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마녀는 검은색 옷을 입고,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은밀히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마녀를 보라!
밝고 하얗다.
나보다 100살 이상 많은 이 마녀에게는 점이나 주름 같은 사소한 그늘과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
“올림픽에서 활약은 잘 봤어요, 강문수 신도님.”
“어흠! 감사합니다.”
추기경의 말투는 친근했지만, 재롱잔치를 잘 봤다는 듯이 들리는 건 내 심성이 삐뚤어졌기 때문일까?
그녀는 수행원의 도움으로 금실이 들어간 순백의 법복을 입으며... 아니, 어깨 위에 대충 걸치며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어머! 당신의 행동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어요.”
“......”
내 생각을 읽은 걸까?
“당신에게는 영원한 잠에 빠진 환자를 구한 보상일 테니까요. 환자의 재력으로 차별하는 것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당연한 거겠죠.”
“아... 다 아시네요.”
대화와 공감이 전혀 안 됐던 어린 라누벨라랑 달랐다!
“경험이 있으니까요. 강문수 신도님이랑 성향이 비슷했던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어요.”
“......”
뜬금없이 로맨스?
“남자들의 특징일까요? 힘이 생기면 뒤편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여자는 생각하지 않고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괜찮을 거라면서. 그리고 시체나 병신으로 돌아와요.”
“그 남성 분은...”
“대전차 지뢰를 밟고 죽었습니다.”
“아, 네.”
진짜 허무한 결말이군!
“그 멍청이랑 비교하면... 강문수 신도님이 선택한 올림픽 출전은 매우 건전한 오락에 속하죠.”
건전한 오락.
올림픽이 출범한 취지를 생각하면 완전히 틀린 표현도 아니리라.
“늙은이의 재미없는 추억담은 이쯤하고... 강문수 신도님의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혹시, 이야기의 결론이 환자를 치료하지 말라는 겁니까?”
“그 태도가 문제란 겁니다.”
“네?”
내 태도가 왜?
“제가 사랑했던 멍청이는 자신이 직접 가서 도와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어요. 미사일과 폭격기로 쓸어버린 후에 깃발만 꽂는 시대에 웃기지도 않는 착각이죠.”
“......”
“강문수 신도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설득이 목적이었다면 지구 반대편까지 번거롭게 초대할 필요도 없고요. 스마트폰 전화번호만 알면 되죠.”
“...그러면 왜 부르신 겁니까?”
“사진과 영상으로 봤을 때는 너무 안 닮아서요.”
“음?”
무슨 말이지?
“이 예배당의 지하 감옥에 있는 라누벨라 10세.”
“......”
또 라누벨라네.
“강문수 신도님은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
나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존재다.
“무당.”
“......”
“P의 적성검사결과는 똑같지만, 그것을 자국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해요. 무당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제가 마녀라는 겁니까?”
“어머! P의 적성에 마녀는 없어요. 있어서도 안 되고요. 신성로마제국에는 신(神)의 고귀한 혈통을 계승한 제사장만 있답니다.”
“혈통...?”
“네. 혈통.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예언자처럼 희귀한 적성도 세계에 여럿 있는데, 무당은 세계에 단 한 명뿐이란 점이.”
“......”
“그건, 혈통이 외부로 새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황녀님처럼 출장을 나간 마녀가 충동적인 사랑에 빠진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적성이 계승되진 않았죠.”
“확실합니까?”
“그걸 지금부터 알아볼 거예요. 따라오세요.”
사라락~
우리는 라누벨라 10세가 감금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 *
“라누벨라. 이 이름을 계승할 만큼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마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그런 것 같네요.”
자기중심적인 나를 매우 싫어하는 황녀님이 ‘라누벨라 13세’니까. 단 13명밖에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 사망률도 높아요. 마녀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기에... 9세는 건널목에서 파란불이라고 방심하다가 트럭에 치였죠.”
“저런...”
“그리고 11세는 황궁에서 새벽까지 놀고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오는 길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어요.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답니다.”
“......”
죽는 이유가 정말 하찮았다.
“그래서 이 괘씸한 10세의 손톱 하나 못 뽑고 10년 넘게 감옥에 모셔두고만 있는 상태에요.”
“동료를 고문할 생각이었습니까?”
“필요하다면.”
현대적으로 설계된 지하 감옥은 내 대학교 기숙사만큼이나 깔끔했다.
“...도착했습니까?”
“네. 여기에요.”
삑-
추기경의 손바닥을 인식한 감방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을 가둬두는 장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침대, 런닝머신, 냉장고, 게임잡지, 게임기, 수세식변기...
칸막이조차 없는 개방된 공간에서 볼일을 봐야 한다는 점만 빼면, 편의점 사장님이 살던 원룸이랑 분위기가 매우 비슷했다.
그 원인은?
“죄인이 가상현실게임도 할 수 있습니까?”
몰랑 판타지 전용기기.
틀림없었다.
“심심해서 자살할 것 같다고 하소연해서 어쩔 수 없었죠. 아무리 미워도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
“아, 네.”
“강문수 신도님. 감상은 그쯤하고 10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보라고 해도...”
혼자 쓰기에 매우 넓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는 라누벨라 10세.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민망한 상태라서 보기가 꺼려졌다. 마녀들은 평소에 벗고 생활하는 걸까.
“이상한 오해하지 마세요.”
눈치가 빠른 황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추측을 부정했다.
“당신의 어머니가 맞나요?”
“아뇨.”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아니라고요?”
“네. 이 마녀가 제 친어머니였다면 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대신 아동복 모델을 했을 겁니다.”
미인이다.
지나치게 미인이다.
정말 안타까운 얘기지만, 내 아버지의 능력으로는 결혼은커녕 말도 섞기 힘든 외모의 여성이었다.
“저도 그 점이 걸렸어요. 닮은 구석이 전혀 없기에. 붙잡힌 10세도 자식의 존재를 부정했고요.”
“이제 용무는 끝났습니까?”
옆에서 이렇게 떠들어도 안 깨어나는 라누벨라 10세가 이상했지만, 어머니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서 이곳에 더 있기 싫었다.
“아직요.”
“......”
“어머! 경계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하나만 더 확인 후에 무사히 귀국시켜드릴게요. 관광하다가 천천히 돌아가셔도 되고요.”
“그게 뭡니까?”
“강문수 신도님의 기억이 조작됐을 가능성.”
“그게 가능합니까?”
“자취를 감춘 라누벨라 10세는 마녀가 아닌 평범한 여자처럼 살고 있었어요. 길거리에서 9세랑 마주치기 직전까지. 그건 정말 우연이었죠.”
“......”
“안 닮았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저는 라누벨라 7세. 마녀들의 수장으로서 확인할 의무가 있어요. 보상은 확실하게 해줄게요. 이미 귀중한 정보를 많이 얻었겠지만, 그거랑 별개로.”
“...좋습니다.”
한순간 갈등했지만, 내가 손해 볼 건 없었다.
“방법은 간단해요. 10세를 깨워서 직접 물어보는 거죠. 아들이 맞냐고.”
“그러면 깨우세요.”
“그녀는 우리가 깨우려고 하면 신경질만 내서 곤란해요. 그러니 강문수 신도님이 흔들어서 깨우세요.”
“저라고 다릅니까?”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신경질 대신 비명부터 지르겠죠. 마녀도 옷을 벗으면 평범한 여자랍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추기경의 표정에서 요망한 마녀가 보였다.
“흠...”
“독점욕이 강한 여자친구분께는 비밀로 해줄게요.”
“...어디까지 조사한 겁니까?”
“전부.”
“......”
“뭘 망설이시죠? 여성의 알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크흠!”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깊이 잠든 라누벨라 10세의 어깨를 흔들어서 깨운 후에... 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실례할게요.”
“......”
나는 먼저 양해를 구한 후에 마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 *
아름다운 예배당의 지하 감옥에서 발 디딜 곳 없는 하늘로 이동했다.
“...당했네.”
나는 마녀의 교묘한 말장난에 속았음을 눈치챘다.
(후배야. 또 속았구나.)
존경하는 선배님! 음흉한 마녀에게 저 대신 따져주세요!
(네가 안 죽으면 생각해보마.)
“아!”
자유낙하 중이었지!
여기가 바다 위라면 떨어져도 죽진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호수조차 안 보이는 육지 위였다.
이대로 가속도가 붙어서 운석처럼 지상에 추락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죽는다.
‘몸은... 좋아.’
팔다리를 쫙 벌리면서 옷으로 위장한 외피도 펼쳤다.
부부부부-
공기저항으로 온몸이 진동했다.
날다람쥐처럼 부드럽게 활공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철판보다 단단한 외피와 고밀도의 근육이 가볍지 않아서 절대 무리.
내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가속도가 덜 붙길 바랄 뿐이다.
“제발...!”
쾅~!
내 육체는 운석처럼 지상에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매우 멀쩡하군.)
“...그러게요?”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바스스...
온몸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며 일어섰다.
(후배야. 멍청한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질문하며 얻은 정보들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요?
(지금부터 마녀들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세계의 확장만 신경 써라. 업적을 쌓으란 얘기다.)
여기서요?
“크르르!”
“크르!”
라누벨라 10세의 꿈속에 사는 괴물들이 나를 포위했다.
(거긴 꿈속이 아니다.)
예?
(엄연한 현실이다. 가상현실게임의 세계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이젠 사람이 아닌 기계의 전자신호 안으로 들어갔다는 소리?
내가 판타지로 이해해줄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벗어났다.
“크앙!”
“걸리적거리는... 어?”
펑!
나에게 덤빈 괴물이 풍선처럼 터지며 빛의 알갱이가 되어 사라졌다.
“...뭐지?”
펑! 펑! 펑!
다른 괴물들도 마찬가지. 동료가 당했음에도 겁 없이 돌진한 놈들은 내 몸에 닿자마자 먼지처럼 사라졌다.
(게임이다.)
네. 게임의 세계죠.
(조금 다르다. 여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마법이다. 네 몸에 닿으면 뭐든지 사라지지.)
땅은 안 사라졌는데요?
(아니. 사라지고 있다. 벌써 네 발목까지 잠식했군.)
“그게 무슨... 헉!”
늪지에 빠진 것처럼 내 발목까지 땅속에 잠겼다.
휙!
서둘러 오른발을 빼내려고 들었더니 왼발이 더욱 깊이 빠져버렸다.
(진정해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생매장될 것 같은데요?!
(가상현실게임의 세계관을 온전히 받아들여라.)
“하지만 그러면...”
나를 강하게 해준 모든 능력을 잃고 만다.
(무공도 익혔던 녀석이 엄살은. 생매장되기 싫으면 빨리 포기해라.)
“끙...”
선택지가 없었다.
뚝.
머리만 지상에 튀어나온 우스꽝스러운 상태로 잠식이 멈췄다.
그 직후,
[칭호] 용왕의 아들(B)
[레벨] 1
[직업] 미숙한 영혼의 사냥꾼(3차)
[업적] 315
[적성] 제사장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아바타 상태창이 등장했다.
“1레벨...”
눈앞이 캄캄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라. 마녀들이 금전적으로 지원해준다고 하니.)
왜요?
(자신들이 못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너에게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아...”
(일단은 거기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겠지만.)
“크르르!”
“크르르!”
내 몸에 닿자마자 풍선처럼 터졌던 괴물들에게 또 포위됐다. 여긴 놈들의 사냥터 혹은 영역인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이거 참...”
편의점 사장님께 주워들은 지식을 활용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걸.
팟!
땅을 박차며 용감하게 돌진했다. 그리고 외쳤다.
“나중에 두고 보자!”
“크엉!”
“크아앙!”
객기만으로 싸우기에는 레벨이 너무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