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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64화 (165/232)
  • 164화

    업적(業績).

    꼭 대단하고 힘든 일만이 업적인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해낸 모든 일이 기록으로 남는 업적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업적이 주목받지 못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업적이 아닌 건 아니다.

    「무인도에서 10일 살아남기」

    「호흡을 30초 동안 참기」

    「세상에서 가장 매운 요리 먹기」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하기」

    ‘과연...’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는 매우 다양한 업적이 존재했다.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까지.

    마녀 라누벨라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려면 꿈속에서 다양한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기」

    「사람을 100명 죽이기」

    「사람을 3000명 죽이기」

    「사람을 50000명 죽이기」

    ......

    똑같은 일이라도 반복하면 더욱 큰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꿈의 세계에서 내가 빠져나오면 이 누적도 초기화...

    마녀가 잠들기 전에 선심 쓰듯 알려준 정보다.

    “어쩐지.”

    수영은 송선영에게 배우고, 해전을 치른 뒤로 성장이 완전히 멈췄다. 발렌타인에게 배운 검술과 고무신 관장님께 배운 태권도도 마찬가지.

    꿈속에서 전쟁이나 싸움을 치르면서 좀 더 능숙해지긴 했지만, 전문적인 기술은 그대로였다.

    팔랑~

    나는 215권짜리 무협지 <이 천마 실화냐?>를 읽으며 익힌 속독으로 공략집을 빠르게 살펴봤다.

    ‘와!’

    사람이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공략집을 보면 볼수록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비효율적으로 꿈속에서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사람을 100명 죽이기」

    「하루에 사람을 3000명 죽이기」

    「하루에 사람을 50000명 죽이기」

    ......

    모르면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고 지나칠 업적이 매우 많았다.

    또한,

    「사람을 50000명 죽이기」

    「하루에 사람을 50000명 죽이기」

    「사람을 50000명 암살하기」

    「군인을 50000명 죽이기」

    이처럼 같이 진행할 수 있는 업적도 다수 존재했다.

    “맙소사.”

    조금 비윤리적일 수 있지만, 나는 매우 어려운 업적을 쉽게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

    적의 숫자만큼 칼날을 소환하는 SSS급 괴물.

    헌터물 의 주인공이 사용한 세계관 최강의 괴물!

    그 세계에 사는 인류 전체를 적으로 인식하면 하루에 50억 살인(殺人)도 쉽게 가능했다.

    “쩝.”

    이밖에도 내가 어려운 업적을 달성할 기회가 은근히 많았다. 몰라서 그냥 지나쳤을 뿐!

    속이 쓰렸다.

    띵-!

    (안녕하십니까, 승객 여러분. 저는 신성로마제국까지 여러분을 안전하게 모시라는 황명을 받은 이 비행기의 기장입니다.)

    (비행기가 곧 신성로마제국 제3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자리로 돌아가서 안전띠를 착용해주십시오.)

    비행기 안내방송이 들렸다.

    “흠...”

    벌써?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업적만 수록된 공략집을 절반도 못 읽었는데, 4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그만큼 다양한 업적.

    그만큼 많은 업적.

    그만큼 내가 어이없게 놓친 업적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후암...”

    부산스러워진 비행기 내부의 잡음에 깬 마녀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하품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야근하는 노동자 같았다.

    “잘 잤습니까?”

    “네. 누구 때문에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만.”

    “몸을 혹사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유가 있습니까? 생활고에 쫓기거나 저처럼 노후 걱정과 물욕이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일반석보다 2배 이상 비싼 비즈니스석에 탄 시점에 ‘가난’이랑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녀가 가진 능력을 생각하면 사치를 부리는 편도 아니었다.

    “질문인가요?”

    “아뇨.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그러면 저도 딱 하고 싶은 말만 할게요. 당신 같은 이기적인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이타적인 마음으로 자진해서 고생하는 겁니다.”

    “아하!”

    이타적인 마음.

    이기적인 마음의 반대말!

    마녀 라누벨라는 ‘무당’인 내가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위이잉-

    (저희 비행기가 신성로마제국 제3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놓고 가시는 물건이 없도록 꼼꼼히...)

    “내리죠.”

    “끈은 안 해도 됩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마녀들의 땅입니다. 가장 많은 마녀가 탄압받은 땅이기도 하지만.”

    “아, 네.”

    까칠하게 대답한 마녀 라누벨라가 여행 가방을 끌며 앞장섰다.

    * * *

    외국인도 많은 공항이라서 최면술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수고하셨어요.”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항공사 스튜어디스 복장을 한 미녀들이 마녀의 짐을 대신 들어줬다.

    스윽-

    자연스럽게 여행 가방을 넘긴 라누벨라는 또 공항 직원 전용통로를 이용해서 입국 심사를 건너뛰었다.

    ‘어... 이러면 면세점에서 기념품도 못 사겠는데...?’

    내가 마녀를 따라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공항 지하의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탈 수 있도록 대기 중인 고급스러운 흰색 리무진.

    마녀의 눈에 띄는 복장에서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은밀함이랑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당하네요.”

    “이기적인 당신도 올림픽 스타로 당당히 활보하고 다니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겸손한 편이죠.”

    “아, 네.”

    한마디도 그냥 안 넘어가는구먼!

    탁.

    우리를 뒷좌석에 태운 흰색 리무진이 진동 없이 부드럽게 나아갔다.

    전에 마오짜이의 차를 탈 때도 생각했던 건데, 내가 이런 승차감의 차를 사려면 얼마나 걸릴까?

    ...그런 시답잖은 계산을 하면서 창밖의 경치를 구경했다.

    “신기한가요?”

    “시대를 역행한 것 같은 풍경... 현실에서는 처음 봅니다.”

    도로에 마차가 다니고, 외국인들의 복장만 바꾸면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랑 거의 똑같았다.

    요즘 시대에 벽돌과 석회암으로 만드는 건축양식이라니?

    그리고 예배당.

    내가 이 차로 이동하며 10분 동안 본 예배당만 20곳이 넘었다. P를 신격화한 종교국가답다고 할까!

    “이제 곧 도착하니 주의사항을 말씀드릴게요.”

    “그런 게 있습니까?”

    “친구 만나러 가는 줄 아나요? 혹은, 당신 덕분에 이득을 봐서 웬만한 무례는 참는 어른?”

    “......”

    정곡 좀 그만 때렸으면 좋겠다.

    “대외적인 함자는 프로메시아 콘스탄틴 추기경 예하.”

    “추기경...?”

    “그러니 공개석상에서는 존경과 경애를 담아서 추기경 예하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우리만 있을 때는 원로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혹여, 머리가 나빠서 헷갈리면 원로님으로 통일해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추기경 정도면-”

    “추기경 예하.”

    “...원로님 정도면 이 나라의 이인자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신성로마제국은 대통령처럼 P의 적성보유자 중에서 투표로 선출되는 교황이 꼭대기에 있고, 바로 그 아래에 혈통으로 이어지는 황제, 교황이 임명하는 추기경이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통치는 국민투표로 뽑힌 교황이 임명한 3명의 추기경이 하고, 추기경이 실책을 저지르면 교황이 책임지는 독특한 구조...

    황제를 포함한 황족은 대외적으로 얼굴을 알리는 외교와 추기경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강문수 씨. 추기경 예하를 당신 나라의 장관이랑 똑같이 취급하는 건 대단한 무례입니다.”

    “아, 네. 실례했습니다.”

    뭐가 다른데?

    “정치와 경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원로님은 가장 속세에 관여하길 싫어하시죠.”

    “흠...”

    나라를 잘 다스리라고 임명하는 추기경 자리에, 나라에 무관심한 사람을 앉혀놔도 괜찮은 걸까?

    “신성로마제국은 법이 아닌 신앙으로 통치됩니다. 원로님은 비도덕적인 이단자들을 색출해서 처벌하는 역할만 하십니다. 저렇게.”

    “교수형...?”

    “성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알몸으로 광장에 세워둡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디딤돌을 치우면 목이 졸려서 죽는 구조죠.”

    “어차피 죽일 거면서 굳이...”

    “간혹 살기도 하니까요. 죄인이 억울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디딤돌을 지키고 옷과 먹을 것을 제공해줍니다. 하지만 모두의 생각이 똑같을 순 없기에 광장은 늘 시끄럽습니다.”

    “흠.”

    중세시대의 교수형과 화형이 볼거리 겸 본보기라면, 신성로마제국의 방식은 국민이 판결하는 재판?

    저게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방식인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스윽-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흰색 리무진은 웅장한 예배당 후문 앞에 부드럽게 멈췄다.

    “도착했네요. 자기밖에 모르는 당신에게 여기가 어딘지 설명해봐야 한 귀로 흘려들을 테니 넘어갈게요.”

    “그 정도는...”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편의점에 공짜로 들어오는 잡지를 버리면서 몇 번 봤던 것 같다.

    관광객과 신자들은 정문만 이용하는 걸까?

    예배당 후문에는 우리를 마중 나온 수행원 몇 명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님.”

    “황녀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마녀를 부르는 호칭이 심상치 않았다.

    “황녀님...?”

    “당신이 눈 빠지게 쳐다본 얼굴이 평범한 유전자끼리 결합해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

    나를 때리는 수위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

    “황제를 유혹한 마녀. 마녀에게 현혹된 황제.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진짜였을 뿐입니다.”

    “아하...”

    둔기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추기경을 감시해야 할 황제가 유혹당해서 해롱해롱? 그러면서 다른 두 추기경은 집요하게 견제한다면?

    신성로마제국에서 라누벨라 7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임명권을 가진 교황 빼고 전무(全無)했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답네.’

    예배당 안에는 수많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운동선수, 의사, 청소부, 정치인, 변호사, 농부, 상인, 요리사...

    이 나라에서 신성시하는 P의 적성검사결과에 맞춰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조각했다.

    “마음에 드나요?”

    물어보는 마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네. 번개를 손에 쥔 남자의 나체상 같은 것보다 훨씬.”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해서 기쁘군요.”

    “그런데...”

    “뭐죠?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간단한 질문 정도는 답해주겠습니다.”

    “정말 안 어울리네요.”

    불결함의 상징인 마녀가 신성한 예배당에 들어온다니?

    신성모독이다.

    “편견입니다. 신의 대리자를 자칭하는 두 사람이 있어요. 한 명은 설교를 매우 잘하는 노인이고, 다른 한 명은 기적을 보여주는 미녀예요. 누가 더 신의 대리자 같을까요?”

    “...후자겠죠.”

    인간은 100번의 설명보다 자신이 본 것을 믿는다.

    “과거에 마녀가 탄압받은 이유는 솔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마법을 신께 받은 기적이라고 대답한 마녀들은 성녀로 추앙받았죠.”

    “아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P의 적성검사직업군을 조각해둔 것 같은 긴 복도를 지나서 그 끝...

    끼익-

    기도하듯 무릎 꿇은 마녀와 성녀가 마주 보는 벽화가 양각된 여닫이문이 서서히 열렸다.

    ‘오! 신이시여!’

    나는 방의 내부 풍경을 보자마자 신(神)을 찾고 말았다.

    “어서 와요, 강문수 신도님. 황녀님도 수고했어요.”

    몸의 절반이 파묻힐 만큼 푹신한 소파에 요염한 자세로 앉은 여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어... 환대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추기경이란 걸까? 나에게 없었던 신앙심이 심장에서부터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예하. 손님이 왔는데, 평소처럼 벗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녀 라누벨라가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큰 실수를 저지른 편의점 사장님이 뒷수습을 떠넘기고 게임 하러 도망쳤을 때의 내 표정이랑 비슷하군.

    상관을 혼낼 수도 없고...!

    진짜 난처하다.

    “황녀님은 너무 보수적이에요. 100살도 더 차이 나는 할머니를 보면서 흥분하는 사내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단자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강문수 신도님?”

    “네. 맞습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단자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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