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68화 (169/232)
  • 168화

    [강령술사(4차)]

    망령에게 육체를 빌려준다. 영혼이 너무 강하면 육체를 못 돌려받고, 아바타를 영구적으로 잃는다.

    “...재미있네.”

    경고가 위협적이긴 했지만, 나는 평범한 이용자가 아니다. ‘강문수’란 인격체가 게임의 전자신호 따위보다 영혼이 약할 리 없잖아?

    치명적인 부작용이 사라지면 사기적인 장점만 남는다.

    좋아. 결정했다.

    [칭호] 용왕의 아들(B)

    [레벨] 52

    [직업] 강령술사(4차)

    [업적] 1439

    [적성] 제사장

    여태 질질 끌었던 4차 전직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직업 ‘강령술사’의 효과를 사용했다.

    번뜩-

    그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이것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공기인가.”

    내 의지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육체. 목소리는 같지만, 입에서 색다른 억양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강림.

    유령 요정왕이 내 육체에 깃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무덤을 벗어나는군.”

    지하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몸을 돌린 요정왕.

    그는 팔짱 끼고 천천히 지상으로 향하는 커플을 빠르게 따라잡은 후, 신성로마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이 제작한 초보자용 칼을 휘둘렀다.

    “오빠-”

    “나도 사랑-”

    댕강! 댕강!

    요정왕의 기습을 눈치채지 못한 커플은 아무것도 못 해보고 사이좋게 머리통이 분리됐다.

    그야말로 압도적!

    여성은 레벨이 낮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망령의 숲에서 놀 레벨이 아닌 남성까지 한 방일 줄은 몰랐다.

    [인간을 죽였다.]

    [인간 여성을 죽였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인간 남성을 죽였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내 육체를 빌린 유령 요정왕이 그들을 죽였지만, 업적은 내가 달성한 것으로 계산됐다.

    좋은데?

    툭, 툭, 짤랑...!

    죽어서 빛의 알갱이로 변하며 사라진 커플의 자리에는 시체 대신 그들의 장비 일부와 돈주머니가 전리품으로 떨어져 있었다.

    쓰레기처럼 놔두면 계단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주워가는 게 예의.

    “미천한 것들이 감히.”

    그런데 유령 요정왕은 이 전리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오! 신이시여!

    주인 없는 돈주머니를 보고도 그냥 지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만행. 그래서 내가 줍기로...

    ‘...어라?’

    그런데 내 육체를 돌려받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인간. 짐의 복수를 돕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요정을 죽였다.]

    [친자식에게 살해당했다.]

    [가족에게 배신당했다.]

    [왕위를 빼앗겼다.]

    ......

    그때, 내가 달성하지 않은 다양한 업적들이 무작위로 유입됐다.

    그 이유는?

    [적성] 제사장

    망령을 구제한 대가로 업적 일부를 받으며, 전직에 필요한 업적 점수에 가산점이 붙는다.

    죽으면 업적을 대폭 상실한다!

    망령을 도와주면 대가로 업적을 받는 적성의 효과 덕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 잠에서 일어나라. 짐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여.”

    쿠구구구-

    쿠구구-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망령의 숲이 흔들렸다.

    “우워어어!”

    “으어어어!”

    숲에 흩어져 있던 ‘유령 기사’들이 지하 무덤의 입구로 집결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용자가 직간접적으로 휘말렸고-

    [인간을 10명 죽였다.]

    [인간 여성을 10명 죽였다.]

    [인간 남성을 10명 죽였다.]

    [인간을 100명 죽였다.]

    ......

    유령 기사들이 살해한 이용자들의 숫자만큼 내 업적에 가산됐다. 경험치와 전리품이 없는 건 애석하지만, 정말 예상하지 못한 수확이었다.

    유령 요정왕.

    수영황제 남해수처럼 최고라는 의미로 널리 응용되긴 하지만, 원래 ‘왕(王)’이란 직업은 전사가 아니다.

    “숲을 정화하라.”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통치자.

    “크어어어!”

    “우어어어!”

    왕의 무기는 그 명령을 받드는 신하들이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령만 내렸음에도 업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뭐, 뭐야?!”

    “숲이 미쳤나?!”

    “살려줘~!”

    요정왕의 명령을 받은 유령 기사들이 숲을 헤집고 다니며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단독으로 숲을 배회하던 유령 기사들이 협공해오자 이용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인간을 1000명 죽였다.]

    [요정을 10명 죽였다.]

    [요정을 100명 죽였다.]

    [난쟁이를 10명 죽였다.]

    ......

    환생 시스템을 사용해서 다른 종족으로 재시작한 이용자들도 죽고,

    [전사를 10명 죽였다.]

    [마법사를 10명 죽였다.]

    [사냥꾼을 10명 죽였다.]

    [궁수를 10명 죽였다.]

    ......

    직업으로 분류된 업적이 추가로 쌓이면서 점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노다지네.’

    내 육체를 완전히 빼앗겼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허! 숲을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육체가 없는 유령 기사들은 망령의 숲을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숲에 들어온 모든 이용자가 사망한 뒤에는 업적도 잠잠해졌다.

    이젠 포기?

    아니었다.

    “짐의 여정을 준비하라.”

    유령 기사들은 이용자를 죽이고 획득한 전리품 중에서 쓸모있는 물건들을 모았다.

    갑옷, 무기, 식량, 치료제...

    신성로마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이 진상한 칼은 매우 뛰어나서 버려지지 않았지만, 그밖에는 속옷까지 싹 갈아 치웠다.

    “히이이잉~!”

    그 마무리는 이마에 뿔이 달린 순백의 준마.

    유니콘(Unicon)!

    그 전설적인 탈것에 이용자의 말에서 빼온 안장을 채우고, 짐가방에는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채웠다.

    “가자!”

    “우허어어!”

    “흐어어어!”

    유령 요정왕은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신하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망령의 숲을 벗어났다.

    [백성 100000명을 죽였다.]

    [용을 사냥했다.]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났다.]

    ......

    그리고 자유의 대가로 소유한 업적 일부를 나에게 또 빼앗겼다.

    * * *

    내 육체를 빼앗은 요정왕은 오만하긴 해도 어리석지는 않았다.

    “시간 좀 되시오?”

    자신을 배신한 백성(요정)이 아닌 종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아, 네. 됩니다.”

    “요정왕국으로 가고 싶은데,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오? 지도를 봐도 잘 모르겠소.”

    “아! 이 길로 쭉 가시다가 갈림길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소. 그대의 여정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겠소.”

    “하하! 게임을 제대로 즐길 줄 아시네요! 안전한 여행 되세요.”

    ...이런 식이었다.

    시비를 걸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이 빼앗긴 요정왕국으로 향했다.

    물론,

    “천박한 년들.”

    짧은 치마를 입고 늘씬한 다리를 한껏 뽐내는 요정 여성만 발견하면 먼 거리에서 활을 쏴서 죽였다.

    “꺅?!”

    [정령사를 10명 죽였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다!]

    레벨에 상관없이 한 방에 다 죽는 걸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째서 싫어하지?’

    나는 송선영이 뭘 입어도 좋지만, 짧은 치마나 핫팬츠로 다리를 훤히 드러냈을 때가 제일 좋던데.

    “인간. 가는 동안 짐의 이야기를 살짝 해주지.”

    그러세요.

    가만히 앉아서 영화를 24시간 관람하는 기분이라서 솔직히 심심했다.

    “곱게 키운 딸이 있었다. 그런데 딸이 인간 세계에 한 번 다녀오더니, 완전히 달라졌다. 짧은 치마를 입고 인간 사내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렸지.”

    충격이 컸겠네요.

    “그래. 심지어 약혼자를 놔두고 그 인간 사내랑 결혼하겠다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왕좌밖에 관심 없는 아들놈은 경쟁자인 여동생을 밀어낼 수 있다는 계산으로 지지했고.”

    저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복잡한 가정사였다.

    “짐이 완고하게 안 된다고 선을 긋자 반란을 일으켰다. 종족을 차별하는 폭군이란 명분이었다. 허! 진짜 가당치도 않지!”

    그냥 허락하시지...

    “왕족은 백성을 지키고 모범이 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요정 중에서 가장 요정다운 순혈(純血)을 계승한 공주가 인간이랑 결혼해서 잡종을 낳으면 요정의 시대도 끝난다.”

    그런가요?

    “이런 답답한 인간을 보았나. 절반은 인간인 잡종이 요정왕국의 왕족이라고 생각해봐라. 이건 종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문제다.”

    아하!

    유령 요정왕의 답답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모든 잘못과 책임을 딸에게 돌리는 건 잘못됐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냐?”

    딸의 가정교육을 잘못했으니까요.

    “곱게 키운 딸이다.”

    그게 잘못이란 겁니다. 소중한 딸이 잘못된 사상에 물들기 전에 엄하게 혼내셨어야죠.

    “......”

    유령 요정왕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 * *

    요정의 수명은 매우 길다.

    500년, 1000년, 3000년, 영생...

    창작자의 작품 세계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인간보다 길다는 설정에는 이견이 없다.

    “우리의 폐하요?”

    “어떻소?”

    요정왕국에 도착한 유령 요정왕은 정체를 감추고 조사에 착수했다.

    “300년 동안 요정왕국을 잘 다스리고 계십니다.”

    “자식들은 어떻소?”

    “85년 전에 셋째 공주님이 처형당한 걸 제외하면 평온합니다.”

    “처형...?”

    얼굴도 모르는 손녀의 목이 잘렸다는 말에 요정왕이 당황했다.

    “네. 인간이랑 잠자리를 함께한 사실이 들통나서... 재판도 없이 감옥에서 처형되셨습니다. 공주님의 머리가 성문에 이틀 동안 걸려 있었죠.”

    “대화에 응해줘서 고맙소. 주문한 술은 내가 사겠소.”

    “어이쿠! 잘 마시겠습니다!”

    부친이 왕좌에서 쫓겨난 과정을 잘 아는 아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철저했다.

    지독한 순혈주의.

    왕위를 찬탈하도록 도와준 여동생은 죽이지 않고 국외로 추방했다.

    “한시름 덜었군.”

    패륜을 저지른 아들이지만, 나라는 잘 다스린다는 사실에 유령 요정왕은 만족한 눈치였다.

    그 순간,

    [활로 1000000명을 죽였다.]

    [죽음을 10000000번 경험했다.]

    [겨울을 1000번 보았다.]

    [요정 100000명을 지휘했다.]

    ......

    유령 요정왕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해결되면서 수많은 업적이 또 나에게 넘어왔다.

    좋은데?

    육체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대가 정보상이오?”

    “흠. 이 근방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지. 요정왕국에서만 500년 동안 활동했으니까.”

    술집 구석에서 홀로 술을 홀짝이던 요정 상인이 웃었다.

    “500년이면 알지도 모르겠군. 인간 사내랑 눈이 맞아서 추방된 요정 공주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싶소.”

    “공짜로?”

    “돈이라면 제법 있소.”

    짤랑!

    유령 기사들이 망령의 숲에서 수집한 금화가 돈주머니 안에서 영롱한 소리를 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 배신자를 찾는 이유를 모르겠소만, 인간 남편이 복상사로 150년밖에 못 살고 요절한 뒤에 다른 인간 남자랑 재혼했소. 아직 한창 젊으니까.”

    “허어!”

    “하지만 죽은 남편의 자식들이 걸림돌이 되면서 금방 파혼하고 말았지. 현재는 인간 왕국에서 16살짜리 왕자의 보건교사로 일하는 중이오.”

    “......”

    “더 필요한 정보는?”

    “없소. 이건 사례금이오.”

    짤랑!

    유령 요정왕은 정보 상인에게 약속한 돈의 2배를 준 후에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탓인가? 몸이 무거워진 것 같은데.”

    네! 기분 탓이에요!

    업적을 빼앗을수록 나는 강해지고 유령 요정왕은 약해졌다.

    [칭호] 용왕의 아들(B)

    [레벨] 164

    [직업] 탐욕의 강령술사(5차)

    [업적] 13507

    [적성] 제사장

    조금 전에 5차 전직을 마친 나는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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