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59화 (160/232)

159화

수많은 미남에게 아낌없이 받은 선물을 팔아서 증축한 공국의 성.

공녀의 허영심까지 곁들여진 성의 예술성과 규모는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 세계관 최고였다.

“와아아아!”

“와아아!”

둥! 둥! 둥! 둥...!

연합군에 의해 슬라임 한 마리도 못 빠져나가게 포위된 성벽.

전쟁의 결과는 이미 나왔으며, 성벽 내부는 항복과 불복으로 의견이 갈린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항복? 웃기지 마라!’

‘뭐가 웃겨요? 이미 졌잖아요!’

‘그렇다고 사랑스러운 공녀님을 저 야만인들에게 넘기겠다니!’

‘살 사람은 살아야죠!’

‘닥쳐라! 아무리 내 딸이라지만, 정말 부끄럽구나!’

‘공녀가 우리에게 뭘 해줬는데요!’

‘...우리 같은 미천한 자들이랑 함께 살아주시지 않느냐!’

‘참 잘난 공녀네요! 퉤!’

‘이, 이년이...!’

‘아빠는 전쟁터로 끌려간 하나뿐인 아들보다 공녀가 중요해요?’

‘...당연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가족마저 순식간에 분열했다.

노인들은 결사 항전!

젊은이들은 빨리 항복!

중세시대에도 마을마다 ‘장로’라는 개념이 있긴 하지만, 현대만큼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젊은 남성’들은 전부 전쟁터로 빠졌고, 성벽 내에는 여성만 남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녀를 호위하는 친위대는 얼굴이 아닌 몸으로 뽑은 정예!

소란을 바로 제압했다.

‘공녀의 개들...!’

‘친애하는 공녀님을 모욕한 죄로 교수형에 처한다.’

‘공녀도, 너희도 끝났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때?’

‘집행하라!’

‘연합의 영웅이 너희를-’

덜컹.

그나마 큰 목소리를 내던 사내대장부 기질의 젊은 여성들은 공녀의 친위대에 의해 제압됐고, 광장 한복판에 목이 매달려 죽었다.

‘......’

‘......’

올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개처형을 당한 아가씨들이 불쌍했지만, 성벽 밖에서 인지력만으로 엿보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또한, 불쌍한 인간은 전쟁터에서 이미 무수히 많이 쓰러졌고,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은 평원 한복판에 적군이랑 함께 묻혔다.

그것이 전쟁.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서 희생을 더 늘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이 비극을 끝내는 것이다.

(기사도 실습도 끝났고?)

그렇죠!

“흠... 자발적인 항복을 기대하긴 힘들겠는걸.”

보통은 이렇게 열세면 내분으로 왕의 머리를 잘라서 바치며 항복하니까. 하지만 세계관 설정은 그 당연한 흐름을 거부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인공을 편애했다.

그러나,

“아몰랑 백작님. 공성전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기는 최고조입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언제든 성벽을 오를 수 있습니다!”

세계관 설정에 찌든 늙은이들을 치워버리고 새롭게 뽑은 젊은 참모들은 의욕이 넘쳤다.

그건 좋은데...

“강처럼 넓고 깊은 해자를 넘어서 절벽보다 높고 가파른 성벽을 사다리 타고 넘겠다고?”

전쟁 경험이 너무 없었다.

“성벽 위를 지키는 병사가 거의 없어서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방해 없이 성벽을 오를 수 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해자에 빠져 죽고, 사다리에서 떨어져 죽고, 동료에게 밟혀 죽고, 눈먼 화살에 죽고...

실전과 이론은 다르다.

공국의 방해가 없어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차출된 연합군 병사들은 저 끔찍한 해자와 성벽을 넘다가 사고로 많이 죽으리라.

“반론은 받지 않겠다. 지금부터 포로로 붙잡은 공국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성벽 앞의 해자를 메꾼다.”

“아!”

“오오!”

전쟁을 빨리 끝낼 생각뿐이었던 참모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끝까지 들어라. 그동안 우리도 놀지 않는다. 해자 근처까지 나무와 바위 등을 운반하며 포로들을 돕는다. 그리고 투석기를 밤낮없이 성벽 너머의 성을 향해 쏘아라. 성을 타격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위협만으로도 충분하니.”

“네!”

“네! 백작님!”

중세시대에는 이사와 이동이 매우 어려워서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관계가 좁다. 그리고 좁은 만큼 자신이 소속된 마을, 도시의 모든 구성원을 꿰고 있다. 족보를 파보면 먼 친척이고.

포로로 잡힌 공국의 병사들은?

방앗간 아들, 대장간 아들, 이웃 농지 손자, 친구의 사위, 사촌의 형제, 친구의 친구, 짝사랑하는 오빠...

어떤 식으로든 엮여있다!

“빨리 움직여!”

“굶고 싶어?”

“잡담하지 마!”

연합군의 모든 통솔권을 쥔 총사령관에 스스로 오른 내 명령은 곧바로 군대 전체에 하달됐다.

성벽 위는 그야말로 혼돈!

아무리 세계관 설정으로 공녀를 아끼고 사랑하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직접 공격해서 죽일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은 무리였다.

“활을 쏴라!”

“돌을 던져라!”

친위대가 아무리 윽박질러도,

“나, 나는 못 해...”

“차라리 나를 죽여...!”

공녀, 가족.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못한 시민들은 자살이란 극단적인 회피책을 선택했다.

“어머니!”

“누나...!”

성벽에서 몸을 던져 추락사한 가족을 눈앞에서 목격한 공국의 병사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가족을 몰아붙인 친위대와 이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버티는 공녀에게로 향했다.

“공녀는 나와라!”

“당장 항복해!”

“성문을 열라고...!”

하지만 공녀는 반응이 없었다. 이 정도 거리면 그녀가 뭘 하는지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궁전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마녀가 백작 영애처럼 탈출시켰을 수도 있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숲을 벌목하는 병사 중 용감한 자들을 조용히 모집하라. 성문을 열고 도개교를 내린 자에게는 큰 포상을 내릴 것이다.”

“그 말씀은?”

“시선이 이쪽에 집중된 틈에 다른 성문을 공략한다.”

내가 직접 할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는 인지력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녀 라누벨라가 간섭하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약에 그녀가 이번에도 나를 또 방해한다면...

(한다면?)

“......”

싸웁니다. 죽어서 현실에 악영향을 주더라도 싸울 겁니다.

마녀가 환자를 치료하는 나를 ‘방해’라고 여기듯, 나도 그녀를 ‘방해’라고 생각하니까!

언젠가는 결판을 내야 한다.

“바로 모집하겠습니다!”

“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녀 라누벨라.

나처럼 ‘나의 세계’로 몸을 보호하는 그녀를 찾는 건 쉽지 않지만, 공녀까지 감추진 못하리라.

“올 테면 와라.”

이전처럼 환자를 간단히 빼앗겨주진 않을 것이다.

* * *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걸까?

마녀는 오지 않았고, 용감한 병사들이 텅텅 빈 성벽을 올라서 도개교를 내리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

주인 잃은 군마를 모아서 급조한 연합군 기병대가 신속하게 성벽 안쪽으로 난입했다.

“비열한...!”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친위대가 달려왔으나, 부대도 아니고 일개 대원 혼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컥?!”

“아악?!”

푹! 서걱! 퍽!

공녀의 친위대답게 무예가 특출났던 그는, 기병을 포함한 병사 18명을 죽이고 장렬하게 사망했다.

이것이 현실.

연합군 병사들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18명은커녕 8명도 힘들었을 것이다.

“돌격.”

그래봤자 18명. 열린 성문을 통해 밀고 들어가는 연합군 병력은 18만을 가볍게 넘으니까. 마법사 같은 판타지가 아닌 개인이 막을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공녀를 잡아라!”

“와아아아!”

“성문이 열렸다!”

“우오오오!”

성벽을 넘은 연합군은 공녀가 과거에 살았으며, 현재는 별장으로 이용 중인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 내성 앞까지 쭉 밀고 들어갔다.

“와우?”

또 성벽이네?

공국이 먼저 선전포고하고 성 밖으로 나와서 다행이다. 이들이 웅크린 거북이처럼 성벽 뒤에 숨어서 농성을 선택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우리가 넘은 성벽이 계란후라이의 흰자라면, 눈앞의 웅장한 내성은 영양소가 풍부하고 맛있는 노른자... 공녀의 파라다이스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끝났지!”

외성이랑 달리, 내성은 해자가 없고 성벽도 높지 않았다.

방어보다는 미천한 서민들이 주인공의 낯간지러운 연애를 훔쳐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공녀님~!”

“공녀님...!”

외성에서 포로들을 공격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하던 친위대.

내성 앞까지 밀렸음을 눈치챈 그들은 서둘러 돌아왔으나, 연합의 대군에 압살당했다.

투항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죽는 그 순간까지 공녀를 외치는 충성심 하나만큼은 박수!

또한,

“저 용감한 백성들을 내려줘라.”

“네! 백작님!”

교수형 당한 뒤에도 경고성 본보기로 광장에 목이 매달려 있는 공국의 아가씨들.

부패하며 아름다움을 잃고 온몸에 벌레가 들끓기 시작한 그녀들을 모아서 간소하게 화장(火葬)했다.

화르륵~!

영혼이 있다면 다음 생(生)은 부조리한 설정이 없는 현실로 오기를...

‘아악?!’

‘사, 살려줘!’

‘꺄아앗?!’

그때, 내성에서 일하는 하인과 하녀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그 얘기는...

“본 백작이 아직 공격 신호도 내리지 않았는데 누구 짓이냐?”

“예?”

“백작님?”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화장을 함께 참관하던 참모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라고?

연합군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드디어 내분이 일어났나.”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항복하지 않는 공녀를 제압해서 연합군에 바치려는 자가 등장한 모양이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백작님! 저기!”

“헉! 내성에 불이!”

인지력으로 내성을 염탐하고 있던 나보다 한 박자 늦게 눈치챈 참모들이 일제히 이변을 알렸다.

“가자.”

“네!”

“노파심에 말하지만... 공녀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전해라. 그녀는 연합군에 협력한 모든 나라가 지켜보는 신성한 재판에 설 때까지 무사해야 한다.”

...라는 건 변명이고, 환자가 죽거나 고문으로 정신이 망가지면 현실의 내가 조금 곤란하다.

“알겠습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마지막에 실수해서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절대 방심하지 마라.”

“네! 백작님!”

“흠.”

선배님의 추측대로, 내 목소리에 힘이 있는 듯했다. 내가 지시하면 따지지 않고 무조건 따르니까.

덕분에 편하긴 한데, 감정이 없는 기계에 명령하는 것 같아서 찜찜했다.

(...후배야.)

네.

(치마 속에 감춰진 아로니아 공주의 늘씬한 다리를 상상하는 음란마귀로도 부족했냐? 편해서 불만인 변태 속성이 추가된 것 같구나.)

“오, 오해입니다.”

아로니아 공주가 아니라 송선영의 다리를 상상했다.

(그래. 둘의 다리를 비교했지.)

아니거든요?!

“백작님! 백작님!”

“왜 호들갑을... 아아, 성문이 알아서 열리는군.”

드르르륵-

내성의 성문이 열렸다.

이제, 우리가 데려가기 편하도록 예쁘게 포장된 공녀와 내란의 수괴가 모습을 드러낼...

“으아아!”

“사, 살려줘!”

“괴물이야!”

온몸에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하인과 하녀들이 성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괴물?”

기분이 싸했다.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말해라!”

나 대신 참모 중 하나가 내성에서 도망쳐나온 하녀에게 질문했다.

“아으으...”

“어서!”

“공녀님의 방에서 괴물이 나왔어요! 그리고... 그리고는... 우엑!”

누군가의 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하녀가 토악질했다.

“무슨...”

“모두 죽었어요! 공녀님 몰래 저를 사랑해준 질풍의 레빈도...!”

“지, 진정해라.”

“엉엉! 레빈! 레빈~!”

“......”

도저히 대화할 상태가 아닌 하녀 대신, 거친 숨이 조금 안정된 하인이 참모의 질문에 답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겁에 질린 공녀님께서 독약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아...!”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들의 입에서 ‘괴물’이란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검귀가 됐군.)

그러게요.

정신력이 빈약한 환자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모양이다.

‘대체 왜...?’

몰아붙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라누벨 환자는 꿈의 세계가 힘들어지면 깨어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송선영은 예외였지만, 자살할 만큼 힘들어지기 전에 현실로!

이게 공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안일한 판단과 계산을 반성했다.

“왔다!”

“괴물이다!”

“헉! 저건 뭐야?!”

끼기긱-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검귀가 성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 물러나라. 본 백작이 상대하겠다.”

스르릉-

허리춤에 찬 칼을 뽑은 후에 손바닥을 그어서 피를 묻혔다.

(어쩔 생각이냐?)

“그건...”

환자에게 불필요한 팔다리를 전부 자른 후에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