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똥배와 턱살이 사라지고 전반적으로 매우 젊어진 편의점 사장님.
다시 보니 잘생긴 것 같기도?
동네 배불뚝이 아저씨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성형 시스템을 거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으로 탈바꿈했다.
“네놈이 다른 인간을 사칭했다면 모른 척하고 넘어갔을 거다. 어차피 남의 일이니까. 그런데 너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을 건드렸어. 강문수 선수가 누구인지 알아? 내 편의점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어!”
“우오오오!”
“와아아아!”
나의 오랜 밥줄이었던 편의점 사장님만 온 게 아니었다.
세계 편의점 사장 연합 길드.
줄여서 ‘편의점 길드’라고 불리는 세계 4위 길드의 구성원들이 발 디딜 곳 없을 만큼 몰려왔다.
이거 실화냐?
(흠. 후배야. 이번에는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
진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나를 돕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게 생겼다니?
비록, 나에게 적의를 보이지만, 그 이유가 저들의 ‘호의’에서 비롯됐음을 잘 알기에 죽일 수도 없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도망치고 싶어도 포위망이 너무 두꺼워서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였다.
“죽기 전에 할 말은?”
“흠...”
아끼던 자신의 아르바이트생에게 유언을 묻는 편의점 사장님에게 뭐라고 답해야 하지?
내가 진짜 강문수라고 인정하는 전개만은 죽어도 안 된다.
“할 말이 없으면 죽어야지. 하지만 협공해서 죽으면 편의점 길드의 이름이 울지. 덤벼라.”
“1대1입니까?”
“그렇다.”
“제가 이기면 보내주십시오.”
“허! 치졸한 놈. 죽을 것 같으니 태도가 정중해졌군.”
“......”
제가 돈 앞에서 치졸한 건 편의점 사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떠도는 동영상을 보니 제법 싸우는 것 같다만...”
팟!
사장님이 황소처럼 일직선으로 돌격해왔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귀국하면 편의점에 찾아가서 소고기 꽃등심으로 사드릴게요.
태권도 뒤돌려차기는 봉인.
그거야말로 ‘태권도 금메달 강문수’라고 광고하는 꼴이기에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왜요?
(곧 알게 될 거다.)
팟!
정직하게 돌진하던 사장님의 발걸음이 갑자기 몇 배로 빨라졌다.
“헉!”
헛바람을 들이켜며 맞대응-
“건방져.”
“컥...?!”
움직임이 완전히 읽힌 내 복부에 사장님의 무릎이 꽂혔다.
파앙!
허리가 새우처럼 접힌 나는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큭!”
볼썽사납게 구르기 전에 균형을 잡고 일어섰지만, 그런 내 코앞에 사장님의 주먹이 보였다.
빠각-!
영혼까지 울리는 기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죽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해라.)
“......”
(왼발을 축으로 몸을 시계 방향으로 살짝 틀면서 칼을 뽑아라. 칼은 9시에서 5시 방향으로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휘둘러라. 속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그것까지 계산했으니.)
머리를 비우고 선배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탁!
왼발을 축으로 몸을 틀었다.
“호오?”
나에게 거리를 주지 않고 바짝 붙은 편의점 사장님의 팔꿈치가 내 턱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화르륵!
하지만 게임답게 불꽃으로 휘감긴 팔은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내 얼굴에 화상을 입혔다.
“큭!”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스르릉-
칼을 뽑아서 선배가 말한 방향으로 휘둘렀다.
“흐읍?!”
사장님은 빠르게 회피하며 거리를 또 좁히려고 했지만,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포물선을 그리며 선회한 내 칼을 보고는 혀를 차면서 발을 뺐다.
(반응이 좋군.)
그런 편의점 사장님을 선배가 순수하게 칭찬했다.
“크윽!”
아직도 뇌진탕이 온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사칭범 주제에 칼은 좀 쓰네.”
“......”
내가 아니다. 나는 선배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
당연히 기쁘지 않았다.
“약자를 괴롭히는 기분이라서 찜찜했는데, 검술이 특기였나? 잘 됐어.”
스르릉-
편의점 사장님이 허리에 찬 3자루의 장검 중 하나를 뽑았다.
“.......”
어깨의 힘을 뺀 편안한 자세로 칼끝을 나에게 겨눈 그를 보자마자 숨이 탁탁 막혔다.
(검술이 특기군.)
그럴 겁니다. 편의점에서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에 사장님이 종종 자랑하셨으니까. 자기가 칼로 어제 무언가를 벴다고.
그리고 그 무언가에 ‘강문수’가 추가되게 생겼다!
(말이라도 걸면서 시간을 끌어라. 황녀가 방법을 찾는 중이다.)
제가 이기면...
(후배야. 잠꼬대할 때가 아니다. 눈을 뜨고 현실을 봐라.)
“......”
내가 라누벨 환자들에게 하던 말을 역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온다.)
“시작은 가볍게~”
장난스럽게 말한 사장님이 칼을 휘둘렀다.
챙-!
반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너무 빨라서 막는 것조차 버거웠으니까.
챙! 챙! 챙! 챙...!
단 한 번이라도 허용하면 내 몸이 깔끔히 절단될 공격을 후퇴하며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큭!”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배불뚝이 아저씨가 맞나?!
(칼 좀 쓰는군. 재능은 화산파 장문인보다 살짝 못한 수준인가? 체계적으로 못 배운 탓일지도.)
편의점 사장님인데요?!
(적성을 물어본 적 있나?)
어... 아뇨.
(편의점은 돈벌이 수단일 뿐, 이 사내의 적성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아니면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현실에서는 재능이 묻혔던가.)
“흐음?”
쭉-
공격을 몰아붙이던 편의점 사장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푸하-!”
그동안 숨도 못 쉬고 막기만 했던 나는 참았던 공기를 내뱉었다.
“너, 레벨이 몇이지?”
“360입니다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대화에 응했다.
“내 예상보다는 높군. 250레벨쯤 할 줄 알았는데. 적성이 비전투계열이라서 근력이 그 모양인 건가.”
“......”
비전투계열.
제사장의 설명만 보더라도 전투에 특화된 적성이 아닌 건 확실했다.
(전문가로군.)
매일 15시간씩 <몰랑 판타지>에서 사시는 분이니까요.
“이상하군. 소문이 과장된 건가? 약해도 너무 약한데... 잔챙이 하나 포위하려고 길드원들만 귀찮게 했군.”
“......”
편의점 사장님이 내 자존심을 밑바닥까지 긁어냈다.
“형님.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하하! 신경 쓰지 마, 길동 아우.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오랜만에 길드원이 절반 이상 모였다는 것에 의미를 둡시다.”
“모인 김에 용이라도 한 마리 잡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 나는 안중에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애송이 취급이랄까.
(그게 현실이지.)
“......”
(너는 전사가 아니다. 배불뚝이 아저씨보다도 약한 무당이지.)
“으아...”
가슴이 쓰라렸다.
(정체를 감춘 신성로마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이 곧 도착한다.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라는군.)
콰광-!
쾅! 퍼엉!
선배의 충고가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불의 비가 쏟아졌다.
“습격이다~!”
“누가 감히 편의점을...!”
“소속을 밝혀라!”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나를 포위하고 있던 편의점 길드는 불의 비를 피하고자 산개했다.
그때,
“아군입니다.”
덥석!
아군이라고 속삭인 누군가가 내 허리를 낚아채더니 수직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끼에에에!”
그리고 타이밍 좋게 날아온 거대한 새의 등에 올라탔다.
(다행히 안 늦었군.)
그러게요.
나를 구해준 남자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구출에 성공했다. 죽거나 들키지 말고 탈출하도록.”
탈출 시스템을 말하는 것 같다.
“저... 감사합니다.”
죽었으면 올림픽 기사도의 행방도 불투명해지지만, 내가 강령술사를 선택한 탓에 희생된 이용자와 원주민(NPC)들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하하! 너무 풀 죽지 마십시오. 최근에 접속이 뜸해져서 순위가 떨어지긴 했지만, 편의점 길드의 수장 장길동은 랭킹 9위의 강자입니다. 상대가 안 되는 게 당연합니다.”
“많이 밀려났네요.”
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뒤부터 순위가 조금씩 떨어진 것 같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일을 똑바로 못 하는 걸까?
(네가 일은 정직하게 잘했지.)
감사요.
“안전한 은신처에서 황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미 다 알고 오신 것 같네요.”
“본업이 본업인지라...”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기사도 국가대표입니다.”
“아!”
남자가 조종하는 새의 고도를 낮추며 씨익 웃었다.
“올림픽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네.”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 * *
“황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마녀를 돕고 있기에 지원받는 건 당연하지만,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내가 똥을 너무 쌌다.
“아뇨. 괜찮습니다. 당신이 강령술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했을 때, 망령의 성향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저희 잘못도 있으니까요.”
“후우...”
나는 라누벨라 13세가 기다리는 숲속의 오두막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제법 힘들었던 모양이네요.”
“네. 죽고 싶을 만큼.”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에서도 SSS급 괴물,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를 얻기 전까지 좌절하고 고생하긴 했었다. 하지만 거긴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 꿈이란 안전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여긴 어떤가?
가상현실게임의 세계이긴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랑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좋은 경험 했지.)
너무 좋아서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마음을 잊지 마라.)
네.
“강문수 씨. 큰 희생을 치른 만큼 악인이 아니면 얻기 힘든 업적을 다수 확보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맞습니다.”
[왕족을 1000명 강간했습니다.]
[소녀를 1000명 죽였습니다.]
[여성을 10000명 고문했습니다.]
[동료를 100번 배신했습니다.]
......
달성한 자릿수를 보고 깜짝 놀란 업적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저처럼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7차 전직이 매우 힘드니까요. 제사장의 업적 가산점이 있어도 7차 전직은 조건이 너무 어렵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 인생을 갈아 넣은 사람만 달성할 수 있는 6차 전직을 10번 할 수 있는 업적이 필요하니까.
이론상으로는 7차, 8차, 9차 전직도 가능하지만, 인간이 생전에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7차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어디 보자... 2만 정도 남았네요.”
“2만...?”
“네.”
“20만을 잘못 들은 게 아니죠?”
“아닙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장로님이 당신에게 이 일을 맡긴 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칭찬입니까?”
나는 탁월한 희생양이었다. 전부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칭찬입니다. 라누벨라가 포기한 일을 당신이 해냈으니까요. 이건 자부심을 품어도 됩니다.”
“아, 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당신이 쌓은 업적이 아니라서 그 위의 단계로 올리기 힘들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내가 육체를 빌려준 대가로 망령들의 업적을 가져오긴 했지만, 거기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은 별개다.
예를 들어,
[영웅을 10명 죽였습니다.]
내가 이 업적의 다음 단계를 달성하려면 영웅을 ‘90명’이 아닌 ‘100명’을 죽여야 한다. 영웅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대부분 업적이 이런 식이다.
“더 악랄한 망령에게 육체를 빌려준다면 또 모를까...”
“싫습니다.”
당할 만큼 당했다.
“그러면 남은 2만을 채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흠...”
업적 점수 2만이 적은 것 같아도 5차 전직을 두 번 할 수 있는 양이다.
(답답한 후배야.)
네.
(편의점 사장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드냐?)
제가 싸움에 소질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반대로 잘하는 건?)
“......”
슬프게도 없는 것 같다.
(이 답답한 놈아! 그래서 네가 답답한 인생을 못 벗어나는 거다!)
“으으...”
선배님. 오늘은 그만 때리세요. 이 후배가 너무 힘듭니다.
(잘 들어라.)
네.
(네가 몸을 빌려준 망령 중에서 장사한 놈이 있었냐?)
“아!”
없었다. 성향의 차이가 조금씩 있긴 했지만, 사냥터의 우두머리답게 전투에 특화된 망령뿐이었다.
“강문수 씨. 방법이 떠올랐나요?”
“네.”
“그다지 믿음이 안 가지만,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아르바이트요.”
내가 가장 오랫동안 몸을 담근 아르바이트는 편의점이지만, 조금씩 안 해본 일이 없다.
“...나쁘지 않네요. 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에게 당신의 일자리를 부탁해보겠습니다.”
“감사요.”
몸풀기로 식당에 들어가서 설거지부터 시작해볼까?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