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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73화 (174/232)
  • 173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창세신화.

    「몰랑께서 몰랑으로 창조한 몰랑한 세계에서 몰랑이라고 말씀하시니 생명이 잉태되었다.」

    여기서 몰랑으로 잉태된 생명의 대부분은 이 게임의 세계관에만 존재하는 괴물이다.

    “꾸엑?!”

    “켁?!”

    죽이고 또 죽여도,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를 서비스하는 게임업체의 본사가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토요일 0시를 기점으로 재생성된다.

    여기서 문제.

    간신히 토벌해서 땅을 확보해도 매주 토요일마다 괴물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토지 개발이 불가능하다.

    즉,

    “진짜 아무도 없네.”

    내가 이용하는 사냥터가 700레벨을 넘어선 뒤부터는 황녀도 따라오지 못했다. 너무 위험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이 헌상한 흑룡 정도는 간식으로 취급하는 괴물이 바글바글하니까. 못 오는 게 당연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됐군.)

    “그렇긴 한데...”

    제대로 된 먹거리와 잠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괴롭네요!

    편의점 사장님이랑 마주친 710레벨대 사냥터가 이용자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개발지였다. 여길 벗어나면?

    마을 없음, 도시 없음, 신전 없음.

    일반적인 롤플레잉게임들처럼 순박한 마을주민이 평균 900레벨대인 안전한 마을 같은 건 없고, 정규기사보다 강한 500레벨 토끼도 존재하지 않는다.

    활활~

    950레벨대 사냥터에 사는 토끼도 다른 지역이랑 똑같이 1레벨. 초보자용 사냥터에 사는 토끼는 이마에 뿔이 달린 3레벨이지만, 그건 이미 동물이 아닌 괴물이다. 현재는 내 공복 회복을 위해 불에 구워지는 중이고.

    [토끼 고기]

    괴물을 포함해서 토끼 종류를 사냥하면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다.

    [토끼 고기 구이(F)]

    불을 다룰 줄 아는 원시인 이상의 지능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초보자용 요리.

    완성까지 꽤 오래 기다렸다.

    “크르르!”

    “크르르르!”

    토끼 굽는 냄새를 맡은 괴물들이 몰려들었다.

    “나쁜 새끼들이네.”

    950레벨대 사냥터에는 950레벨 괴물만 사는 게 아니다. 그 괴물들이 다음 토요일 0시까지 버틸 수 있는 먹잇감들도 함께 창조된다.

    그런데 내 토끼 구이를 노리다니?

    죽어 마땅하다.

    서걱-

    때구루루~

    사람처럼 생긴 괴물들의 머리가 땅에 우수수 떨어졌다.

    “...내 기분 탓인가.”

    사냥터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괴물들의 형태가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비? 악마? 흡혈귀? 늑대인간?

    그것들은 이미 이용자들에게 매주 학살당하는 불쌍한 존재들. 이건 근본적으로 달랐다.

    “크르르르!”

    “크르르!”

    굳이 비슷한 생물을 꼽자면 ‘검귀’에 가까웠다.

    (평소에는 고구마처럼 답답하면서 실전에는 참 강하구나.)

    “어?”

    정말이에요?

    (방심하지 말고 앞이나 봐라.)

    “크아아앙!”

    “크아앙!”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레벨은 눈속임, 장식이 아니다. 순수한 전투력의 척도.

    950레벨.

    가장 강한 이용자조차 700레벨대에 머무는 인류의 영역에 1마리라도 풀어두면 끔찍한 대학살을 일으킬 수준의 능력이 있다.

    물론, 활성화된 신전에서 이용자들의 부활과 탈출 시스템을 보조하는 ‘천사’가 주변을 지켜주기에 최악의 몰살 상황은 안 일어나겠지만.

    파아앙-

    이용자들처럼 안 싸울 때는 10레벨 수준으로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전투에 돌입하면 950레벨이 된다.

    초음속으로 움직이며 발생한 충격파는 기본! 750레벨 미만은 접근조차 못 하고 충격파에 사망하리라.

    휘이잉~!

    그 뒤를 잇는 후폭풍이 방금까지 멀쩡했던 대지를 쓸거나 엎어버리고,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면?

    퍼엉!

    지형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아깝게...”

    나는 열심히 지켰음에도 흙먼지가 묻은 토끼 구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괴물들에게 반격했다.

    (반격? 네가 먼저 공격해서 깔끔히 죽였으면 토끼 구이도 무사했지. 자초해놓고 누굴 탓하는 거냐.)

    “끙...”

    항상 옳은 말씀으로 후배를 초라하게 만드는 선배님께 감사를.

    “크앙!”

    긴팔원숭이처럼 생긴 950레벨 괴물들이 채찍처럼 팔을 휘둘렀다.

    “복수다!”

    서걱-

    폭풍처럼 몰아치는 충격파를 뚫고 한 마리를 베어서 죽이고,

    서걱- 빠직.

    두 마리째 죽이고,

    서- 댕강.

    “하아?”

    세 마리째 베는 도중에 칼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860레벨 사냥터에서 괴물 우두머리를 사냥하고 획득한 칼.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이용자들이 보유한 무기 중에서 이것보다 좋은 건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수리하지 않고 혹사한 끝에 수명이 다하고 말았다.

    (이 정도면 정말 오래 버텼군.)

    “끙...”

    850레벨대 장비를 제작하거나 수리하려면 못해도 780레벨 이상의 대장장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없으니 어쩌겠는가? 지금처럼 쓰다가 칼날이 마모되고 부러질 때까지 혹사해야지.

    ‘슬슬 나도 한계란 거겠지.’

    문명의 혜택이나 보조 없이 혼자서 성장할 수 있는 한계에 가까워졌다.

    “크르르-”

    “닥쳐!”

    퍽!

    맨손으로 때려죽일 수는 있지만, 나의 직업과 적성은 전투직업이 아니라서 무기가 없으면 ‘비무장 농부’처럼 전투 효율이 떨어진다.

    [칭호] 도전왕(A)

    [레벨] 954(+120)

    [직업] 탐구자(7차)

    [업적] 1206082

    [적성] 제사장

    레벨로 찍어 누르고는 있지만, 적합한 장비의 부재로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사냥도 점점 버거워져서 사냥감과 나의 레벨도 엇비슷해졌으며, 마음 놓고 쉴 도시와 마을이 주변에 전혀 없다는 점도 나를 힘들게 했다.

    (후배야.)

    네.

    (슬슬 도전해보는 게 어떠냐?)

    “흠...”

    내 목적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최강자가 되거나, 결말을 보는 게 아니다.

    라누벨라 10세.

    이 세계에서 용으로 환생한 그녀를 만나서 설득하는 것이다.

    (현실의 시간도 생각해라.)

    “...그래야겠죠?”

    내 성장 속도를 이용자들이 눈치챈다면 사기라고 했겠지만, 나에게는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꿈에서 깨면 사라질 아바타니까. 열심히 키워봤자 헛수고다.

    (헛수고는 아니다.)

    정말요?

    (나를 믿어라. 믿어서 네가 손해본 적이 있었냐?)

    없었죠.

    그건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의 너 정도면 둥지를 지키는 파수병 정도는 가볍게 쓰러트릴 수 있을 거다. 라누벨라 10세가 얼마나 강할지는 미지수지만.)

    “...해보죠.”

    안 그래도 가방이 꽉 차는 바람에 710레벨 사냥터 근처의 마을에 갈 예정이었다.

    [아다만티움 광석(B)]

    [로맨티움 가루(S)]

    [분노한 전설의 심장(A)]

    [솔로늄 파편(S)]

    ......

    모든 최상위권 길드가 힘을 합쳐서 2년 전에 개척하고 신전을 짓는 데 성공한 안전지대.

    이곳에 개설한 내 창고에 쌓아둔 전리품이 매우 많았다.

    (꿈을 떠나도 남는 게 있겠구나.)

    내 아바타는 사라지더라도 창고에 보관한 전리품은 그대로 이 세계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뇨.”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전부 나눠주고 떠날 겁니다.

    (조금 컸구나.)

    감사요.

    최후의 관문에 도전할 때가 됐다.

    * * *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는 무거울수록 장비의 성능도 좋다는 설정이 있다.

    그러나 장비가 무거워지면 그만큼 움직임도 둔해지기에 좋은 장비의 필요성에 의문을 품는 것도 사실.

    이 문제점은 고급 재료에 붙은 속성이나 능력으로 극복한다.

    로맨티움 가루(S)

    사랑받을수록 강해지는 몰랑한 물질의 가루.

    사랑받을수록 강해지는 광물의 가루라는 것 같다.

    내가 최초로 획득했다.

    [솔로늄 파편(S)]

    외로울수록 강해지는 몰랑한 물질의 파편.

    로맨티움의 반대 개념인 이것도 내가 최초로 획득한 광물이다.

    둘 다 S급 광물.

    편의점 사장님 같은 랭커들이 소속된 길드에서 힘들게 획득하는 광물이 B급이란 점을 고려하면, 나만 동떨어진 별나라에서 놀고 있는 셈이다.

    “좀... 당혹스럽네요.”

    나의 귀환 소식을 선배에게 전해 들은 황녀가 마중 나왔다.

    “왜요?”

    “한 명의 가상현실게임 이용자가 실물경제까지 뒤흔드는 상황은 꿈에서만 가능할 줄 알았는데요...”

    내 창고에 쌓인 전리품의 가치가 모든 이용자의 게임 재산이랑 동급이거나 이상이라고 한다.

    ...실화냐?

    편의점 사장님이 자기 무기를 팔면 건물주가 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린 적이 있지만, 그래도 너무 과장된 게 아닐까.

    “정말요?”

    “그래서 팔려고요?”

    “아뇨.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스포츠토토 배당금 201배도 놀라웠었는데,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실제로 구매할 여력이 있는 이용자는 별로 없습니다. 바로 쓸 수도 없는 고급 재료를 사기 위해 속옷까지 파는 이용자는 별로 없으니까요.”

    “아하...”

    “그래도 재력이 되는 이용자나 단체에 조금씩 물량을 풀면서 수익을 극대화한다면... 3년 안에 세계 10대 재벌 안에 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안 죽고 버틴다면.”

    “뒷말이 참 무섭네요!”

    너무 까불면 암살당한다는 협박을 쉽게 하는 황녀님이었다.

    (답답한 후배야. 서두르지 말라는 충고다.)

    같은 말 아닌가요?

    (전혀 다르다.)

    아, 네.

    “그나저나 황녀님. 처음으로 가벼운 차림이시네요.”

    신성로마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이 제작한 갑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중무장한 황녀님.

    그런데 오늘은 얇은 천으로 만든 평상복이었다.

    “이 검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무장을 희생했습니다.”

    황녀님이 나에게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덜덜.

    “팔을 떨고 계시는데요.”

    “...황녀를 놀린 불경죄로 죽고 싶으신가요?”

    “죄송합니다!”

    나는 잽싸게 그녀가 건네는 검을 받았다.

    휘청~

    한순간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릴 정도로 묵직했다. 황녀가 두 팔을 떨고 있었던 것도 이해됐다.

    “신성로마제국의 백성이 아니라서 협상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제작은 차질없이 진행됐습니다.”

    “오오!”

    “마음에 드나요?”

    [정말 하찮은 솔로늄 검(A)]

    “A급 무기...”

    처음 봤다. 이름은 토끼도 못 벨 것처럼 정말 하찮았지만.

    “S급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S급이 나오길 기대했는데, 대장장이의 레벨이 너무 낮아서 실패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이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가 600레벨 후반이니까. S급 재료를 허공에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재료는 어떻게 하실래요?”

    “남해수 씨처럼 유언을 남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렇다면 강문수 씨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다.”

    “끙...”

    황녀가 계속 말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재산은 처분해야 하니까요.”

    “그건 그렇죠.”

    (마녀에게 빚은 갚았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네 의견을 말해라.)

    빚.

    내가 싸지른 똥을 대신 치워준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를 잊지 않으신 편의점 사장님께 로맨티움 가루 1개. 나머지는 돈으로 처분해서 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나눠주십시오.”

    “그 대부분은 제가 부탁한 제국의 백성인데요?”

    “국적은 상관없습니다.”

    “...강문수 씨가 갑자기 변해서 적응이 안 되네요.”

    “죽음을 경험하면 답답한 인간도 바뀔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는 눈을 뜨면 말끔히 끝나던 기존의 꿈이랑 전혀 달랐다. 내 판단과 행동이 현실까지 영향을 줬으니까.

    뼛속까지 스며든 절망. 그리고 후회와 반성!

    영원히 잊기 힘들 것 같다.

    “좋아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도와준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해서 벼락부자로 만들 게 아니라면 아직도 한참 많이 남아요.”

    “남으면 황녀님께 전부 드리겠습니다. 그 돈으로 저만 괴롭히지 않으시면 됩니다.”

    “...정말로 적응이 안 되네요. 계획이 좀 허술한 걸 보면 현명한 선배의 작품은 아닌데.”

    “감사요.”

    순도 100% 내 계획이다.

    “당신은요? 팔아서 당신의 통장에 입금해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거 하나면 됩니다.”

    [정말 하찮은 솔로늄 검(A)]

    재산 처분 완료.

    이제 라누벨라 10세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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