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삐쩍 마른 몸통에 붙은 두 쌍의 팔은 칼날처럼 생겼고, 마찬가지인 두 발은 허공에 살짝 떠 있는...
모든 검귀의 외견은 비슷하지만, 검술을 포함한 전투력은 눈에 띌 정도로 편차가 매우 큰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보네.’
내 눈앞의 검귀는 환자의 생전 경험과 지식을 계승한 걸까? 어쩌면 인간 시절의 이성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끼이익-!
“거참.”
이성이 남아있다면 환자가 제대로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반란이라면 그나마 복수로 이해했을 텐데, 자신의 의지로 독약을 마시고 따르던 자들을 몰살시킨다니?
챙!
검귀의 손을 가볍게 막았다.
끼긱...?!
“막혀서 놀랐어?”
친위대 때문에 호신술조차 익힐 필요가 없었던 공녀의 움직임은 꼬마들의 소꿉놀이처럼 난잡했다.
휙! 휙! 휙!
검귀의 빠르면서도 단단한 육체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겠지만, 비슷한 상대를 만나면?
“우선 다리.”
댕강!
올림픽 육상 국가대표인 나조차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른 두 다리부터 절단했다.
특히, 땅 위를 빙판에서처럼 질주하는 검귀의 능력은 사기였으니까.
“......”
소리를 못 내는 검귀는 입술만 뻐끔거렸다.
“아직 안 끝났어.”
댕강!
이어서 네 팔도 전부 잘라서 완벽하게 무력화시켰다.
“와아아아!”
“백작님! 만세!”
“아몰랑~!”
지켜보던 병사들도 나의 승리를 확신하고 환호성을 터트렸다.
“포박하라.”
“네! 백작님!”
누군가의 피로 더러워진 흙바닥에 처박힌 비엔나 수잔... 이었던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은 속단하기 힘들었다.
‘지금부터가 문제네?’
하인의 증언에 따르면 라누벨 환자는 독약을 마셨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 독약을 마셔도 안 죽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남해수처럼 검귀로 변한 것으로 보아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치료 실패.
그런데 환자가 죽었으나 살아있다. 꿈의 세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의 몸은 아직 건강하다.)
“......”
환자였던 검귀를 괜히 생포했다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좋게 생각해라. 검귀에 대해 알아볼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아...”
정말 긍정적이신데요?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환자가 얼마나 해충 같은 존재였는지는 주워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그러나 꿈이다. 현실이었다면 무기징역은 가볍게 뛰어넘을 중죄지만, 환자가 해충처럼 날뛸 수 있었던 이유도 꿈이었던 덕분이다.
어떤 남자가 받기만 하는 여자를 30년 넘게 사랑하겠는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관계다.
애초에 ‘로맨스’나 ‘로맨스 판타지’란 장르는 여성의 관점에서만 낭만. 남성의 관점에선, 아쉬울 게 없는 왕자와 황제에게 이기적인 여자랑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지옥이다.
“살고 싶어?”
“......”
머리와 몸통만 남은 검귀가 나를 지그시 노려봤다.
나처럼 빠르진 않지만, 느릿느릿 회복되던 팔다리는 절반쯤 재생된 팔뚝과 허벅지에 대못이 박힌 뒤부터 완전히 멈췄다.
“내 말을 알아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좌우로 저어.”
“......”
볼 수는 있지만, 내 목소리를 아예 못 듣는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흠.”
(머리에 손을 얹어라. 내가 기억을 읽어보지.)
오오!
정말 오랜만에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선배님이 먼저 나서주셨다.
(검귀에 흥미 있으니까. 살아있는 시체라고 불리는 강시와 좀비랑 비슷하단 말이지.)
동양에서는 강시.
서양에서는 좀비.
나라와 문화권마다 호칭이나 특징은 조금씩 다르지만, 영원한 젊음과 생명만큼 시체가 움직이는 상상은 누구나 다 하는 것 같다.
톡.
저항하지 못하는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흠...”
매번 생각하지만, 선배가 주술을 써도 느낌이 전혀 없다.
(...저항이 심하군.)
그래요?
(적성이 피아니스트였고, 부친을 무서워한 마오짜이가 쉬웠던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특이하군.)
그, 그래요?
남의 불편한 흑역사까지 전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섬뜩하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검귀 특유의 저항이라고 봐야겠지.)
“...저항하지 마.”
“......”
“계속 저항한다면 나를 노려보는 두 눈깔을 뽑아버리겠어.”
(협박해도 소용없다. 이건 검귀가 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죠?
(검귀의 저항을 뚫으려면... 아아, 그렇군! 그런 거였나! 세계! 세계였지! 나도 이제 한물 갔군. 이 간단한 이치를 간과하다니...!)
...뭔데요?
존경하는 선배님. 혼자만 알지 마시고 공유 좀 부탁합니다.
(세계다.)
네. 세계죠.
(...평소 같으면 답답한 놈이라고 한마디 해줬겠지만, 나도 이제야 눈치챘으니 넘어가 주마.)
감사요.
(세계는 허허벌판이 아니다. 너도 육체를 변명하는 식으로 너만의 세계에 무언가를 만들고 있지.)
맞습니다.
(그래서 공백이 없다.)
...예?
(네가 꿈속에서 성취를 이룰 때마다 세계는 조금씩 확장된다. 그리고 확장될 때마다 공터로 남겨두지 않고 바로바로 사용하지.)
제가 그랬나요?
(이론에 약한 네가 실전에 유독 강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아!”
불편한 진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런 거다.)
“젠장...”
전적으로 세계에 의존하는 나의 무능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네.
(후배야. 이 도시를 보아라. 가장 땅값이 비싼 노른자 땅에 광장이 왜 있다고 생각하냐? 이 공터를 활용하면 그럴싸한 건물을 5채도 더 지을 수 있을 텐데.)
“어... 어라?”
(현실의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 한복판에 공원이 왜 필요하냐? 공원이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역으로, 공원이 없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시에 수용할 수 있지.)
“...그러게요.”
나는 건축가나 도시디자이너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사람이 효율만 따지면서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정도로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너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뭐가요?
(이 답답한 놈아... 세계에 사용하지 않은 공터의 필요성을 방금까지 설명했는데 뭘 들은 거냐?)
아하!
(검귀의 세계에 침투하려면 공터가 많이 필요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서 시위하는 거랑 매우 비슷하지.)
그 말은 즉...
(네 생각이 맞다.)
“아...”
(세계의 일부를 불도저로 밀어서 광장으로 만들어야 해.)
지금의 내가 있도록 해준 능력을 포기하란 뜻이었다.
* * *
훈련이 필요했다. 쉽게 성취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 성숙함이.
(이번에는 포기해라. 그릇을 비운다는 건 대단히 힘들다. 능력을 교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
교체는 쉬웠다.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육체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손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물교환하는 느낌이니까!
그러나 이건 달랐다.
“으으...”
집에서 잘 이용하던 냉장고를 빼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더 큰 냉장고로 바꾸거나 대책이 마련된 것도 아니고 그냥 빼는 것이다!
이게 간단히 될까?
나는 냉장고(능력)의 편리함을 버릴 수 없었다.
“아몰랑 백작님~!”
“...공주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걸까?
피바다가 된 공국의 아름다운 내성을 포기하고, 도시 광장에 세운 임시막사에서 검귀랑 대화를 시도 중인 나를 아로니아 공주가 찾아왔다.
살랄라~
풍성한 치마에 가려진 다리가 안타까운 공주님이 수줍게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걱정했어요.”
“어흠!”
송선영이 공주님의 이런 부분을 본받... 아무것도 아니다.
“백작님. 이것이 공녀를 닮았다는 문제의 괴물이군요.”
“그렇습니다.”
공녀가 추악한 괴물로 변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는 중이지만, 추종자들이 연합의 음모론으로 몰아서 쉬쉬하는 분위기.
“확실히... 폐하의 방에 걸려 있는 공녀의 초상화랑 비슷하네요.”
“지금도 있습니까?”
“백작님께 치료받은 날에 바로 불태우셨어요.”
“그랬군요.”
팔다리가 절단됐어도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검귀. 하지만 아로니아 공주는 겁먹은 기색 없이 바로 몸을 돌리며 나에게 말했다.
“백작님. 시간이 되시면 저랑 카드게임 몇 판 어떠세요?”
“좋습니다.”
탁! 탁! 탁...!
그녀는 준비해온 낡은 카드 뭉치를 섞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수법이군.)
그러게요.
사람의 손때를 많이 탄 카드들은 뒷면이 똑같지 않다. 조금 노골적일 때는 커피나 술을 흘리며 묻은 얼룩이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기도...
그 말은 즉,
(조건은 똑같군.)
모든 카드의 뒷면에 표시되어있는 건 아니지만, 내 패의 일부가 공주에게 공개된 거나 마찬가지.
그녀의 패를 전부 볼 수 있는 내가 약간 더 유리하다.
그러나,
‘안 봅니다.’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관에서 민속놀이 취급받는 카드게임은 전시에도 젊은 참모들이랑 틈틈이 즐기며 연습했다. 깔끔한 숙청 후의 연합군 수뇌부는 나의 카드게임 친구들로 채워진 셈!
“백작님. 긴장하세요. 오늘은 쉽게 안 질 거예요.”
“기대하겠습니다.”
이런 엉큼한 작전을 짜온 공주를 쉽게 이기긴 힘들 것이다.
(건방지군. 정직하게 대결하면 네가 질 수도 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것 어때요?”
“좋습니다.”
소원.
굉장히 위험한 내기였지만, 이 세계에 뼈를 묻을 생각이 없기에 백지수표를 남발했다.
“명예를 걸고 약속하신 거예요?”
“물론입니다.”
“후후!”
“......”
승리를 확신하는 아로니아 공주랑 카드게임을 시작했다.
쿵! 쿵쾅!
그리고 우리의 이런 모습을 검귀가 가만히 구경하지 않았다.
“...뭐지?”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얌전히 있었는데, 유일하게 자유로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발악했다.
“백작님의 차례에요.”
“아, 네.”
검귀(환자)의 갑작스러운 이상행동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휙휙~
카드게임에 집중했다. 분명히 집중했는데...?
“이런...”
“후후후!”
“......”
이건 검귀 때문이다! 내 정신을 산만하게 한 검귀 때문에 진 거다!
(추하다, 후배야.)
“첫판은 제가 이겼네요~”
“공주님의 실력이 느셨군요. 이번에는 제가 섞겠습니다.”
“네.”
탁, 탁, 탁.
지금까지 나를 상대해온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다.
“......”
“......”
우리는 위험한 내기가 걸린 카드게임에 열중했다.
(너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외모부터 집안까지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유복하게 자란 공주가 너에게 바라는 것쯤은 뻔하지 않으냐?)
그게 위험한 겁니다.
(그거야 상대에 따라 다르지. 못생긴 공주랑 결혼해야 한다면 목숨 걸고 이겨야 하겠지만.)
“흐음...”
높은 인지력이 항상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쿵! 쿠웅! 쿵쾅!
자신의 두개골을 쪼갤 기세로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들이박는 검귀.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 카드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반면,
“후후!”
아로니아 공주는 깔끔히 무시하는 노련함과 여유를 보여줬다.
“...공주님. 무슨 소원인지 미리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머! 엉큼한 백작님. 당연히 비밀이랍니다~.”
“그렇군요. 흠흠!”
두 번째 판도 질 것 같은데?!
쿵! 쿵! 쿵!
검귀가 내 집중력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목뼈를 부러트리고 싶다.
(시끄러운 술집에서도 잘만 카드게임 하던 녀석이 변명은.)
“끙...”
풍성한 치마에 가려진 아로니아 공주의 다리를 직접 확인할 날이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그녀를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흐물흐물 꺾이는 기분인데?
“항복이신가요?”
“아쉽군요. 제가 이기면 공주님의 입술을 훔치려고 했는데.”
“...어?”
“하핫! 둘째 판도 제가 졌습니다.”
검귀 탓이다!
“엉큼한 백작님. 연합의 영웅께서 일부러 지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곧바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세 번째 판으로 넘어갔다.
바로 그때,
“...크아아아!”
두 눈구멍에서 눈물 대신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검귀의 입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
“무슨?”
이변을 눈치챈 나는 아로니아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감쌌다.
“거긴 내 자리야! 내 자리! 저년이 아니라...!”
“진정해.”
“비켜! 당장 비켜...!”
쑥쑥-
민둥산이었던 검귀의 머리에서 황금색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무슨?”
그 기괴한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 * *
배멀미 비슷한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나는 어두컴컴한 대학교 기숙사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