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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63화 (164/232)
  • 163화

    [9장-1절] 질문하세요

    도망칠 곳이 없는 비행기 안.

    마녀 라누벨라는 평범한 승객처럼 시간을 보냈다.

    ‘물론...’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얼굴만으로도 평범이랑 거리가 멀었지만.

    “할 말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는 매우 인간적이었다. 안 좋은 의미로.

    “어떻게 한 겁니까?”

    공항 카페에서부터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충격의 연속이었다.

    “말의 힘입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까?”

    “이상한 질문이네요. 이미 하고 있잖아요? 꿈속에서. 그 덕분에 전쟁에서 쉽게 이겼을 텐데요.”

    내가 연합군을 선동했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그건 꿈속입니다.”

    “현실도 다르지 않아요. 200배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200배...?”

    “자신의 영혼을 만져서 올림픽 스타가 되는 건 간단합니다. 하지만 타인의 영혼을 만지는 건... 잠겨있는 남의 집에 열쇠도 없이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비교 자체가 안 될 만큼 압도적으로 어렵죠.”

    “아하!”

    나와 선배가 ‘세계’라고 부르는 영역을 마녀는 ‘영혼’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라누벨 환자들의 꿈은 상상의 세계가 아닌 영혼 자체인 걸까?

    여전히 정보가 부족했다.

    “아직 이해를 못 하셨네요. 당신처럼 사람을 돈으로 차별하면서 미적거리면 200년이 지나도 자신의 영혼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겁니다.”

    “...라누벨라 양은 실제 나이가 200살쯤 됩니까?”

    “숙녀에게 실례되는 발언이군요! 당신이랑 별 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저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돈벌이로 생각하지도 않고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길 바랄 뿐입니다.”

    “저랑 정말 다르네요.”

    우리는 가치관부터 목적까지 완전히 정반대였다.

    “강문수 씨. 앞으로 질문의 기회는 2번 남았습니다.”

    “음?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요.”

    “당신이 모든 문제를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이란 건 알지만, 바로 옆의 승객들까지 무시할 건가요?”

    “......”

    정론이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기내식을 먹고 영화라도 보면서 천천히 생각하세요.”

    “...그러죠.”

    주도권을 마녀에게 완전히 빼앗긴 기분이지만,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빼내기 위해 참기로 했다.

    * * *

    질문은 신중하게.

    나는 마녀 라누벨라의 능력 중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을 2번째 질문으로 채택했다.

    “꿈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온 겁니까?”

    “애초에 들어가지 않으면 빠져나오려고 애쓸 필요도 없죠.”

    “음?”

    아예 안 들어갔다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처럼 남의 영혼 속을 헤집고 다니는 악당이 아닙니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만? 현실에서 살 수 있는 환자를 죽도록 부추기는 짓이야말로 악당이죠.”

    “악마의 논리네요. 지옥에서 더 살라고 하다니.”

    “현실은 지옥이 아닙니다.”

    “또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네요. 과분한 여자친구를 곁에 둔 당신에게는 천국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지옥일 수 있습니다.”

    “크흠!”

    비겁하게 또 정곡을 찌르다니...!

    “마지막 질문만 남았네요. 끝나면 도착할 때까지 말 걸지 마세요. 저는 대단히 바쁜 몸입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 해요.”

    “흠...”

    자존심 상하지만, 여전히 오컬트에 취약한 내가 마녀의 설명을 듣는다고 크게 바뀌는 건 없다.

    혈신 소운현.

    주술에 통달한 선배가 초짜인 나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길 기대해야 한다.

    즉,

    ‘선배에게도 어려운 문제.’

    전문적인 지식은 있지만, 주어진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선배가 추론조차 할 수 없었던 난제.

    우리가 함께한 지난 날들을 되짚어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라누벨라 양. 영혼이 확장되는 기준이 뭡니까?”

    “......”

    그녀가 나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왜요?”

    “배우지 못했어도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안 배웠는데 어떻게 알아?

    따지고 싶었지만,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업적입니다.”

    “...끝?”

    “네. 끝입니다.”

    “설명이 너무 두루뭉술한데요. 이건 무효입니다.”

    나의 항의에 마녀가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덧붙였다.

    “<몰랑 판타지>의 업적 시스템도 모르나요?”

    “<몰랑 판타지>라면... 유명한 가상현실게임을 말하는 겁니까?”

    “네. 다른 몰랑 판타지도 있나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게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동정을 바라시나요?”

    “아뇨.”

    “그러면 이제 귀찮게 하지 마세요.”

    슥-

    수면안대 대신 모자로 얼굴을 가린 마녀가 잠을 청했다.

    “......”

    조금 이상했다. 나보다 잘난 마녀는 어째서 피곤한 걸까? 최면을 거는 게 힘들어서?

    실험해보기로 했다.

    “라누벨라 양.”

    “...또 뭐죠?”

    내 부름에 그녀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로 대답했다.

    “카드게임 한 판 어떠세요?”

    “싫습니다.”

    “기권? 그러면 제 부전승으로 하겠습니다.”

    휙~

    부전승이란 말에 발끈한 마녀가 모자를 치우고 나를 쏘아봤다.

    “진짜 자기중심적이네요. 딱 한 판만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지면 도착할 때까지 입 다물고 계세요.”

    “제가 이기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라누벨라가 내 얼굴을 쏘아보며 딱 잘라 단언했다.

    “그래도 내기는 공정해야죠.”

    “...좋습니다. 요구를 말해보세요.”

    됐다!

    카드게임에서 이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긴 하지만, 져도 본전이기에 부담 없었다.

    “제가 이기면 도착할 때까지 쭉 대화하는 겁니다.”

    “...이유가 뭔가요?”

    “심심해서요.”

    마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내 얼굴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그 아가씨가 남자친구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네요. 다른 여자랑 5시간 동안 대화하고 싶다니.”

    “......”

    내가 굉장히 나쁜 놈이 됐다.

    “바로 시작하죠.”

    탁.

    마녀 라누벨라가 카드뭉치를 꺼내서 빠르게 섞었다.

    * * *

    실력을 냉정하게 비교했을 때, 내가 정공법으로 마녀 라누벨라를 이길 가능성은 10%도 안 됐다.

    ‘카페에서는 내가 안일했지.’

    현실에도 일부 반영된 인지력으로 마녀 라누벨라의 패를 훔쳐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카드는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마녀가 내 패를 볼 수 있다면?’

    역으로 내가 당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의심됐다.

    휙~

    시작은 무난했다. 패가 압도적으로 좋게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기적적인 요행은 찾아오지 않았다.

    “빨리 끝내드리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벼운 신경전을 벌이면서 게임을 쭉 이어갔다.

    그러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씩 밀리는 게 느껴졌다.

    “강문수 씨. 시간 아까우니 기권하는 게 어떤가요?”

    “끝까지 해봐야 아는 겁니다.”

    “아가씨가 불쌍하네요. 하필이면 다른 여자랑 대화하고 싶어서 안달인 남자를 골라서...”

    “오해입니다.”

    송선영을 걸고넘어지는 건 진짜 비열한 반칙이다.

    그래서 나도 회심의 일격을!

    텁.

    방금 뽑은 카드 1장을 테이블 위에 안 보고 바로 엎어놨다.

    “...이건 당신의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데요.”

    마녀가 살짝 언짢다는 시선으로 나를 째려봤다.

    “제 실력은 저만 압니다.”

    “저 패가 뭔지도 모르잖아요?”

    “압니다.”

    “틀리면요?”

    “저를 규칙도 모르는 초보자 취급하지 마십시오. 상황에 맞지 않는 카드를 내면 패배. 그래서 주로 기권할 때 이용되죠.”

    패를 잘못 예측하면 이긴 판도 기권 처리될 수 있기에 아무나 쓸 수 없는 고급 기술!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관에서도 이 기술을 온전히 쓸 수 있는 사람은 손꼽힐 만큼 적었다.

    하물며 2장을?

    그것은 카드게임 일인자였던 원작 주인공만 가능한 신기(神技)였다.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였던 셈.

    “......”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마녀 라누벨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

    안다고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쓸 수 있는 패가 줄어든 만큼 선택지가 줄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그래서 입술 꾹!

    나조차 모르는 저 패를 펼쳐도 답이 안 보이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탁, 탁, 탁...

    그렇게 몇 차례 공방이 오가고,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예상대로네.’

    이대로면 패배 확정!

    그런데도 내가 희망의 끈을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마녀 라누벨라의 표정이 여전히 진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역전의 가능성을 경계하는 듯했다.

    “저건 언제 펼칠 건가요?”

    “때가 되면요.”

    “......”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왕국A의 불쌍한 임금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사족이지만, 풍성한 치마에 가려진 아로니아 공주의 다리를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 건 솔직히 아쉬웠다. 환자가 1시간만 늦게 깨어났으면...

    “안 하세요?”

    “합니다.”

    잘못된 패가 나와서 져도 본전!

    변변찮은 패가 나와서 져도 본전!

    조금 지루하겠지만,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

    슥-

    부담을 내려놓고, 쭉 엎어놓았던 카드를 마침내 뒤집었다.

    “아...”

    “오호?”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미소 지었다.

    * * *

    마녀 라누벨라가 일전에 ‘힘없는 여성이...’ 어쩌고 말할 때는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후발주자인 나조차 총알을 피하는 괴물이 됐으니까!

    나보다 훨씬 일찍 세계를 강화한 그녀가 힘이 없다고?

    말도 안 된다.

    ‘그 말이 진짜였네?’

    약속대로 대화하기 시작한 그녀는 1시간도 안 지나서 피로가 쌓여가는 게 훤히 보였다.

    “강문수 씨. 다시 한 판 해요.”

    “싫습니다.”

    같은 수법에 또 당해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에 절대 안 된다. 그래서 애초에 한 판으로 정했고.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이었어요. 계기부터 내기 조건까지 전부 당신에게 유리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사람을 초대해놓고 잠만 자는 건 예의가 아니죠.”

    “당신이 져서 따라온 거잖아요.”

    “그래도 손님은 손님입니다. 라누벨라 양이 잠만 잘 줄 알았으면 절대로 내기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1초도 안 잤습니다.”

    “자려고 했잖아요.”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실랑이)를 1시간째 하고 있었다.

    “...한 판 더 해요. 제가 이기면 대화를 멈추고 남들처럼 숙면. 당신이 이기면 질문 3개를...”

    “싫습니다.”

    “...당신만 바라보는 여자친구에게 미안하지도 않나요?”

    또 송선영이냐?

    하지만 피로로 집중력이 많이 하락한 마녀는 내 상대가 안 됐다.

    “출장 중입니다. 떳떳하죠.”

    “뚜렷한 목적도 없이 젊은 이성에게 말을 거는 행동이 업무라고요?”

    “목적은 있습니다. 라누벨라 양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죠.”

    “저를 괴롭히는 게 목적인가요?”

    “아뇨.”

    선배의 말이 맞았다.

    ‘환자의 세계에 침투하려면 내 능력부터 포기해야 한다고 했었지!’

    나보다 아는 게 많은 마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인의 세계에 침투하는 최면술을 익히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능력을 포기했을까?

    그녀의 설명이 진짜라면 나의 200배쯤 될 것이다.

    “강문수 씨.”

    “싫습니다.”

    “...이런 소모전은 서로에게 좋지 않습니다. 저를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넘쳐나는 체력이 감당 안 돼서 이 시간이 따분한 거겠죠?”

    “정확합니다.”

    “자요.”

    딸각-

    마녀가 여행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업적을 빠르게 쌓는 방법입니다.”

    “농담이죠?”

    “진짜입니다. 아니라면 제가 이 책을 왜 들고 다니겠어요?”

    “......”

    설득력 있는 그녀의 설명에도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왜냐?

    <몰랑 판타지: 업적 모음>

    마녀가 나에게 추천한 책은 유명한 가상현실게임의 공략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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