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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75화 (176/232)
  • 175화

    “...네가 누구인지 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그녀는 거대한 용도 아니었고, 신성로마제국 대신전 지하감옥에서 보았던 여성의 외모도 닮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

    요정처럼 귀가 뾰족하고,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는 파충류처럼 위아래로 찢어졌으며, 이마에 2쌍의 작은 뿔이 돋아난... 칠흑의 장발 소녀였다.

    “그건 곤란합니다.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힘들게 아바타를 키우지도 않았겠죠.”

    “힘들게 키운 아바타를 허무하게 잃게 되더라도?”

    뚝-

    편안히 등을 기댄 흔들의자를 멈춘 소녀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위협적으로 물었다.

    ‘...강한가?’

    외견으로는 파악이 안 됐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는 레벨과 적성에 비례해서 능력치가 결정되지만, 그 적성에 따라서 체형 변형과 보정이 있다.

    그래서 여성이라도 근육이 필요한 적성이면 근육질 몸이 된다. 이게 싫으면 적성을 바꾸면 되고.

    이걸 뒤집어서 해석하면, 수수깡처럼 가녀린 몸으로 우락부락한 사람을 근력으로 이기려면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아야 한다.

    (답답한 후배야. 마녀가 너처럼 근육으로 싸울 것 같냐? 생각이 필요한 일로 생각해라.)

    그러면 마법사겠네요.

    “당신이 어떤 대가를 약속받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마녀랑 엮이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충고는 저에게 무의미합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버텨온 과거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힘으로 제압한 후에 설득?

    소녀의 겉모습이 만만한 탓에 한순간 그런 생각도 했지만, 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S급 재료를 확보해서 골렘의 심장을 제작한 아바타의 레벨이 낮을 리 없다.

    “마녀의 목적을 아나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꿈속에서나마 행복하게 지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아요.”

    “압니다. P 때문이잖습니까.”

    사실은 모른다. 선배가 연관이 있다고 해서 아는 척할 뿐이다.

    “...이미 거기까지 안다면 당신을 돌려보낼 마음이 없다는 뜻이겠군요.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녀는 절대 타인의 꿈속에 들어가지 않아요. 육체가 무방비상태에 놓이니까. 잠든 사이에 남성이 들어와서 씨를 뿌려도 막지 못하죠.”

    “그걸 잘 아시는 분께서 어째서 꿈속에 들어오신 겁니까?”

    “시위입니다. P를 위해 사람을 마른 장작처럼 희생시키는 신성로마제국 추기경을 상대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입니다.”

    “마른 장작... 딱 적합한 표현이긴 하네요.”

    존경하는 선배님! 저 마녀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는 척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대화를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궁금하냐?)

    네.

    (라누벨 환자들은 P의 적성검사기를 현실화하기 위한 연료다.)

    현실화...?

    (당사자와 부모조차 모르는, 사람의 적성을 볼 수 있는 기술이 순수한 과학이라고 생각했냐? 아!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P의 적성검사기가 있는 세계였기에 실감이 안 되겠군.)

    “......”

    선배님. 제가 태어난 현실도 꿈이라는 겁니까?

    (아니. 현실이다. 꿈이었다면 연료가 필요 없지.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처럼 땅에 꽂는 순간 이루어질 테니까.)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러나 지금은 내색할 수 없었다.

    “라누벨라 10세. 당신의 시위는 이미 성공했습니다. 라누벨라 7세가 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장 중요한 걸 눈치채지 못했네요. 장로님의 목적은 당신이 꿈속에 들어온 순간 달성됐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계속 아는 척해온 나도 이번만큼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놓쳤다는 거지?

    소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22살이면 정력이 매우 왕성할 나이죠. 자는 동안 약간의 자극만 받아도 몽정할 시기.”

    “몽정(夢精)...?”

    이불을 세탁하는 시간과 세제가 아까워서 참아보려고 해도 자연적인 현상이라서 막지 못한 불가항력.

    나도 몇 번 경험해봤다.

    “장로님의 목적은 건강한 제사장의 씨입니다.”

    “......”

    한순간 뇌가 정지했다.

    “강력하고 신중한 마녀조차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 1순위가 잉태(孕胎)니까요.”

    “어째서...?”

    “평범한 남자의 씨는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는 마녀의 몸을 망가트립니다. 흔한 증상 중 하나가 자궁경부암일 정도니까요.”

    “......”

    완벽한 여성 같았던 ‘마녀’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자연의 이치지. 강한 포식자일수록 출생률이 낮은 법이니.)

    “심지어 마녀는 열성(劣性)입니다. 목숨 걸고 잉태해도 높은 확률로 평범한 여자아이가 태어나요.”

    “그래서... 저를 노렸다는 겁니까?”

    “네. 당신의 탄생은 앞으로 한 세대 안에 멸족할 마녀의 혈통을 존속해줄 유일한 희망이기에.”

    “......”

    존경하는 선배님?

    (걱정하지 마라. 네가 몽정하도록 놔두지 않았으니.)

    감사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대비책을 마련해뒀으니까요. 저도 아무런 안전준비 없이 무작정 꿈에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P의 꿈.

    마녀의 결함.

    마른 장작.

    조금 전까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 집중하다가 현실의 지식이 대량으로 주입되면서 어질어질했다.

    (일일이 설명해줘야 아는 후배야. 아직 하나 더 남았다.)

    “......”

    라누벨라 10세가 나의 모친인지 물어보는 일이 남았다.

    “돌아가세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신을 깨우는 것 외에는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방법도 준비하지 않고 무작정 들어왔다는 건가요?”

    “방법을 아십니까?”

    “간단해요. 세계의 영혼에 구멍을 내는 겁니다.”

    (여기서 자신을 죽이거나 설득하라는 뜻이다.)

    “돌아가시죠.”

    “미안하게도 저는 현실로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죽을 때까지 설득하려고 하겠죠. 이걸 보고도 설득할 자신이 있다면.”

    번쩍-!

    빛에 휩싸인 소녀의 몸이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점점 더...

    정원을 벗어난 빛은 둥지를 꽉 채울 정도로 커진 후에 잦아들었다.

    “크르르르.”

    “미친...”

    저것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펄럭~

    방금까지 소녀였던 칠흑의 용이 3쌍의 날개를 펼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늘이 겁에 질린 것처럼 요동쳤다.

    거기에 더해,

    [칭호] 최강의 용왕(A)

    [레벨] 1835

    [직업] 절대자(7차)

    [업적] 1210351

    [적성] 제왕

    상식의 범주를 한참 이탈한 용의 상태창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 * *

    사기적인 상태창을 보자마자 어떻게 된 건지 눈치챘다.

    라누벨라 10세는 ‘제사장’으로 7차 전직한 후에 용으로 환생하면서 적성을 ‘제왕’으로 바꿨다.

    “이건...”

    절대 못 이긴다.

    “크아아아!”

    주둥이를 쫙 벌린 최강의 용왕이 숨결을 쏠 준비를 했다.

    (후배야.)

    선배님! 이건 못 이겨요!

    (그래. 이 세계의 규칙으로는 절대 못 이기지.)

    어? 그러면?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너의 세계로 용을 제압해라. 가라앉아서 죽기 전에.)

    “하아...”

    우울하다. 여기까지 힘들게 키운 상태창이 쓸모없다니...

    [칭호] 도전왕(A)

    [레벨] 1013(+116)

    [직업] 탐구자(7차)

    [업적] 1210014

    [적성] 제사장

    블랙홀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용의 숨결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짜릿하구먼.”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다.

    [칭호] -

    [레벨] -

    [직업] -

    [업적] 1761

    [적성] 제사장

    완벽하게 분리된 나의 세계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힘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르르-

    늪에 빠진 것처럼 발부터 몸이 또 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업적.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은 업적 점수만큼 나에게 저항할 힘이 생겼다.

    “이건...?”

    (네가 송선영의 꿈속에 들어간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순수하게 쌓은 업적이다.)

    “아!”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 난입한 첫날, 업적에 신경 쓰라고 했던 선배의 조언이 번뜩 떠올랐다.

    내가 처음에 몇이었더라?

    (315점이다.)

    감사요.

    “와!”

    그러면 대체 몇 배야?

    (그만큼 네가 비효율적으로 업적을 쌓아왔다는 뜻이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만 존재하는 업적이 싹 빠지긴 했지만, 내가 라누벨 환자들의 꿈속에 8번 들어가서 고작 315점을 쌓았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후배야. 생각할 시간 없다.)

    “후읍!”

    대충 계산해도 5배가 넘는 업적이 ‘나의 세계’를 충만하게 해줬다.

    “크아아앙!”

    펄럭~

    나에게 물리력밖에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라누벨라 10세가 급강하했다.

    저 무지막지한 덩치에 깔리면 아무리 나라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런 나에게 필요한 건?

    ‘최강의 무기.’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원작 주인공이 사용했던 SSS급 괴물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는 최강이 틀림없었다.

    적의 숫자만큼 칼날 소환?

    반칙이고 사기다.

    하지만 ‘설정’이란 관점에서 보면 매우 하찮다. 헌터물 세계관 전역에 깔린 게 괴물이니까.

    최강의 무공이라는 ‘천마신공’도 마찬가지. 무협 세계관에 널린 게 내공심법이고 무공이다.

    반면,

    ‘빌려줘.’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가장 다리가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렸다.

    방황하는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사랑해준 수호기사.

    그녀에게 준 ‘칼’이 필요했다.

    유일(The one).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관을 통틀어 단 하나뿐인 판타지 요소.

    그렇기에 최강!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설정의 검귀 팔다리를 하나로 응축한 것이나 다름없는 절대적인 절삭력...

    “발렌타인.”

    그 주인의 이름을 부르며 부탁했다.

    스르릉-

    아름다운 수호기사의 온기가 여전히 느껴지는 칼의 손잡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는 영원히 사라졌지만, 발렌타인은 내가 검술을 익히며 쌓은 업적 속에 살아있다.

    (실전만 강한 녀석.)

    아주 감사요!

    부웅~

    나를 압살할 기세로 하강하는 ‘최강의 용’을 향해 ‘세계관 최강의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크아아앙...!”

    “어?”

    갑자기 뭐야?

    라누벨라 10세가 억지로 몸을 비틀면서 배를 훤히 드러냈다.

    서걱-!

    7차 전직을 마친 1835레벨의 절대자일지라도 세계관을 벗어난 힘에는 어쩔 수 없었다.

    콰광, 쿠와아아왕-

    둥지로 다시 추락한 용은 꿈쩍하지 않았다.

    (후배야.)

    “.....”

    이건 대체...?

    (현실로 돌아가서 푹 쉬어라. 뒤처리는 어른에게 맡기고.)

    “...에?”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망령에게 육체를 빌려줬을 때랑 비슷했다.

    급기야,

    “후배야. 버티는 게 기특하다만, 시간 낭비다. 가서 쉬어라.”

    말했다.

    ‘이 말투는 선배?!’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선배가 더 빨랐다.

    톡톡.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린 순간,

    * * *

    “아...?”

    나는 가상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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