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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78화 (179/232)
  • 178화

    [9장-8절] 가족

    신성로마제국 추기경이 궁전의 긴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강문수 신도님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어요. 이제... 라누벨라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그렇군요.”

    나는 증명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선배가 현실에서 협상을 잘한 게 아닐까?

    잠든 사이에 어려운 숙제가 저절로 해결된 기분이다.

    “황녀님이랑 몇 번 충돌해봐서 이미 알겠지만, 사람들의 꿈을 깨우는 신도님의 행동은 저희의 목적에 방해됩니다.”

    “연료가 부족해지기 때문입니까?”

    “비슷해요.”

    “......”

    사람을 연료로 쓴다니? 듣기만 해도 소름 돋았다.

    “강문수 신도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 1년 만에 올림픽 스타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체계적으로 단련한 라누벨라는 어떨까요?”

    “...타인에게 간섭합니다. 그게 200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해요.”

    내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추기경이 이어서 말했다.

    “아직 어린 황녀님은 주변인 정도가 한계지만, 숙련자인 당신의 모친, 라누벨라 10세쯤 되면 마을 규모에 집단최면을 걸 수 있습니다.”

    “아...”

    뭔가 굉장했다.

    “그리고 최연장자인 7세쯤 되면 제국의 수도를 덮습니다.”

    “......”

    무시무시했다.

    “놀랄 것 없어요. 고작 2000만 명이 사는 도시 하나입니다. 지구의 인구랑 비교하면 하찮은 수준이지요.”

    “세계는 힘들군요.”

    그랬다면 지구는 제국처럼 라누벨라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과학과 재능이 도와준다면.”

    “설마...?”

    50억 명에게 집단최면을 거는 데 성공했다고?

    말도 안 된다.

    “강문수 신도님. 지금부터는 극비에 해당해요. 황제와 교황도 모른답니다.”

    “......”

    그런 중요한 정보를 내가 알아도 되는 걸까?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에 다가가는 기분!

    절로 긴장됐다.

    드르륵-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깊숙이 내려갔다.

    “그럴 리 없겠지만, 여기는 핵탄두의 직격을 받아도 안전하도록 설계됐어요.”

    “방공호... 같네요.”

    “여기는 무덤입니다. 화장(火葬)한 1세와 2세를 제외한 역대 라누벨라의 유해는 모두 이곳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아...”

    쿵.

    하강하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도착했군요. 선택과 판단은 신도님의 몫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저희는 막지 않을 겁니다.”

    “...네.”

    아직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소년에게 무슨 선택과 판단을 하라는 걸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드르륵-

    추기경의 접근을 감지한 철문이 좌우로 벌어지며 열렸다.

    “그럴 리 없겠지만, 침입자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내부에서만 열 수 있게 되어있지요.”

    “......”

    드르륵-

    드르르륵-

    무려 8겹이나 되는 철문이 차례차례 열렸다.

    “...어머니는 이곳에 자주 와봤습니까?”

    “네.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돌아가신 어머니도 이곳에 계시니까요. 아들에게는 외할머니가 되겠네요.”

    “아.”

    공동묘지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경건함마저 묻어나는 어머니의 태도는 확실히 달랐다.

    “놀라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소독약이 투하될 겁니다.”

    푸슈슈슈-

    물안개 같은 새하얀 수증기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콜록콜록!”

    소독을 너무 독하게 하는 거 아니야?!

    “조금만 참으세요. 신(神)을 배알하려면 청결함은 기본입니다.”

    “예? 신- 콜록콜록!”

    딩동~♪

    소독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림음과 함께 앞쪽의 유리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네...”

    사방이 유리와 기계장치로 도배된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의 정중앙.

    침대 위에 백발의 여인이 힘없이 누워있었다.

    “소개할게요. 저의 동생이자 신도님의 고조모인 라누벨라 8세입니다.”

    “아...”

    죽었다면서?

    “신(神)이 된 뒤부터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진 그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

    실례되는 생각일 수 있지만, 여기서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야 한다면 사는 의미가 있을까?

    죽었다고 한 이유도 이해됐다.

    “고조모님을 뵌 소감이 어떤가요?”

    “어... 실감이 안 됩니다. 이분이 신이란 것도 포함해서.”

    “이해했습니다. P라고 하면 좀 더 실감이 될까요?”

    “...예?”

    “라누벨라 8세. 그녀가 방황하는 인류를 구원한 P입니다.”

    “......”

    선배가 예전에 말했던 ‘연관성’의 의미를 깨달았다.

    * * *

    인류는 P의 적성검사기 덕분에 재능을 찾는다고 시간을 허비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어른이 되자마자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정치인은 애국과 금욕.

    상인은 정직과 계산.

    법조인은 공정과 냉정.

    군인은 책임과 용기.

    .....

    적합한 인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음으로써 인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역사를 멈추고 올바른 길로 나아갔다.

    직업혁명.

    그 근간에는 P의 적성검사기가 있다는 것에 이견이 있는 자는 없으리라.

    “P라고요?”

    “네.”

    “......”

    신성로마제국은 P를 사칭하는 자에 대해선 국적과 신분을 불문하고 찾아가서 무조건 엄벌을 내린다.

    진짜면 어쩌려고?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심판하는 자신감에는 ‘진짜 P’가 있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적성검사기라고 이름을 붙인 장치로 타인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적성을 파악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어머! 육상과 수상 마라톤 세계신기록을 절반 넘게 단축한 올림픽 스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사람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컴퓨터입니다. 성장하며 완성된 성능을 보면 어떤 직업이 어울리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어쩐지...”

    수많은 과학자가 P의 적성검사기를 연구하고 분해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접근법부터 잘못됐으니까!

    “기존의 종교와 신은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상상력과 목적의 한계. 그래서 종교의 발원지 주변에서만 활동합니다. 타락한 인류를 벌하기 위해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었다지만, 지구 반대편은 평화롭기만 했죠. 신이라고 하기에는 시야가 너무 좁고 무능합니다.”

    “뭐...”

    종교의 불편한 진실이다. 지구가 샌드위치처럼 생긴 좁은 땅덩어리라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무지(無知)처럼.

    “하지만 P는 달라요. 마음의 구원이 아닌 현실의 구원. 누구나 19살이 되면 1초 만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건... 네.”

    남해수 덕분에 과거로 돌아가는 꿈의 세계를 경험했던 나는 추기경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정치하면 안 되는 사기꾼, 성범죄자, 거짓말쟁이들이 버젓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선거에 나왔으니까. 그리고 이런 인간 중에서 덜 병신인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투표 방식.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지금은 어림도 없지.’

    P의 적성검사에서 ‘정치인’이 아닌 인간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격 미달로 정치를 할 수 없으니까.

    정치인만 그럴까? 아니다. 구시대는 모든 시스템이 비효율,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답답할 정도!

    P는 이런 인류를 구원했다.

    “주무시고 계신가요?”

    “아뇨. 눈을 못 뜰 뿐입니다.”

    “아...”

    면역력만 떨어진 게 아닌 모양이다.

    “이 방에 설치된 카메라와 보청기가 그녀의 눈과 귀를 대신합니다. 우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도 그녀의 의지입니다.”

    “...대화도 됩니까?”

    “물론이죠. 몸을 못 움직이는 그녀에게 매우 힘든 일이라서 긴 문장을 쓸 순 없지만. 저 모니터를 보세요.”

    「안녕」

    정말 짤막한 문장.

    조상님이라고 소개했을 때는 막연하기만 했는데, 이어서 P라고 하자마자 저절로 고양됐다.

    P.

    모두가 그 정체를 궁금해하는 천재 과학자 혹은 외계인.

    내가 인류를 개벽한 역사적인 존재를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동이 몰려왔다.

    두근두근!

    심장에 벌써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안녕하세요. 강문수입니다.”

    「앎」

    정말로 짧군.

    「아빠」

    “예?”

    갑자기 ‘아빠’가 왜 나온 걸까?

    “해석하자면, 당신이 부친이랑 매우 닮았다는 뜻입니다.”

    “아!”

    대화 경험이 많은 추기경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라누벨라 6세가 총에 대신 맞고 죽어가는 친구의 씨를 받아서 기적적으로 낳은 딸이 라누벨라 8세니까.

    즉, 내가 P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다.

    「정답」

    “제 어머니의 일도 알고 계십니까?”

    「바보」

    “맞아요. 진짜 바보입니다.”

    이건 추기경의 해석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

    “바보라서 죄송하게 됐네요.”

    어머니가 툴툴거렸지만, 깔끔히 무시하고 대화를 계속했다.

    “자신의 적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인류는 당신의 희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답」

    “예?”

    틀렸다고?

    「설명」

    “동생 대신 설명해줄게요. 강문수 신도님을 초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긴 문장이 어려운 P의 부탁을 받은 추기경이 운을 뗐다.

    “혹시... 연료입니까?”

    “네.”

    “......”

    “자신의 모든 걸 희생했음에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백성 정도라면 가능하겠지요. 한 번 상상해보세요. 제국만 직업혁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미래를.”

    “전쟁이 벌어지겠네요.”

    인류의 역사는 반복되어왔다.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면 기존의 강자들은 밟으려 하고, 시기한 약자들은 힘을 합쳐서 악착같이 물어뜯는다.

    본받는 대신 방해하기!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만큼 비합리적인 동물도 없으리라.

    “지금은 누구나 만 19살이 되면 적성검사를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인원에 제한을 둔다면? 서민들은 누릴 수 없고 정치적인 용도로 남용될 겁니다. 모든 종교가 그러했듯이.”

    “......”

    얄팍한 내 머리로 판단할 수 있는 한계치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었다.

    “강문수 신도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깨우자마자 주위에 새로운 환자가 생기는 이유를.”

    “아...”

    “당신이 그들을 잠재우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

    서혜주 부원장님이 ‘국내에 라누벨 환자는 이제 없으니 안심해.’라고 선언하자마자 곧바로 둘이 생겼다.

    헌터물 의 꿈을 꾸었던 건설업자 박효만.

    사극 <궁녀 덕춘이>의 주인공 친구 덕순이가 된 윤소라.

    특히, 바로 내 눈앞에서 잠든 윤소라를 봤을 때는 내가 전염병처럼 옮기고 다니는 건지 의심해봤었다.

    “왜일까요?”

    “...제가 연료 공급을 끊은 탓에 주변의 새로운 사람이 연료가 된 겁니까?”

    「정답」

    P가 긍정했다.

    “아무나 무작위로 연료로 선택되는 건 아닙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부적응자. 그 대가로 죽을 때까지 행복한 꿈을 보여줍니다.”

    “아...”

    내가 치료한 환자들은 자신의 현재 처지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면 ‘연료 조건’이 깨지면서 다시 눈을 뜨는 것이리라.

    원리가 완벽히 이해됐다.

    “강문수 신도님의 행동은 희생자를 늘릴 뿐이에요. 당신이 100명을 깨우면 새로운 100명이 잠듭니다.”

    “하, 하하...”

    라누벨라 13세가 나를 못마땅해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면 똑바로 설명을 해주던가!

    나도 그녀에게 유감이 많다.

    “심지어 치료의 대가로 돈을 받고 호감을 샀지요. 올림픽에 참가해서 일반 선수들의 노력을 짓밟기까지 하고.”

    “어...”

    추기경이 저렇게 말하니 내가 쓰레기처럼 들리는데?!

    반박할 수도 없었다.

    “장로님. 제 아들에게 자꾸 뭐라고 하면 전쟁입니다!”

    “당신은 좀 빠져 있어요...”

    “싫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어머니가 나를 옹호해줬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선택」

    P가 나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솔직히 이 자리에 제가 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P... 인류를 구원한 신께서 저따위 인간의 선택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바보」

    제가요?

    “모자(母子)가 똑같이 바보로군요. 강문수 신도님은 P의 자손입니다. 아직도 모르시겠나요?”

    “어... 네.”

    “그러면 알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제 동생은 자손에게 욕먹으면서까지 이 일을 계속할 마음이 없습니다.”

    “아!”

    추기경의 자세한 설명에 P가 마침표를 찍었다.

    「가족」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했네요.”

    이 세상에 가족보다 소중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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