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77화 (178/232)
  • 177화

    선배가 자주 움직인 덕분에 몸이 찌뿌둥한 건 없었다. 살짝 나른한 기분이 들었지만, 허용 범위 안이다.

    “킁킁.”

    고급 향수라도 뿌렸나? 내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내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망령과 괴물들이랑 투닥거리는 동안, 선배는 내 몸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왕족처럼 호의호식한 것 같다.

    “돌아왔군요.”

    라누벨라 13세가 무척 유감이란 말투로 나를 환영해줬다.

    달그락.

    그녀와 내 앞에 놓인 다기와 각종 과자로 보아, 선배랑 둘이서 다과회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출장을 안 가셨네요.”

    “기뻐하세요. 앞으로 2년 정도는 별궁에서 쉴 예정입니다.”

    “헤에~”

    환자들의 행복한 죽음을 위해 열심히 해외 출장을 다니던 황녀님께서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나로선 방해를 안 받아서 좋지만, 그 의도가 매우 의심됐다.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도.

    “성공했나요?”

    “...모르겠습니다.”

    “당신다운 애매한 대답이네요.”

    “그럴 지도요.”

    발끈할 기운도 없었다.

    “어머!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그 남자는 사람 같지... 사람이 아니군요. 긴장을 풀 수 없어서 가까워지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쉽다는 뜻이군요.”

    “강문수 씨. 속내를 알기 쉬운 남자가 항상 나쁜 건 아닙니다. 특히나 저처럼 의심이 많은 여자에게는.”

    “아, 네.”

    매우 만만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달그락.

    라누벨라 13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슬슬 가보죠. 여태 별말 없는 걸 보니 성공한 것 같으니까요.”

    * * *

    황당해서 재차 강조한다.

    내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동안, 내 몸을 조종한 선배는 호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

    아름다운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워진 작은 궁전.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정원에는 사슴과 토끼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인어들이 조각된 분수대에는 무지개가...

    내가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보았던 공녀의 별장이 사치의 극치였다면, 여긴 심신을 안정시키는 휴양지 같았다.

    “별궁입니다. 앞으로 2년 정도 보낼 곳이죠.”

    “아프십니까?”

    “설마, 절 걱정해준 건가요?”

    “어... 일단은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 마음이 매우 크니까요. 친한 척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네요. 훌륭한 자세입니다.”

    “......”

    사람이 좀 바뀐 느낌이랄까? 내가 지금까지 봐온 ‘마녀’랑 너무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부르릉~

    우리는 별궁 앞에 준비된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

    “라누벨라는 두 혈족으로 나뉩니다. 저의 고조모님 되시는 6세께서 기적적으로 둘을 낳고 돌아가셨지요. 영웅의 씨를 받아서 7세를. 대신 총에 맞고 죽어가는 친구의 씨로 8세를...”

    정말 뜬금없이 마녀의 족보를 설명해주는 라누벨라 13세.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권력의 노예인 나는 적당히 호응해주기로 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저는 7세의 혈통입니다. 사적으로는 증조모님이 되시죠.”

    “헤에~”

    닮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놀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한 11세가 조모님, 저의 동생을 만들어주려다가 돌아가신 12세가 모친이십니다.”

    “......”

    갑자기 숙연해졌다.

    “증조모님의 이부자매(異父姉妹)이신 8세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만,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자궁이 젊을수록 좋다며 일찍 출산을 결심하셨고... 9세를 마지막으로 다섯을 낳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다섯은 마녀가 아닌 평범한 여성에게도 쉽지 않은 숫자였다.

    “형제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9세는 성격이 매우 급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모친처럼 아이 욕심을 안 내고 10세를 낳자마자 불임을 선언하셨죠. 장로님처럼 오래오래 살고 싶다며.”

    “하지만 9세라면...”

    “네. 건널목에서 파란불이라고 방심하다가 트럭에 치여 돌아가신 분입니다. 장로님은 9세가 출산에 운을 다 썼다고 통탄하셨어요.”

    “......”

    인생이 참 마음대로 안 된다.

    “그리고 10세는 9세의 허무한 죽음으로 모두가 충격받은 틈에 장례식장을 빠져나와서 행방을 감췄습니다.”

    “그런데 용케 찾았네요.”

    “아뇨. 제국의 첩보망을 총동원했음에도 못 찾았습니다. 마녀가 작정하고 모습을 감추면 같은 마녀가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요. 9세가 건널목에서 트럭에 치여 죽은 이유도 운전자가 보지 못한 탓이 큽니다. 황궁에서 놀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돌아가신 11세도... 계단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내려가며 밀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하...”

    투명인간이 실존한다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죽지 않을까?

    다시 들어도 황당했다.

    “10세는 강문수 씨의 조국으로 출장을 나간 12세, 제 어머니께서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랬군요.”

    “두 라누벨라는 놀이동산에서 마주쳤습니다. 짧은 추격전 끝에 10세를 놓치고 말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신성로마제국에 사는 이민자들의 협조로 14분 만에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는 놀이동산에서 화장실에 가서 1시간 넘게 안 돌아오는 어머니의 황당한 통화를 받았다.

    본가에 다녀와야 한다고...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아버지는 살짝 당황하셨지만, 어머니가 부탁하면 원숭이 시늉까지 하는 애처가답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셨다.

    그리고 실종.

    놀이동산에서 사라진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시 안 돌아왔다.

    “10세는 철저했어요. 실종신고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족을 안심시킨 후에 통화기록이 남은 휴대전화를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죠. 강문수 씨가 P의 적성검사를 받는 날까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정답은 이 앞에 있습니다.”

    달칵.

    리무진의 문이 열렸다.

    “아...”

    “나중에 공항에서 봐요. 라누벨라는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3명 이상 한자리에 모여 있지 말라는 규율이 있거든요. 전멸을 방지하기 위해... 이젠 3명밖에 안 남았지만.”

    부르릉~

    나를 궁전 앞에 내려준 황녀님이 리무진을 타고 그대로 떠났다.

    “어... 안녕? 아니면 안녕하세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

    내 앞에 놀이동산에서 사라진 어머니가 있었다. 챙이 넓은 아가씨 모자는 사라졌지만, 그때 입었던 푸른색 머메이드 원피스가 틀림없었다.

    스스슥-

    그러나 살짝 흐릿한 어머니의 얼굴.

    눈에 힘을 주고 3초 정도 자세히 바라봤더니 마법처럼 바뀌었다.

    “이젠 안 통하는구나.”

    “10세...”

    어머니의 수수한 얼굴이 요염한 마녀로 탈바꿈했다.

    “어...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지키려면 내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없어도 둘이 잘살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올림픽 스타가 된 아들의 소식이 게임까지 들려오면서 후회했습니다.”

    “허!”

    얼굴이 바뀌었어도 목소리와 억양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아들이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갇혔고, 감시받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현실에서 안 된다면 모두가 즐기는 가상현실에서 만나면 된다고. 하지만 아들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계정조차 만들지 않았어요. 오판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머니.”

    “남편에게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탓에 모두가 불행해진 것 같아서 아들을 다시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누군가에게 사과해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합니다.”

    “하아...”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괴리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수수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공주병이 좀 심한 편이셨고,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를 여왕님처럼 떠받들며 ‘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라는 말을 입에 항상 담고 사셨다.

    ‘이제야 전부 이해되네!’

    아버지만 어머니의 진짜 모습을 보고 계셨다.

    “정말 미안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안 닮았네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버지랑도 성별 빼고는 닮은 구석이 없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게 아닐까?

    라누벨라 10세가 말했다.

    “사과를 받아주면 닮은 부분을 가르쳐주겠습니다.”

    “하아...”

    솔직히 나도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분노? 원망? 반가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강문수 신도님.”

    “아! 네.”

    이런 나를 구원해주듯 라누벨라 10세의 옆에 있던 추기경이 말문을 열었다.

    “이 바보의 어설픈 사과를 받아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고조부를 쏙 빼닮았습니다.”

    “장로님! 비겁하게...!”

    “당신은 닥치고 있어 주세요. 뱃속에 모르는 사내의 씨앗을 처넣기 전에.”

    “으아아.”

    “실컷 싸돌아다닌 후에 비운의 여주인공 행세하는 당신을 보며, 내가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 이상 자극하지 마세요. 이해했나요?”

    “네...”

    으스스한 목소리로 라누벨라 10세의 입을 틀어막은 추기경.

    시선을 다시 나에게 돌린 그녀가 온화한 성직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뢰를 완수한 보상으로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강문수 신도님의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희망입니다.”

    “제가요?”

    “라누벨라 10세가 당신의 친모란 사실은 이해하셨겠죠.”

    “......”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네.”

    정말 어렵게 받아들였다!

    “당신에게는 고조부가 되겠군요. 그분은 저를 낳고 몸이 쇠약해진 라누벨 6세를 돌봐주는 동네 의사였습니다.”

    “총에 대신 맞고 죽은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짧게 해주세요!

    “네. 그분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물론이고, 당시에 갓난아기였던 저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라누벨라의 이름도 6대에서 끝났겠지요.”

    “그런데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라누벨라 1세는 친구의 위기를 외면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가 저희의 잉태를 방해하는 주범이지요.”

    “친구요? 설마...?”

    나도 무당으로 2년 가까이 활동했으니까. 집히는 게 있었다.

    “친구. 라누벨라 대신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 저주를 절대 풀지 못하게 해뒀을 줄 알았는데, 피해갈 길이 열려 있었던 겁니다.”

    “잘됐네요!”

    라누벨라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문제가 있어요. 이 저주의 진짜 노림수가 여기 있습니다.”

    “뭔데요?”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요. 겨우 3명, 가임기가 지난 저를 빼면 2명. 하물며 13세는 황녀입니다. 생명의 위기를 자초해서 남자의 우정을 시험할 순 없어요. 인위적인 상황극이 먹힐 리 없고, 그 남자는 필연적으로 죽습니다.”

    “아...”

    듣고 보니 그랬다.

    “하지만 희망이, 길이 보인다는 건 고무적입니다.”

    “제 아들이에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닥치세요.”

    “네.”

    어른스럽지 못한 라누벨라 10세의 입을 다물게 한 추기경이 안쪽을 가리켰다.

    “강문수 신도님. 따라오세요.”

    “제가 또 놀랄 일이 남았습니까?”

    두근두근.

    내 심장은 이미 폭주 상태다.

    ‘죽일 뻔했잖아!’

    내가 어머니를 죽여서 검귀로 만들 뻔했다!

    막바지에 내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간 선배가 무슨 수를 써준 덕분에 잘 풀렸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머니. 선배는 어떻게 됐습니까?”

    “선배라면... 소운현 씨?”

    “네.”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모르면 누가 압니까?”

    “정말입니다. 다시 어머니라고 불러줘서 너무나 고맙고 기쁘지만, 나를 동료로 만들기 위해 몰려든 검귀들에게 그가 포위됐다는 것 말고는 정말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포위.

    괜찮은 걸까? 선배의 안전을 확인하려면 다른 꿈을 빨리 찾아봐야 한다.

    “강문수 신도님?”

    “네. 갑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추기경을 따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