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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72화 (173/232)
  • 172화

    [9장-5절] 반성한다

    돈을 쉽게 벌고 싶은 마음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아버지처럼 과욕을 부리다가 죽음에 이르진 말자고 다짐했던 내가 똑같이 망했네? 자괴감과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진짜로 죽고 싶었지.’

    내 육체를 빌린 망령이 가상현실게임에서 저지른 악행들이지만, 현실이었다면 영구징역만 100번쯤 선고받을 만큼 죄질이 나빴다.

    게임이니 괜찮다고?

    맞다.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내가 평생 감당할 수 있을까?

    절대로 무리.

    나중에 내 자식이 인터넷에 떠도는 아버지의 병신 같은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진정해라. 똑똑한 황녀님이 잘 수습하고 있으니. 너에게 게임 계정이 없다는 사실이 주효했지.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영상들도 여러 기관의 협조를 받아서 빠르게 삭제 중이다.)

    “후우...”

    똑같은 병신이었던 아버지와 나의 차이는 단 하나.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었는가.

    고작 그뿐이었다.

    (네 여자친구에게 진짜로 게임 중인지 묻는 통화가 한 번 오긴 했지만, 아니라고 잘 둘러댔다.)

    선영이가...

    (정부를 포함한 협력 기관에 연락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조금 전에 기자회견도 했다. 강문수가 신성로마제국에 귀빈으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긴 했지만, 네가 접속기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인지시켜주면서 음모론마저 사라졌다.)

    뒤처리는 완벽!

    나 때문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전화해서 친한 척하고, 귀찮은 기자회견까지 한 선배에게도 빚을 졌다.

    (선신이다.)

    네! 중원을 피로 물들였어도 선배님은 선한 신이 틀림없습니다!

    망가질 뻔한 내 인생을 수습해줬으니까. 강문수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절망적인 경험이었다.

    (답답한 애송이를 구해줬다고 선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만... 아무튼, 마녀들은 걱정하지 마라. 빚은 내가 청산해놨다.)

    어떻게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지금은 모르는 편이 낫다.)

    네.

    최면술로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마녀들에게 부족한 게 있을까? 선배가 뭐로 어떻게 빚을 갚았다는 건지 솔직히 궁금했다.

    (소중한 네 통장은 건드리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어흠!”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슬슬 끝이 보이는군.)

    “끝...”

    나는 자아 성찰을 하며 업적을 야무지게 모으고 있었다.

    [그릇을 10000개 닦았습니다.]

    [소포를 1000개 배달했습니다.]

    [심부름을 100회 했습니다.]

    [쥐를 10000마리 잡았습니다.]

    ......

    P의 적성검사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일거리만 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덥석 맡았었는데.

    무당이 된 뒤부터 조금씩 오만해지면서 밑을 안 돌아보게 됐다.

    “수고했어요.”

    짤랑!

    아르바이트를 완수한 나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소소한 수고비.

    신성로마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눈치껏 더 얹어줬지만, 그래도 소소하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통장에 찍힌 돈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띠링!

    쭉 무시해왔던 알림음이 이번만큼은 반갑게 들렸다.

    왜?

    [계산대를 100시간 보았다.]

    남은 점수 2만을 채우는 동안 깔끔히 봉인해뒀던 강령술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업적이 추가됐다.

    [칭호] 용왕의 아들(B)

    [레벨] 361

    [직업] 몰랑한 탐욕의 강령술사(6차)

    [업적] 1000002

    [적성] 제사장

    업적 점수 98만을 채우는데 걸린 시간보다 2만이 더 오래 걸려서 조금 어이없긴 했다.

    그래서 7차 전직은?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씩 나열되기 시작했다.

    [강탈자]

    [위선자]

    [탐구자]

    “...끝?”

    단 3가지뿐이었다.

    [강탈자]

    직접 죽인 대상의 업적과 레벨을 무작위로 빼앗는다. 업적이 중복되고 레벨이 낮을수록 효율이 떨어진다.

    남을 짓밟아서 내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능력! 악인의 길을 걸어가는 이용자에게 적합한 직업이었다.

    (너에게 어울리는군.)

    농담이시죠?

    (농담처럼 들리냐?)

    “......”

    다음 선택지를 살펴봤다.

    [위선자]

    레벨을 제물로 6차 전직 미만의 존재를 급성 심장마비로 죽인다. 이용자는 아바타를 영구적으로 잃는다.

    “와우?”

    능력이 무시무시했다.

    (자신을 욕하는 자들의 입을 영원히 막아버리는 건가? 위선자란 표현에 딱 어울리는 능력이군.)

    그러게요.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 거슬리는 자들을 제거할 수 있다.

    (답답한 후배야. 이것도 너에게 어울리는 것 같은데? 어떠냐?)

    “끙...”

    솔깃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라누벨라 10세.

    능력이 안 통하는 최상위권 이용자와 7차 전직이 확실한 마녀를 상대로는 강령술사보다 쓸모없었다.

    “다음으로...”

    미련없이 넘어갔다.

    [탐구자]

    습득한 업적 점수에 비례하는 경험치를 획득한다. 업적으로 상승한 레벨은 독립적으로 레벨에 가산된다.

    “호오...”

    게임에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아바타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의 상식 수준이랄까?

    이 규칙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생을 갈아 넣어야만 6차 전직을 달성할 수 있듯이, 700레벨대는 현실을 진즉 포기한 사람들만의 영역!

    편의점을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사장님 같은 사람 중에서도 극소수만 도달했다.

    (너는 그런 사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었구나?)

    “......”

    제가 얼마나 병신인지는 1절부터 4절까지 불렀으니 그만 괴롭히세요.

    (이미 결정한 것 같군.)

    “네.”

    새로운 선택지를 기다리지 않고 7차 전직을 했다.

    * * *

    구시대 롤플레잉게임은 이용자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내가 100레벨이면 100레벨 사냥감을 죽이면 되도록 설계해놨기 때문이다.

    내가 100레벨이니 적도 100레벨!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이건 게임의 근간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설정이다.

    “죽어!”

    “꾸에엑~?!”

    “꾸엑~?!”

    사냥터는 항상 1대1 상황만 있는 게 아니다. 1대2나 1대3 혹은 1대10 같은 위험한 변수도 있기에 게임은 레벨 올리는 노동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100레벨인 내가 100레벨 사냥감 2마리랑 싸워서 이긴다.

    너도 100레벨, 나도 100레벨.

    전투력의 척도인 레벨이 똑같다면 전투력도 똑같기에 1대2 상황에서 절대 이길 수 없어야 맞다. 하지만 이용자들은 똑같은 레벨의 적들에게 포위당해도 절망하지 않는다.

    즉,

    “쉽구먼~”

    “......”

    “......”

    레벨만 똑같고 이용자와 사냥감의 실제 전투력은 다르다는 뜻이다.

    이걸 좋게 포장하면 이용자들을 배려한 눈속임인데...

    레벨은 전투력의 척도.

    성장형 게임의 근간인 레벨의 기본 설정을 무시해야 할 만큼 이용자의 지능을 낮게 본다는 의미다.

    (후배야. 사족이 길구나.)

    네.

    반면,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개발진은 이용자들을 똑똑한 문화시민으로 존중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용자와 사냥감의 레벨이 같으면 전투력도 똑같다!

    너무나 당연한 건데, <몰랑 판타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게임이 이용자를 바보 취급한다.

    “끄앙...!”

    “쉴 틈이 없네!”

    “꾸에엑~?!”

    이용자의 지능을 높이 평가하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는 내가 100레벨이면 100레벨 사냥감이 풍부한 100레벨대 사냥터가 아닌 70레벨대 사냥터를 가야 한다.

    내가 망령 사냥에 특화된 ‘영혼의 사냥꾼’으로 묘지에서 재미를 봤듯이, 레벨의 격차를 줄일 방법은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나보다 레벨대가 낮은 사냥터를 가야 안전하다.

    (후배야...)

    네! 끝나갑니다!

    “이제 좀 게임할 맛이 나네.”

    “......”

    “......”

    현재, 내 주위에는 나보다 레벨이 조금 높은 710레벨 괴물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바스스-

    바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시체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강적에게 100000회 도전했습니다.]

    [강적을 100000회 이겼습니다.]

    [강적을 100000회 죽였습니다.]

    ......

    비슷한 레벨대랑 1대1로 싸우면 50% 확률로 패배하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압도적인 승률!

    나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어서 가능했던 건 절대 아니다.

    [칭호] 도전왕(A)

    [레벨] 698(+114)

    [직업] 탐구자(7차)

    [업적] 1148135

    [적성] 제사장

    “경험치가 엄청나네.”

    나보다 레벨이 낮은 약자일수록 사냥했을 때의 경험치가 적고, 그 반대면 경험치가 많아지는 시스템.

    이걸 모르는 이용자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 없지만, 그렇다고 강적에게 덤비는 이용자는 없다.

    사망률 50% 이상.

    둘 이상이면 100% 사망!

    심지어 사냥 도중에 사망하면 레벨과 장비를 잃는다. 강적을 쓰러트렸을 때의 경험치가 아무리 좋아도 잃는 게 더 많으면 무의미하다.

    (그래서 좋냐?)

    “네!”

    나는 현재 698레벨이지만, 직업 ‘탐구자’의 능력 보정으로 115레벨이 독립적으로 더해졌다.

    즉, 813레벨.

    적성이 비전투계열이라서 레벨 효율이 떨어져도 710레벨 괴물을 이기는데 부담 없다.

    “크앙!”

    “크아앙!”

    비겁하게 협공해도 100레벨이나 높은 나에게는 적당한 사냥감이었다.

    “죽어...!”

    “크아아앙~?!”

    “끼에엥~?!”

    그런데도 경험치와 업적은 나보다 레벨이 높은 ‘강적’을 쓰러트린 것으로 취급해주고 있었다.

    (내가 너였다면 810레벨 괴물을 사냥했을 거다.)

    “킁.”

    인정한다. 나는 싸움을 못 해서 100레벨이나 낮은 사냥감과 사냥터만 전진하는 비겁한 남자다.

    (하핫! 조금은 컸구나.)

    “아, 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과욕은 뒤끝이 좋지 않다는 걸 배웠다.

    아주 뼈에 새겼지!

    편의점 사장님이랑 마주쳤을 때만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어?

    “어?”

    “음?”

    이곳은 710레벨 사냥터.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선택받은 아이(랭커)들만 들어올 수 있는 최상위권 사냥터다.

    내 얼굴을 볼 사람이 없어서 답답한 투구를 잠깐 벗었던 건데...

    “사칭범!”

    “사칭범이잖아!”

    “진정해. 여긴 700레벨대야. 360레벨이 올 곳이 아니라고.”

    “그러면 다른 사칭범인가?”

    “인기인은 힘들구먼.”

    편의점 사장님과 동료들이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랭커들이 자주 이용하는 사냥터라더니 정말이었군.)

    그런 건 일찍 말씀해주세요.

    “너겠군.”

    스르릉-

    편의점 사장님이 적의를 불태우며 나에게 걸어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에 만난 새끼는 너무 약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네가 강문수 선수를, 내 아르바이트생을 사칭한 개새끼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개소리하지 말고 덤벼!”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 칼을 뽑아든 사장님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거참...”

    재차 말하지만, 이 게임은 이용자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레벨을 절대 속이지 않는다.

    나도 움직이고-

    툭.

    “허억?!”

    “지나갈게요.”

    편의점 사장님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트린 후에 도망쳤다.

    제대로 싸웠으면 나의 필승!

    아바타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찍어 눌렀을 것이다.

    (자존감이 조금은 회복됐냐?)

    “...그러게요.”

    싸움에 재능이 없다면 내 방식대로 찍어 누르면 된다.

    나는 무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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