롱이나 보면서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행복하게 살면 좋잖아요? 엄마는 그게 참 답답해요!”

    “...감사합니다.”

    “결정했나요?”

    “네. 어머니... 엄마의 조언 덕분에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무당’으로 태어난 이유를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 * *

    신성로마제국 제1 공항.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나를 제국에 계속 붙잡아둘 줄 알았던 추기경은 의외로 순순히 보내줬다.

    “가는군요.”

    “감사했습니다, 황녀님.”

    라누벨라는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둘 이상 동행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몰살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라누벨라 13세만 공항까지 나를 마중나왔다.

    마녀가 아닌 황녀의 지위로.

    나는 친모(親母)의 고향인 신성로마제국의 귀빈으로 머물다가 귀국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강문수 씨.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고귀한 분의 후손입니다. 어느 때라도 품위를 잃지 마세요.”

    “아, 네.”

    사람들은 나를 신성로마제국 황족의 방계(傍系)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은 P의 자손!

    너무 초현실적인 조상님 탓에 내가 꿈을 꾸는지 의심하는 습관마저 생겼다.

    “결정이 뜻밖이었어요.”

    “그렇습니까.”

    “무운(武運)을 빌게요.”

    “감사합니다. 슬슬 비행기 시간이...”

    “하아... 바보인가요? 여긴 신성로마제국입니다. 서두를 것 없어요. 당신이 탑승할 때까지 비행기는 절대 공항을 떠나지 못합니다.”

    “뭐...”

    그건 너무 민폐 아니야?!

    “조심히 가요.”

    “네.”

    나는 비행기의 로얄석에 오르면서 전화했다.

    (문수니? 텔레비전으로 네가 떠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는 중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부원장님.”

    (나야 아주 잘 지내지! 앞으로 네 피를 함부로 뽑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긴 했지만,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원장으로 승진했어.)

    “워~ 그러면 이제 원장님이시네요?”

    (그렇지!)

    나랑 엮여서 인생이 잘 풀린 사람으로는 1위가 아닐까.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만 해.)

    “귀국하자마자 치료할 수 있도록 라누벨 환자를 선별해주세요. 윤소라 양처럼 건강이 안 좋은 분으로.”

    (그건 어렵지 않은데,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전쟁입니다.”

    (전쟁?)

    “네. 검귀의 씨가 마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 전쟁입니다.”

    그것이 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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