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원수 같은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낸 유령 요정왕은 요정들의 나라에서 인간들의 나라로 곧바로 이동했다.
“짐이 그토록 말렸건만...!”
탈것 중에서도 빠른 편에 속하는 유니콘을 타고, 딸이 보건교사로 일하는 왕국의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 분노보다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급기야,
“짐의 잘못이지. 네 말이 옳다. 딸을 너무 예뻐하기만 하면서 키운 짐의 잘못이지...”
자책하기에 이르렀다.
“이따가 한 잔 어때?”
“안 돼. 오늘은 딸의 생일이라...”
“어이쿠! 그러면 가야지.”
“미안. 내일 보자고.”
휙-
왕자가 사는 별궁을 철통같이 지키는 경비병들의 눈을 가볍게 피해서, 하녀들의 숙소부터 확인했다.
“없군.”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 여성용 속옷들은 그 아이의 몸에 안 맞는다.”
아하!
단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하녀들이랑 숙소를 같이 안 쓴다면 대우가 생각보다 좋은 건가...?”
그 반대일 수도 있고요.
“...짐의 앞에 있었다면 그 가벼운 주둥이를 찢어버렸을 텐데.”
유감이네요.
“그나저나... 오래도 버티는군.”
저요?
“슬슬 이 몸에서 사라질 때가 된 것 같은데... 육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지도 않고 차분하군.”
아직은 살 만해서요.
“흥!”
코웃음 친 유령 요정왕이 대범하게 별궁 안쪽의 저택에 잠입했다.
주방, 식당, 욕탕, 온실...
방마다 방음이 잘 되어있지만, 그건 일반인에게만 통한다. 유령 요정왕 정도면 두꺼운 벽도 뚫고 내부를 도청할 수 있다.
“왕자님...!”
“......”
바로 이렇게.
딸의 신음에 유령 요정왕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 * *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도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교리가 달라도 창세신화만은 똑같다.
「몰랑께서 몰랑으로 창조한 몰랑한 세계에서 몰랑이라고 말씀하시니 생명이 잉태되었다.」
그래서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는 크게 2종류의 원주민(NPC)이 살고 있다.
자연과 몰랑.
수컷과 암컷의 짝짓기로 태어난 평범한 생물과 ‘몰랑’이란 신(神)이 무작위로 창조한 괴물.
이용자들이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부류는 무한정 공급되는 후자라고 볼 수 있다.
“왕자님이 화살에 맞으셨다!”
“암살자를 찾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왕자의 죽음을 뒤늦게 눈치챈 별궁이 시끄러웠다.
평범한 생명은 한 번 죽으면 끝.
고귀한 혈통이나 요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허! 내 딸의 죽음은 거론조차 안 되는군.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어도 이렇진 않을 텐데.”
바로 난입해서 자기소개는커녕 말도 섞지 않고 왕자와 딸을 죽이고 탈주한 유령 요정왕.
사랑을 위해 가족과 동족을 배신한 딸이 사랑조차 잃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
[나라를 1000년 통치했다.]
[외교를 10000번 성공했다.]
[정령이랑 교감했다.]
......
도와준 대가로 업적을 쓸어 담은 나로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제...”
스윽-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유령 요정왕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인간의 짧은 수명 동안이라도 동족을 위해... 잘 가세요, 아저씨! 멀리 안 나갈게요!”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나는 육체를 되찾아왔다.
그 원동력은?
[탐욕의 강령술사(5차)]
망령에게 육체를 빌려주고 업적을 받는다. 영혼의 업적이 너무 많으면 아바타를 영구적으로 잃는다.
“완벽해.”
적성 ‘제사장’이랑 이중으로 업적을 뜯어내는 완벽한 고리대금업자!
나의 반격을 짐작조차 못 한 유령 요정왕은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내 육체에서 추방됐다.
(재미있군.)
오! 존경하는 선배님! 어째서 말씀이 없으셨나요?
(너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다른 새끼까지 끼어들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하!
(무엇보다도... 내가 끼어들면 망령이 짓눌려서 소멸한다.)
음? 이게 무슨 말?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혈신이다. 신(神)이지. 사춘기 자식의 반란으로 죽은 왕 따위는 나랑 눈만 마주쳐도 영혼이 바스러지지.)
허풍은 아니죠?
(못 믿겠으면 시험해봐도 좋다.)
“헤에~”
내가 5차 전직을 못 했어도 육체를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안 끼어들고 기다린 보람이 있군.)
맞습니다!
[칭호] 용왕의 아들(B)
[레벨] 168
[직업] 탐욕의 강령술사(5차)
[업적] 24096
[적성] 제사장
“이제...”
(황녀를 불러주마.)
나에게 업적을 제공해줄 새로운 망령을 만나러 가자!
* * *
“...뭘 하면 며칠 만에 5차 전직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게요!”
“없는 시간을 쪼개면서 꾸준히 게임한 저도 아직 5차인데.”
“쉬웠으면 저를 불렀을 리 없죠.”
“......”
마녀 라누벨라 13세가 얼마 전에 접속을 종료하며 나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그랬더니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짓네?
꼴 좋다.
(제국의 황녀를 도발해서 너에게 무슨 득이 있는지 모르겠군.)
“.....”
선배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도 불편해졌다.
“강문수 씨. 어떻게 한 건지 가르쳐줄 수 있나요?”
“정보 교환이라면.”
“...좋아요. 뭐가 궁금한가요?”
흑룡을 호출한 마녀가 나에게 먼저 질문할 기회를 줬다.
“내 질문은...”
선배님?
(검귀의 정체를 물어봐라. 7세는 노련하게 질문을 회피하더군.)
“검귀의 정체가 뭔가요?”
“사람입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황녀는 머릿속으로 정리하듯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창세신화를 아시나요?”
“네. 압니다. 몰랑해서 어쨌다고...”
진지하게 읽어봐도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몰랑께서 몰랑으로 창조한 몰랑한 세계에서 몰랑이라고 말씀하시니 생명이 잉태되었다.”
“네. 그거요.”
“암수가 교배하는 방식이 아니란 건 이해했나요?”
“창조론은 압니다.”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하루 평균 접속자는 약 6억. 그들이 경험치와 업적을 목적으로 사냥하는 생명은 100억이 넘어요.”
“엄청나네요.”
“박테리아도 아니고, 인간처럼 성장에 오래 걸리는 생물이 매일 100억씩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며칠 안에 생태계가 붕괴하고, 결국에는 인간들끼리 사냥하다가 멸종하겠죠.”
“흠...”
감탄만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신의 창조로 꾸준히 공급되는 사냥감 덕분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했나요?”
“네.”
(아아, 그런 거였나.)
선배님은 벌써 모든 걸 이해한 눈치였다.
뭔데요?
(일일이 묻지 말고 황녀의 설명을 계속 들어라.)
아, 네.
“검귀도 똑같아요.”
“음? 검귀가 사냥감이라고요?”
“...이렇게까지 설명해줘도 못 알아듣는 당신에게 경의를.”
(꿈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아하!
“농담이었습니다. 꿈을 유지하려면 꼭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당신의 현명한 선배가 슬쩍 가르쳐준 모양이군요.”
“......”
반박하지 못했다.
“검귀가 모여서 꿈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용한 사람은 새로운 검귀가 됩니다.”
“아...”
원리가 이해됐다.
(우리가 가졌던 의문. 꿈에 작품의 원작자도 모르는 세계관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이유다.)
“제가 강문수 씨의 행동을 싫어했던 이유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꿈만 즐기고 탈주하도록 돕습니다. 엄연한 무전취식이고 범죄입니다.”
“......”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영웅 행세할 때마다 정말 거북했습니다.”
“...그토록 거북했다면 어째서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질문 끝.”
“어?”
“이제 제 차례입니다.”
“끙...”
나는 약속대로 강령술사에 대해 말해줬다.
* * *
“그런 방법이... 저는 쓸 수 없어서 아쉽군요.”
황녀는 무척 아쉬워했다.
“이미 5차 전직을 해서요?”
“아뇨.”
“그러면 왜요?”
“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녀입니다. 망령이 제 몸으로 이상한 짓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길거리에서 갑자기 옷을 홀딱 벗는다거나?”
“...황족모독죄로 외국에서 죽고 싶으신가요?”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생명의 위기를 느낀 나는 송선영에게 했던 것처럼 싹싹 빌었다.
“흥! 됐어요.”
“감사합니다!”
“무례한 언사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길거리에서 옷을 벗어도 괜찮은 마녀는 없어요.”
“저도 안 괜찮은데요...”
“당신은 남자라서 자살할 만큼은 아니잖아요?”
“성차별과 편견은 나쁜 겁니다. 제가 얼마나 섬세한 남자인데요.”
“그러면 자살할 거예요?”
“아뇨.”
삼각형 수영복 한 장만 입은 내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널렸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조금 더’ 보여줬다고 인생을 포기할 리가 있나.
“이 방법은 알아도 당신밖에 못 쓰겠네요.”
“아까부터 마녀만 언급하는데... 남자는 없습니까?”
“없어요.”
“황자님이 있잖아요? 아! 황족이라서 알몸은 곤란하려나.”
마녀가 매우 불편하다는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마녀가 낳은 아이가 적성을 이어받을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이마저도 대부분 여아(女兒)고요.”
“아하!”
“당신은... 아니요. 됐어요.”
“뭔데요?”
말끝을 흐리거나 말하다가 마는 사람이 제일 싫다.
“강문수 씨. 무당이란 적성을 받은 뒤부터 인생이 너무 쉽게 풀렸다고 느낀 적이 없나요?”
“소설의 주인공처럼?”
“네.”
“적성 덕분이란 자각은 있습니다.”
내 주제쯤은 잘 안다.
“사람은 쉽게 죽어요. 당신이 태권도 금메달이고 총알을 피하는 재주가 있더라도 수류탄과 독가스에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렇겠죠.”
“재벌들은 정보력이 뛰어나서 스포츠토토로 돈을 크게 잃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어떤 선수가 유력한지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 때문에 엉망이 됐죠.”
“아...”
“한두 종목이 아니에요. 축구는 건드리지 않아서 남아메리카 쪽은 얌전한 편이지만,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재벌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아요. 부조리하게 들리나요? 고작 스포츠라서?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 당신은 고작 스포츠 선수예요. 돈 좀 써서 죽여도 뒤탈이 없는 서민이죠.”
“......”
이것이 사회의 이면이란 걸까? 섬뜩하게 들렸다.
“최근에 한 번 놓치긴 했지만, 여자친구와 당신이 여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정부의 노력 덕분이라고 보시나요?”
“...아닙니까?”
“당신은 모르고 한 행동이겠지만, 신성로마제국 황녀에게 막말하고 업무를 방해하고도 무사한 이유는?”
“......”
들을수록 이상했다.
“강문수 씨.”
“...왜요?”
“환자들에게 꿈에서 깨어나라고 설득할 시간에 당신이야말로 현실에서 눈을 뜨세요.”
“......”
“마녀는 사람들이 꿈속에서 행복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현실에서 도움을 받고 있죠.”
현기증이 났다.
내 인생이 남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는 말에.
(신경 쓰지 마라. 저 논리면 모든 인간은 소속된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다.)
“후우...”
냉정해져라, 강문수.
선배의 한마디에 울렁거렸던 속이 조금은 진정됐다.
(흔들리지 말고 어깨 펴라. 마녀의 말장난에 또 속을 거냐?)
아!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너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 도와줄 뿐이다. 그러니 좀 더 당당해져라. 적대하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선배의 조언을 들을 때마다 내가 아직 애송이란 걸 실감한다.
(알면 됐다.)
“강문수 씨. 제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세요.”
“이해는 했는데, 지금은 저에게 도움을 받고 계시잖아요?”
“...또 선배의 짓이군요.”
마녀 라누벨라 13세는 무척 유감이란 표정을 지었다.
“아닌데요.”
“여자의 감을 무시하지 마세요. 당신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
“끝나면 또 부르세요.”
뿅!
대화가 뜻대로 안 풀린 마녀가 도망치듯 접속을 종료했다.
“...가볼까.”
나의 양분이 되어줄 망령이 잠들어있는 유적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