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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76화 (177/232)
  • 176화

    [9장-7절] 현실로 돌아가라

    라누벨.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지구인을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여신(女神).

    현실이 따분해진 권력자들에게 원하는 이상향(세계)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녀는 어디서나 각광받았다.

    “아아! 라누벨이시여! 이 세상은 너무나 따분합니다! 전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저를 영웅의 땅으로! 강적이 끊이지 않는 세계로 보내주십시오!”

    “그 소원을 들어주마.”

    “엄마가 보고 싶어요. 저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여신님. 저를 엄마가 계신 곳으로 보내주세요. 엄마를 싫어한 아내들을 노예로 바칠게요! 아내들이 사는 궁전도 함께.”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노라.”

    처음에는 몸에 무리가 안 가도록 하루나 이틀 정도 꿈속으로 보냈다.

    벌떡!

    “아아! 영웅들을 보았습니다! 영웅들의 연회! 함성! 결투! 그들이 나를 영웅의 전당으로 초대했어!”

    “그랬구나...”

    “라누벨 여신이시여! 저를 그 땅으로 다시 보내주십시오! 다시 돌아올 수 없어도 좋습니다!”

    너무 생생해서 그걸 꿈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번뜩!

    “엄마를 봤어요! 엄마가 저에게 말했어요! 며느리들 때문에 화병으로 일찍 죽었다고요! 엄마가...!”

    “진정하거라.”

    “여신님!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엄마를 괴롭힌 이년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여봐라! 군대를 소집하라! 이 역적들을 쓸어버리겠다! 엄마! 힘들었지? 조금만 기다려! 엄마의 아들이 곧 다시 갈게요!”

    꿈은 현실이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신뢰만 얻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꿈을 현실로 착각한 자들은 기꺼이 재물을 바치고 영원한 안식을 선택.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라누벨 여신이시여!”

    “라누벨 여신이시여!”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은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서 다른 세계로 떠났다고 믿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잠들었을 뿐이지만, 영혼이 떠났다고 믿은 사람들은 지배자가 영양실조로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화려한 무덤에 안치했다.

    피라미드, 왕릉, 고인돌...

    그런 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여신으로 살아온 그녀는 기나긴 삶을 끝내고 후대로 넘겼다.

    라누벨라.

    라누벨 여신의 피를 이었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 ‘라누벨라’를 받은 사람은 단 1명뿐.

    뛰어난 영웅의 몽정(夢精)을 받아서 낳은 아이들은 능력과 외모가 출중했으나, 능력의 계승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돈, 명예, 남자, 권력...

    여신으로 군림하며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은 라누벨이었지만, 그녀가 정말 원하는 건 닿지 않았다.

    “또 실패인가.”

    가문이 번성하려면 사내아이가 꼭 필요하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남자는 어떤가?

    여자의 몸에 씨만 뿌리면 끝! 능력의 계승이 쉽지 않다면 아이를 많이 낳으면 된다.

    10명 낳아서 1명 성공이라면?

    100명을 낳으면 10명 성공이다.

    여자의 몸으로는 100명을 낳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자의 씨를 받은 여자 50명이 두 번씩만 낳으면 확률적으로 10명 성공!

    즉, 라누벨의 야망이 완성되려면 사내아이가 필요했다.

    “여신의 피를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여신은 사라져라! 이 땅은 인간의 것이다...!”

    “저 여자는 신이 아니야! 내가 똥 싸는 걸 봤어!”

    라누벨의 재산이 탐난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만삭(滿朔)인 탓에 거동이 불편해서 도망칠 수 없었던 그녀는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후계자를 찾아라!”

    “어디로 사라졌지?!”

    “당장 잡아!”

    신의 존재를 부정한 자들이 라누벨의 피와 살을 경쟁적으로 뜯어먹으며 영생(永生)을 부르짖는 부조리.

    어머니의 끔찍한 최후를 목격한 라누벨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교훈을 얻었다.

    “신은 안 돼.”

    그 교훈은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시기에 도움이 됐다.

    철저하게 능력을 숨겼음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질시한 여자들의 신고로 죽음의 위기에 빠진 라누벨라.

    그녀는 이때 재치를 발휘해서 믿지도 않는 ‘신’의 영광을 찬양했다.

    “주교님. 신을 직접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악마랑 놀아나는 음탕한 마녀야! 함부로 그분을 입에 담지 마라!”

    “신께서 소녀에게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주교님께 알현의 기회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헛소리!”

    “헛소리가 아니라면 주교님은 그분의 노여움을 사실 겁니다.”

    “노여움? 허! 마녀가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구나. 신께서는 어린 양들을 사랑하신다.”

    “주교님은 신의 목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

    짝!

    뺨을 맞았다.

    “닥쳐라! 마녀가 감히 나를 시험하려고 하다니!”

    “그분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다면 추기경도 주교님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

    “어쩌실 건가요?”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엉뚱한 꿈을 꾼다면 어머니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튼 짓하면...”

    “저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소녀의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좋다.”

    주교는 꿈을 꾸었고, 그의 신앙심과 명예욕은 변수 없이 원하는 꿈으로 인도했다.

    주르륵!

    깨어난 그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오오! 그분을 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해주지 않으시던 분께서 40년 만에...!”

    “...이제 믿으시나요?”

    “믿습니다! 소인의 무지함을 용서하소서! 이놈들! 무엇 하느냐? 성녀님을 조심히 내려드려라!”

    성녀.

    신이 아닌 신의 대리자.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라누벨라는 어머니랑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다.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무엇 하나 불편함이 없는 삶을 안전하게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나는 마녀가 아니야!”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라누벨처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자들은 마녀로 몰려서 고문과 화형을 면치 못했다.

    “성녀님. 이 마녀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은 추기경 예하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허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이단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신의 뜻대로...”

    어머니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은 라누벨라는 항상 몸을 낮췄다.

    성녀.

    이 단어는 최고의 방패였다. 국적이랑 상관없이 종교는 절대적이었기에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으니까. 명성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는 그녀를 시기하는 권력자도 없었다.

    “아아! 그분을 뵈었어요!”

    “신께서 나를 용서하셨어!”

    그녀는 주기적으로 능력을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신을 보여줬다.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아무리 권력에 욕심이 먼 자라도 신을 직접 뵙고 나면 순한 양이 됐고, 없던 신앙심이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성녀님!”

    “진짜 성녀...”

    그 주체인 라누벨라에게 악의나 성욕을 품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트라우마로 생긴 검소한 생활이 그녀를 더욱 성녀처럼 보이게 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라누벨라! 살려줘!”

    “...이교도랑 말을 섞을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친구잖아!”

    “......”

    친구가 마녀로 몰려서 붙잡혔다.

    “라누벨라, 벌써 잊었어? 내가 너를 구해줬잖아! 나는 마녀가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줘! 너처럼 특별한 인간일 뿐이라고!”

    “저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위대한 신의 뜻을 전할 뿐입니다.”

    “네 능력이잖아! 어째서 믿지도 않는 신을 들먹이는데...!”

    “......”

    친구는 자존심만 강한 멍청이다.

    “성녀님.”

    이단심문관이 결정을 묻는다.

    “...친구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군요. 뒷일을 맡기겠습니다.”

    소중한 친구다.

    하지만 구해줄 수 없다. 악마에게 현혹된 이교도로 몰리면 왕(王)도 무사하지 못하니까.

    “겁쟁이!”

    “......”

    욕해도 바뀌지 않는다.

    “라누벨라! 너는 아들을 낳는 게 꿈이라고 했지?”

    “......”

    어머니의 꿈이다. 하지만 달리 욕심이 없었던 라누벨라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나의 전부를 담아서 너를 저주하겠어.”

    “뭐...?”

    “라누벨라. 너의 신과 나의 저주. 누가 더 강한지 지켜봐.”

    이때부터 ‘라누벨라’는 출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 * *

    “흠... 매우 정교한 저주로군. 그 동기는 좀 병신 같지만, 실력만큼은 신에 근접했어.”

    라누벨라 10세의 머리에서 손을 뗀 소운현은 그 수법에 감탄했다.

    “어? 어떻게...”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놀라서 눈을 뜬 라누벨라 10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살아있냐고?”

    “...당신은 누구지?”

    “소운현. 네 아들의 몸에 기생 중인 신(神)이다.”

    “......”

    “사랑하는 아들의 손에 죽어서 죗값을 치른다. 나처럼 먼 옛날에 태어난 인간이나 생각할 법한 고전적인 방식이야.”

    “이번에는 인간?”

    “인간이었던 신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를 살렸나요?”

    어떻게 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토록 원했던 아들의 손에 죽지 못했다는 게 중요했다.

    “네 기억을 보았다.”

    마녀가 ‘라누벨라’의 이름을 고집스럽게 계승하는 이유도 포함해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선대의 기억을 꿈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면 설명이 필요 없겠네요. 저는 남편과 아들을 버린 인간입니다. 그게 제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신성로마제국의 첩보망에 걸려서 끌려왔다.

    작별 인사?

    할 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고귀한 마녀의 혈통이 외부로 새는 걸 용납하지 않으니까.

    “제국에서 함께 사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럴 생각이었다면 정체를 감추지 않고 처음부터 제국으로 이사 갔을 겁니다. 나의 소망은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일상...”

    “평범한 남편은 아내에게 자상하지 않다. 네 외모면 어떤 남자를 만나더라도 똑같을 거다.”

    “신이 아니라 잔소리꾼이었군요.”

    “이 기회에 기억해둬라. 신은 답답한 중생을 매도하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

    “이제 어쩔 셈이죠?”

    “살렸으니 현실로 내보내야지. 라누벨과 라누벨라 1세가 했던 것처럼.”

    “당신의 짓인가요?”

    “그래. 네 아들의 몸을 빌려서. 머리가 나빠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녀석도 할 수 있겠지.”

    라누벨라 10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돌아봤다.

    인간의 몸.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아바타가 아닌 현실의 육체였다.

    강제동화.

    다르게 말하면 추방.

    꿈속에 동화된 사람을 강제로 현실에 동화시켜서 꿈을 깨우는... 생존한 마녀 중에는 장로인 라누벨라 7세만 가능하다.

    “어째서...”

    “어째서 돕느냐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는 모자(母子)가 똑같군. 네가 죽으면 녀석이 행복할까?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모친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버틸 수 있을까?”

    “......”

    “답답한 아줌마에게 설교하는 건 여기까지다. 슬슬 몰려오는군.”

    끼기긱-

    끼긱-

    라누벨라 10세가 이 세계를 떠나는 걸 원치 않는 검귀들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몰려왔다.

    “너를 동료로 만들고 싶어 하는 망자들이 많군. 가라.”

    “당신은...”

    “혈신 소운현. 가서 어른답게, 부모답게 행동해라. 내 안부도 전해주고.”

    톡.

    소운현의 손끝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 * *

    “아...”

    라누벨라 10세는 가상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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