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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62화 (163/232)
  • 162화

    ‘이 여자, 나에게 카드게임을 제안할 때부터 살짝 이상하긴 했는데, 어째서 잘하는 거지...?’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민속놀이로 자리매김한 카드게임은 현실의 카드게임이랑 완전히 다르다.

    카드 구성, 규칙, 모양...

    이 부분은 선배에게 부탁해서 확인한 사실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탁.

    처음의 여유를 잃지 않은 마녀 라누벨라가 물었다.

    “강문수 씨. 제가 잘하는 게 신기한가요? 자신 있어서 내기를 제안했다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라누벨라 양, 당신은 그 세계의 원주민들처럼 이 카드게임에 너무 능숙합니다. 어릴 적부터 즐겼던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

    바보 취급당해서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내기가 걸린 카드게임 중에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휙~

    깊게 눌러 쓴 모자 아래의 입꼬리가 올라간 마녀가 조커를 테이블 위에 사뿐히 올렸다.

    “허...”

    졌다...

    “이 카드게임을 누가 고안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스토리 짜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작가? 머릿속에 남자와 음식밖에 없는 환자?”

    “물어보면 가르쳐줄 겁니까?”

    “아뇨.”

    어림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하는 마녀의 태도가 무척 얄미웠다.

    “...하지만 작가와 환자, 둘 다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마녀가 말하는 뉘앙스도 그렇지만, 마법소년 최강민이 모든 ‘악당’을 상상해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누굴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또 한 판?”

    “...됐습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만큼 뻔뻔하지 않습니다.”

    1승 4패.

    패가 아주 잘 나와서 간신히 이긴 한 판을 제외하고는 전부 졌다.

    “그러면 결정됐네요.”

    “잠시만요. 연락할 곳이 많아서.”

    죽었다.

    이 생각부터 들었다. 잡다한 일정은 뒤에서 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취소하면 되지만, 송선영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벌써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받으세요.”

    슥-

    그것은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표였다. 심지어 일반석 가격의 2배가 넘는 비즈니스석!

    그런데...

    “이건 당신의 표잖습니까?”

    그 표에는 마녀의 이름이 공용어로 적혀 있었다.

    “당연하죠. 제 표니까요.”

    “저기요?”

    “저는 또 구하면 됩니다.”

    “라누벨라 양. 이건 당연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출국 심사에서 무조건 걸릴 텐데요.”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비행기 대신 지팡이를 타고 해외를 돌아다닌 줄 아시는 모양인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강문수 씨는 약속만 지키면 돼요. 아셨나요?”

    “...좋습니다. 하지만 출국 못 하면 제 책임이 아닙니다.”

    “물론이죠.”

    “하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대답은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 천천히 해줄게요.”

    “날짜가... 내일이네요.”

    “이것도 당신을 배려해서 넉넉하게 시간을 잡은 겁니다. 저는 누구처럼 사람을 선별해서 만나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아, 네.”

    비난해도 타격이 전혀 없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었으니까. 인류애와 헌신 같은 단어랑 인연이 없는 인간이다.

    “지금부터는 주의사항을 전달할게요.”

    “주의사항?”

    “당신이 출국하려고 하면 이 나라의 정부에서 틀림없이 호위 명목으로 감시자를 붙이려고 할 겁니다.”

    “아...”

    그걸 간과했다.

    “어쩌면 출국 자체를 막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공항 근처에서 만날 거예요.”

    “그러면 달라집니까?”

    “보면 알아요.”

    “.......”

    선배가 나를 무시할 때는 짜증이 덜 났는데, 이 여자는 내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내일 봐요.”

    스윽-

    카페 야외테이블 자리에서 일어선 마녀가 항상 끌고 다니는 여행 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만요. 공항 앞에 카페가 한두 개도 아니고, 만날 시간도... 어?”

    어디로 간 거야?

    사라졌다.

    분명히 내 앞에 있었던 마녀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 * *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수상한 여자랑 해외여행을 떠나시겠다?”

    “죄송합니다!”

    나는 송선영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다.

    판타지 정보가 필요했고, 카드게임에는 자신 있었고...

    구차한 변명을 조금씩 늘어놓으면서 여자친구의 분노를 줄여갔다.

    “나도 가도 돼?”

    “그건 좀...”

    “그 여자랑 아무런 사이도 아닌 거 확실해?”

    “확실합니다!”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전화하거나 문자를 보내면 5초 안에 무조건 응답할 것. 이걸 지킬 수 있으면 보내줄게.”

    “어...”

    “못 하겠으면 가지 마.”

    “나를 못 믿어?”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봐.”

    “어... 없네.”

    내가 돌아보고도 정말 놀랄 만큼 신뢰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약속할게.”

    “어기면 안 돼.”

    “물론입니다.”

    계약사가 인수된 후, 전폭적인 후원과 투자로 단시간에 유명한 모델로 발돋움한 송선영.

    집 밖에 나선 순간부터 그녀의 포스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버스, 지하철, 백화점, 술병...?

    술도 안 마시는데, 술 광고 모델까지 진출할 줄은 몰랐다.

    “네 일이라서 봐주는 거야.”

    “고마워.”

    “올림픽 기사도를 준비한다고 했잖아. 어떻게 됐어?”

    “당연히 나가야지.”

    “자신은 있고?”

    “괜찮은 말을 구할 수 있다면 나머진 자신 있어.”

    현실에서는 인지력이 급격히 떨어지기에 확인이 필요하지만, 질주하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정도는 자연스럽게 할 자신 있다.

    그 외에는?

    기술에서 밀리더라도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띠로리~♪

    서혜주 부원장님의 전화. 발광하던 환자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여보세요.”

    (환자가 폭삭 늙었어.)

    “...예?”

    (남해수 씨처럼 죽진 않았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는 진정됐지만, 몸이 엉망이야.)

    “회복되겠죠.”

    (아니. 처음에는 나도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는데, 조사해보니 생물학적인 세포 노화야. 그녀는 선천성 조로증 환자처럼 폭삭 늙었어. 현재는 노화 촉진이 멈춘 상태지만, 이미 65세 노인의 신체로 변한 상태지.)

    “허!”

    꿈속에서 보낸 시간이 현실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았다. 땡겨서 쓴 대출금을 강제로 상환하듯이...

    (그렇게 됐으니, 너는 안 오는 편이 나을 거야. 치료가 잘못됐다면서 가족들이 난리 치고 있거든.)

    “그럴 것 같네요.”

    식물인간이 된 딸을 치료하기 위해 외국에서 힘들게 찾아왔는데, 폭삭 늙어버렸으니까. 보호자의 관점에선 굉장히 황당할 것 같다.

    (당분간 좀 쉴래?)

    “네. 안 그래도 멀리 출장을 다녀와야 할 것 같거든요.”

    (...그건 무슨 소리니?)

    “마녀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가 역으로 당했거든요.”

    (말투를 들어보니 이미 결정된 사안인 것 같네. 선영이는 알아?)

    “네.”

    싹싹 비는 중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중세시대에 마녀사냥이 유행했던 지구 반대편입니다.”

    * * *

    조용히 짐을 싸고 새벽부터 공항으로 향했다.

    부르르릉~!

    공항까지 이동은 개구리처럼 생긴 노란색 스포츠카를 모는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호위가 너무 노골적인데.”

    “그러게.”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경찰차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삐용삐용~

    교통법규에서 자유로운 경찰차를 신호등이나 건널목에서 따돌리기도 힘들었기에 마녀랑 만나기로 한 공항까지 함께 이동했다.

    “그런데 어느 카페야?”

    “모르겠어.”

    “시간도 모르고?”

    “어.”

    “그 여자, 내 남자친구를 빌려 가면서 진짜 제멋대로네!”

    시속 90km로 운전하면서 씩씩거리는 송선영. 마녀 라누벨라를 만나면 늘씬한 다리로 걷어찰 기세였다. 어쩌면 그녀가 공항까지 나를 바래다주는 진짜 목적은 폭력이 아닐까!

    ...조용히 넘어가길 빌었다.

    “곤란하네.”

    공항 근처에 카페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너를 놀리려고 사기친 거 아니야?”

    “비싼 비행기표로 설마... 헛! 저기 있다!”

    딱!

    나는 손끝으로 예쁘게 꾸민 카페 하나를 가리켰다.

    “어디?”

    “저기!”

    통유리로 된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마녀가 보였다.

    “저 노란색 간판?”

    “어! 맞아!”

    “...나는 안 보이는데.”

    “농담이지? 마녀의 저 검은색 고깔모자가 안 보인다고?”

    마녀 라누벨라의 복장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일단 세울게.”

    “고마워.”

    끼익-

    갓길에 송선영의 노란색 스포츠카가 멈췄다. 그러자 노골적으로 뒤따라오던 경찰차는 우리를 지나쳐서 조금 앞쪽 갓길에 세웠다.

    “아직도 안 보여?”

    “...어.”

    어째서 못 찾는 거지?

    그런 의문을 느끼며, 나는 스포츠카 뒷좌석에서 여행 가방을 꺼냈다.

    “고마워.”

    “아직 안 끝났거든?”

    “......”

    “뭐해? 얼른 앞장서. 마녀의 얼굴 좀 보게.”

    “그, 그래.”

    죄인이 된 기분으로 느그적느그적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예쁜 카페의 유리문에 달린 정겨운 종소리도 먹구름 낀 내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일찍 오셨네요?”

    “여자친구가 데려다줘서요.”

    “기억합니다. 꿈이 잘못 해석된 아가씨라서.”

    “잘못 해석?”

    내 질문은 송선영의 당황한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어?! 어라? 방금까지 분명히 빈 자리였는데...?”

    “안녕하세요, 아가씨. 아끼는 남자친구를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어, 응. 그렇지? 내가 문수를 많이 아끼긴 해.”

    “이제 조심히 집에 돌아가서 남자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세요.”

    “응. 그래야지. 문수야! 잘 다녀와!”

    팔랑팔랑~

    조금 전까지 전투 태세였던 송선영이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

    “.......”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녀는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최면입니다.”

    “최면...?”

    “집에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깰 겁니다. 어째서 그냥 돌아왔는지 의문은 들겠지만.”

    “위험한 건 아니겠지?”

    “안전합니다. 의심되면 나중에 통화해보세요.”

    “......”

    꿈이 아닌 현실에서 벌어진 판타지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강문수 씨. 당신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약속했으니 끝까지 가보죠. 라누벨라 양. 이젠 어떻게 할 겁니까?”

    “이 끈을 당신의 손목에 묶으세요.”

    슥-

    마녀가 붉은색 양털실의 한쪽 끝을 나에게 내밀었다.

    “저에게 최면을 걸려는 겁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카드게임을 하지 않았겠죠.”

    “흠.”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끈을 내 손목에 감았다.

    “의심되면 안 묶어도 돼요. 대신에 놓지만 마세요.”

    “그 정도로 의심 많은 겁쟁이는 아닙니다.”

    꾸욱-

    도발처럼 들리는 마녀의 제안을 받아치며 붉은색 실을 손목에 묶었다.

    “이제 가죠.”

    “이대로 공항에 간다는 겁니까?”

    “네. 지팡이를 탄 마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면 포기하세요.”

    “......”

    나를 완전히 퇴행성 유아취급하네.

    “천천히 가보죠.”

    드륵-

    카페에서 일어선 우리는 공항까지 여행 가방을 끌며 걸어갔다.

    ‘...뭐지?’

    내가 바로 눈앞에서 지나가는데도 경찰차에 탄 경찰들은 카페만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신기한가요?”

    “이것도 최면입니까?”

    “비슷합니다. P가 인류를 구원했음에도 지구에는 치안이 안 좋은 나라가 여전히 많으니까요. 그래서 저처럼 힘없는 여자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니려면 눈에 안 띄어야 합니다.”

    “흠...”

    그렇다면 이 붉은색 양털실은 그녀와 나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일까?

    기괴한 상황이 계속됐다.

    “지나가십시오.”

    “고마워요.”

    끼익-

    우리는 출국 심사를 거치지 않고, 공항 관계자들만 이용하는 통로와 출입문을 이용했다.

    “허어?”

    여권이 필요 없었다.

    “그래도 비행기 좌석은 예매해둬야 합니다. 다른 여행객의 좌석과 기내식을 빼앗을 게 아니라면.”

    “.......”

    내 옆자리,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편안히 앉은 마녀의 설명이 내 귀에 박히지 않았다.

    ‘여기가 현실이 맞나?’

    그만큼 내가 공항에서 받은 충격이 컸던 탓이다.

    그때,

    “넓은 비즈니스석에 앉아도 이 모자는 해결이 안 돼요.”

    마녀가 투덜대면서 검은색 고깔모자를 벗었다.

    “헉!”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나는 마음속으로 구구단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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