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70화 (171/232)

170화

[9장-4절] 쳐부숴 주마!

“소운현 신도님. 당신이란 존재는 기적이란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군요.”

“기적이라... 신(神)에게 기적이란 표현은 매우 무례하군.”

“어머! 여긴 신성로마제국입니다. 다른 신은 믿지 않아요.”

마녀 라누벨라 7세는 강문수의 몸을 빌린 ‘혈신 소운현’을 무척 흥미롭게 관찰했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악(惡)의 화신.

조사는 진즉 마쳤지만, 직접 만나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섭리에 따른 결과를 기적으로 치부하지 말란 의미였다. 그건 신념이 아닌 횡포다.”

그리고 위험했다.

“정론으로 혼나보는 건 추기경이 된 이래로 처음이군요.”

“실망하지 않도록 미리 말해두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송이들을 속이는 버릇을 나에게 똑같이 하면 앞으로도 재미를 못 볼 거다.”

“이건 버릇이 아니라 마녀의 습성입니다.”

“세상을 우습게 보다가 탄압당한 역사를 잊은 건가?”

“어머! 마녀가 어디 있죠? 여기에는 신실한 추기경과 무례한 신도만 있을 뿐이랍니다.”

섬뜩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대화가 거침없이 이어진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게 가능한가?

혈신 소운현.

꿈의 설정으로 태어난 신(神).

하지만 모든 신이 그처럼 꿈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나 배웠군요.’

라누벨라 7세는 이 나이에 배울 게 아직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홍차... 차를 마실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마음에 드는군. 녹차를 발효해서 설탕을 첨가하면 이런 맛이... 색목인들이 아편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환장한 이유를 알겠어.”

“그 지식은 강문수 신도님에게 얻은 건가요?”

“그 녀석은 홍차에 관심 없다. 편의점에서 파는 홍차 가격은 알아도.”

“그러면...?”

“마오짜이.”

“예?”

“빼앗았지.”

“......”

홍차를 홀짝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타인의 영혼에 간섭해서 기억과 지식을 빼앗는 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현실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신(神)이라면?

“어째서 그런 눈으로 보지?”

“이상해서요. 당신 정도면 육체를 빼앗는 것도 간단하지 않나요?”

“믿어주는 사람을 속이는 건 귀신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굳이 분류하면 선신(善神)이지.”

“당신이요?”

선한 신이라고? 그 뻔뻔한 태도가 너무 어이없어서...

“세계관 설정을 맹신하는군. 입으로는 꿈이라고 하면서.”

“......”

당했다!

“나도 하나를 알려주는 게 강호의 도리겠지. 라누벨라 10세. 지금부터 대책을 안 세우면 틀림없이 죽는다.”

“헛소리.”

바로 부정했다. 그녀는 ‘라누벨라’의 이름을 계승한 마녀니까.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것보다 힘든 일.

있을 수 없다.

“이 녀석이 까불어도 눈감아줄 때부터 마녀가 적다고 예상했었는데. 아직 한둘 정도 더 죽어도 괜찮은 건가.”

“소운현 신도님...”

“오해라면 실례했다. 신이 부끄럽게 실수라니. 하핫!”

“......”

인간은 쉽게 죽는다. 하지만 절대 죽이면 안 되는 인간도 있다.

“홍차는 잘 마셨다. 나중에 싸주면 고맙겠군. 이 녀석은 안 마셔도 나는 인간이었을 때부터 차를 즐겼으니까.”

강문수가 꿈속에 있는 동안만 몸을 빌리는 혈신 소운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없었다.

홍차를 잘 마셨다.

‘당장 필요한 정보는 전부 얻었다는 의미겠지.’

홍차를 싸달라.

‘이건 늦기 전에 결정하라는 재촉쯤 되려나?’

강문수는 안 마신다.

‘강문수는 우리의 이야기를 못 들으니 안심하라는 건데...’

인간이었을 때부터.

‘그건 빈틈을 안 보이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 대화하겠다는 얘기.’

양보였다.

다소 굴욕적이긴 하지만, 상대가 몸이 아닌 머리를 쓰는 신(神)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적인 면이 있으셨군요? 원하시면 싸드리겠습니다.”

“오! 고맙군. 답답한 녀석을 돌보려면 입이 자주 바짝 마르거든.”

“고생이 많으시네요.”

“솔직히 힘들다. 부모 없는 녀석을 돌보려니.”

“다시 생길지도 모르죠. 새로운 가족도 함께.”

“새로운 가족이라... 그건 홍차로 부족해.”

“평범한 홍차가 아닌데도요?”

“제국의 황족만 마시는 진귀한 홍차라도 마실 줄 모르면 학교 앞에서 파는 냉커피만도 못하다. 사람은 익숙한 맛을 선호하니까.”

“그건... 그렇죠.”

단 한 번의 말실수로 주도권이 혈신 소운현에게 넘어갔다.

바보처럼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프로메시아 콘스탄틴 추기경’이 취할 태도는 아니었지만, 상대를 신(神)으로 인정한 사실을 들킨 시점부터 완전히 말려들고 말았다.

“큭! 이 녀석... 입으로만 존경한다고 하고 배려를 전혀 안 하는군.”

대화 내내 여유를 잃지 않았던 소운현이 이마를 찡그렸다.

“불편하지 않나요?”

이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신의 반열에 오를 준비가 되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다. 선신은 중생들의 평판으로 결정되지 않아. 중생들을 이유도 없이 가축처럼 도살해도 전혀 영향을 안 받지.”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관심 없는 척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직함. 그 하나면 된다.”

“과연...”

종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신(神)은 인간을 시험하긴 해도 구차하게 거짓말하거나 속이진 않는다.

심판, 구원, 경고, 예언...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은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반드시 지킨다.

“거센 반발 때문에 중원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말을 지키진 못했지만, 피로 물들이기 위해 내 영혼까지 갈아 넣었다. 선신의 자격으로 충분하지.”

“재미있네요.”

선대 라누벨라가 들려주는 모든 지식이 신기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그나저나... 안 바쁜가? 나랑 이렇게 홍차만 마셔도?”

“어머! 모르셨군요. 추기경 중에서 제가 가장 한가하답니다.”

“신(神)을 위한 직장이군.”

“일해보실래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P라는 신(神)이 이미 있는 신성로마제국은 인간적으로 생각해봐도 안 돼.”

“아쉽네요.”

강문수가 이 땅에서 살도록 설득해줄 수 없다는 얘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그 녀석은 나랑 다를 수 있지.”

“홍차를 안 마신다면서요?”

“중원보다 큰 이 나라에 홍차만 있는 건 아니잖은가?”

“예를 들자면?”

그녀가 자연스럽게 운을 띄우자 소운현이 툭 던지듯 말했다.

“주인공.”

“예?”

“아니면 P라고 부를까?”

“......”

초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 * *

“하하하! 그래! 바로 이거야! 이 짜릿함! 이걸 원했다고...!”

[영웅을 10명 죽였습니다.]

[함정을 10000번 해제했습니다.]

[왕족을 1000명 강간했습니다.]

[미궁을 100회 정복했습니다.]

......

동료의 배신으로 생전에 정복하지 못하고 갇혀버린 미궁.

긴 세월이 흐르면서 배신자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이 망령의 소망은 복수가 아닌 도전이었다.

만족하셨나요?

“오! 아직이지. 지금부터 디저트를 맛봐야지.”

“히익?!”

친구들이랑 미궁에 왔다가 봉변을 당한 이용자가 사색이 됐다.

잘생긴 남자친구는 사망!

남자친구의 남자친구A도 사망!

남자친구의 남자친구B도 사망!

그녀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성형 시스템으로 예뻐진 덕분이랄까.

망령의 마음에 들었다.

“살려주세요! 돈이라면 드릴게요! 장비도요!”

이용자는 죽어도 가장 가까운 신전에서 되살아나지만, 소유한 물품과 레벨은 그렇지 않다.

물론, 소중한 물품과 레벨을 보호하는 ‘방범 시스템’이 있지만, 현실의 돈이 필요하다. 물품의 질이 좋고 레벨이 높을수록 더욱 많은 돈이...

그래서 편의점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이 제한적인 서민은 300레벨 전후로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건 당연하고.”

“히익?!”

현실의 생활비를 줄이고 게임의 아바타에 투자한다. 강해져서 안 죽으면 방범 시스템도 필요 없잖아?

...라는 논리인데, 투자해도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레벨의 강자에게 걸리면 어쩔 도리가 없다.

“흐흐. 오랜만에-”

뿅!

그러나 사라졌다.

“...빌어먹을.”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탈출 시스템.

생매장되거나 건물이 무너져서 갇혔을 때, 가까운 도시의 신전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

재사용 대기시간은 꼬박 하루!

레벨은 지킬 수 있지만, 속옷만 남기고 모든 물품을 떨어트리기에 남용할 수 없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래도... 흐흐.”

내 몸을 빼앗은 망령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납치해서 동료(노예)로 활용하는 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짐승 같은 놈.”

“마음대로 지껄여라.”

각종 시스템으로 보호받는 이용자랑 달리, 게임의 주민은 위기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내 육체를 빼앗은 망령이 반윤리적인 짓을 해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이건 몰랐지.’

황녀가 강령술사의 효율성을 듣고도 깔끔하게 포기한 이유.

망령은 내 몸으로 여러 미궁을 정복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자친구 송선영이 절대 알면 안 되는 만행을 끊임없이 저질렀다.

“반드시 복수할...”

“그건 곤란합니다. 제가 한 짓이 아니거든요.”

“뻔뻔한 놈! 내 몸에 한 짓을...”

“그 망령은 퇴치됐습니다. 당신이 안 믿어도 바뀔 건 없지만.”

“무슨...?”

업적을 상당히 잃고 약해진 망령을 추방한 나는 양아치처럼 불량한 복장부터 바꿨다.

솔직히 반성하자.

적성과 직업으로 쉽게 성장할 생각뿐인 나에게 내려진 철퇴였다.

(한심한 후배야. 살인, 방화, 강간, 납치, 절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은 골고루 다 저질렀구나.)

“끙...”

망령이 마음껏 날뛰기 전에 대단한 선배님께서 퇴치해주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너의 최근 행적을 돌아봐라. 적성으로 쉽게 돈을 벌려다가 고속도로에서 여자친구를 죽일 뻔했지. 그 일을 계기로 네가 바뀌었던가?)

“......”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은 실수와 잘못을 무사히 넘기면 싹 잊어버리지. 그래서 그냥 놔뒀다. 인터넷에 박제된 너의 악행을 볼 때마다 반성하고 자중해라.)

“으아아...”

선배는 악마다! 악신이다!

(어허! 후배야. 아무리 공황장애가 왔어도 선은 넘지 마라. 나는 엄연한 선신이다.)

“죽고 싶다...”

강령술사는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리는 쓰레기 직업이다.

(그렇다고 자살하진 마라.)

“......”

내 인생은 끝났다.

(이번만큼은 네가 올림픽 스타라는 것에 감사해라.)

왜요?

(황녀가 벌써 손을 쓰고 있다. 너 때문에 스포츠토토에서 큰돈을 잃고 앙심을 품은 누군가의 음해라는 여론을 퍼트리는 중이다.)

“아...”

(올림픽 국가대표 강문수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아바타는커녕 계정조차 없는 게 사실이고. 너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건 현상금을 노린 추적자들이 따라붙긴 하겠지만.)

“살았다?”

절망적인 지옥에서 현세로 간신히 돌아온 기분!

그러나 망령에게 내 육체를 또 빌려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젠 레벨을 올릴 단계지.)

“뭐...”

유령 요정왕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다양한 성향의 망령을 거치면서 업적만 지나치게 빨아들였다.

[칭호] 용왕의 아들(B)

[레벨] 360

[직업] 몰랑한 탐욕의 강령술사(6차)

[업적] 973017

[적성] 제사장

내 육체를 빼앗은 망령들이 이용자와 괴물들을 처치하며 레벨을 제법 올려주긴 했지만, 사냥이라고 표현할 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보이면 잡는 정도?

6차 전직을 마친 편의점 사장님이 634레벨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균형이 너무 안 맞았다.

“선배님.”

(조금만 기다려라. 황녀가 네 똥을 치운다고 바쁘다.)

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이 미궁을 빠져나가라면 시간이 제법 걸리니까.

“같이 가실래요?”

“......”

“싫으면 말고요.”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미녀를 놔두고 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랑인 강문수 선수를 사칭한 개새끼는 당장 나와라!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다!”

“......”

설마...?

“세계 랭킹 4위 편의점 길드의 수장 장길동이 네놈을 쳐부숴 주마!”

“실화냐...”

매우 젊은 버전의 편의점 사장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