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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58화 (159/232)
  • 158화

    [8장-4절] 돌격! 돌격하라!

    전쟁은 똑같은 병력을 주고 대결하는 체스, 장기 같은 보드게임이랑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의 심리적인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하며,

    “부, 불이다!”

    “창고에 불이?!”

    “대체 누가...!”

    다 이긴 전쟁을 뒤집기도 한다.

    “제대로 한 건 했네.”

    내가 본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재가 널리 퍼져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나는 멀리서도 엿들을 순 있지만, 선배처럼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는 없다.

    그래서,

    “공녀님! 만세~!”

    “공녀님께 영광을!”

    “꼭 승리하소서!”

    보급의 총관리를 맡은 늙은이와 동조자들이 창고에 불을 지르기 직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염탐꾼처럼 온종일 엿듣고 있었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겠지만, 기마궁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치챘을 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뿌우우우~!

    뿌우우~!

    보급 창고의 불을 끈다는 이유로 한창 잘 싸우고 있는 병력에 전체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허! 한꺼번에 지랄이네!”

    공국을 밀어붙이는 이 상황에서 등을 보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등에 창과 화살을 꽂아달라고 유혹하는 거나 다름없다.

    심지어 이건 적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유인책도 아니다!

    (지겠군.)

    “...어쩔 수 없네요.”

    최대한 개입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전쟁에서 공국이 이겨버리면 라누벨 환자가 기고만장해져서 설득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그건 곤란하지.

    매우 쉬울 것 같아서 고른 작품의 세계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힘들어지면 사기당한 기분이리라.

    심지어 환불, 반품도 안 된다.

    “아몰랑 백작님...!”

    “백작님! 창고에 불이...!”

    “전군에 후퇴 명령이...!”

    상황이 실시간으로 매우 급변하면서도 안 좋게 흘러간다는 걸 연합군의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농부의 아들도, 어부의 사위도, 상인의 손자도, 무용수의 오빠도, 귀족 도련님도, 예비 신랑도...

    전쟁을 처음 겪어보고 배우지 못했어도 알 만큼 말이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후퇴는 없다! 잘못된 명령이다! 속지 마라! 싸워라!”

    퇴각 명령을 알리는 나팔 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지는 나의 외침.

    신체 능력이 인간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나이기에 가능한 반칙이다.

    “백작님!”

    “아몰랑 백작님!”

    부모 잃은 병아리처럼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병사들.

    살아서 무사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그들의 강렬한 염원이 느껴졌다.

    “외쳐라. 너희가 아직 살아있음을 외쳐라! 이길 수 있음을 알려라!”

    “오오!”

    “와아아!”

    내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정복 전쟁을 하며 배운 건데, 이 시대의 지휘관은 목소리 큰 놈이 최고다.

    전술? 지형? 책략?

    다 좋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병사들에게 똑바로, 신속하게 전달하지 못하면 쓸모없다.

    “싸워라...!”

    “싸워라~!”

    전장 구석까지 닿은 내 목소리는 퇴각 명령을 찍어 눌렀고,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일지 망설이던 병사들은 다시 진격했다.

    압도적인 수적 우위.

    공국의 장점은 우수한 무장과 풍부한 보급이었다. 하지만 보급된 무기가 조금 좋다고 해서 전투력이 2배, 3배로 뻥튀기되는 건 아니다.

    물론, 기사단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서 투자한다면 차이가 뚜렷해지겠지만, 공국의 병사들은 얼마 전까지 무기를 들어본 적 없는 민간인이 대부분. 정신 상태나 숙련도는 연합군이랑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용-

    “막아라! 친애하는 공녀님을 위해 너희의 목숨을- 컥?!”

    푹!

    내가 있다.

    “탐욕스러운 공녀가 일으킨 전쟁이다! 패배한 공국의 병사들은 무기를 땅에 버리고 항복하라...!”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에 공국의 병사들이 당황했다.

    패배한 공국.

    아직 패배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주변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 화살에 현장지휘관이 쓰러지면서 명령이 끊기고 처절한 비명과 욕설밖에 들리지 않는 열악한 환경...

    댕강! 툭! 쨍그랑!

    “항복!”

    “항복합니다...”

    “항복이요!”

    공국의 병사들도 평균 연령이 낮다. 부모와 공국으로부터 세뇌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패배한 전쟁에 목숨을 내던질 만큼 공녀에게 집착하진 않는다.

    또한,

    “돌격하라! 멈추지 마라! 우리가 돌아갈 곳은 불타고 없다! 오늘은 공국에서 먹고 마실 것이다!”

    “와아아!”

    “와아!”

    연합군 늙은이들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물러설 곳이 없는 완벽한 배수진(背水陣)이 되버렸다.

    모락모락~

    아군 본진에서 피어오르는 새빨간 화염과 시커먼 연기.

    바보가 아닌 이상, 후퇴하면 죽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연합군 병사들은 살기 위해 돌격했다.

    패배해도 죽지는 않는 공국의 병사.

    패배하면 반드시 굶어 죽는 연합군의 병사.

    싸움에 임하는 자세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돌격해라! 공국이 자랑하는 제2 기병대는 본 백작이 전멸시켰다!”

    “오오옷!”

    “아몰랑 백작...!”

    “영웅이 오셨다!”

    선전으로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었던 제2 기병대.

    수적 열세로 하락한 사기를 끌어 올릴 목적이었겠지만, 선전에 쓰인 기병대가 전멸하면서 희망은 더 큰 절망으로 바뀌었다.

    피용-

    “믿지 마라! 적들의 농간- 꾸엑?!”

    퍽! 철푸덕!

    내 말에 반박하는 공국의 지휘관들은 찾아다니면서 화살을 선물해줬다.

    “......”

    “......”

    오래 지나지 않아, 말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공국의 기사와 병장들이 입을 꾹 닫고 침묵했다.

    댕그랑! 찰캉!

    그리고 무기를 버리며 항복했다.

    “와아아!”

    “와아!”

    나의 선동으로 기울기 시작한 전장의 흐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를 더욱 크게 벌렸다.

    항복이 항복을 부추기고...

    악순환이 반복된 공국의 군대는 모래성처럼 폭삭 주저앉았다.

    “아주 좋아!”

    기사도의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지 못한 건 아쉽지만.

    (흠. 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군.)

    제가 말을 잘하죠!

    (...그런 의미가 아니다. 목소리 큰 쪽이 이길 만큼 전쟁이 호락호락한 줄 아냐?)

    기사단이 전멸한 시점부터 연합군에 유리한 전쟁이긴 했죠!

    공국의 군사력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기사단이 나에게 박살 난 시점부터 전쟁의 판도는 기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연합군의 기사단도 공평하게 전멸했지만, 이쪽은 애초에 지원을 거의 못 받아서 기대치와 비중이 매우 낮았으니까. 막말로, 연합군은 창 한 자루만 쥐어주면 편성이 끝나는 값싼 보병이 주력이었다.

    (주술적인 의미로 하는 말이다.)

    으음?

    (네 목소리가 이 세계에 물리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음파가 병사들의 심금을 울린다고 해야 할까...)

    오! 술법에 통달한 혈신답지 않게 과학적이시네요.

    (술법에도 질서와 규칙이 존재한다. 없었다면 술법이 아닌 전능이라고 불렸겠지.)

    “...돌격!”

    다시 한번 외쳤다.

    “와아아아!”

    “와아아!”

    여기에 호응하듯 연합군의 병사들이 홍수처럼 공국의 진영을 밀고 들어가서 깃발을 꽂았다.

    펄럭~!

    “흠...”

    술법에 통달한 선배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기세를 몰아서 미뤄둔 문제도 해결하기로 했다.

    “창고에 불을 지른 반역자들을 붙잡아라!”

    “네! 백작님!”

    자신들의 명령이 안 통한다는 사실에 당황한 지휘부 늙은이들이 줄줄이 붙잡혀왔다.

    “당장 이거 놔라!”

    “무슨 짓이냐!”

    “백작! 감히...!”

    모두가 공범인 건 아니다. 그래서 억울할 수도 있지. 하지만 새로운 사고나 내 뒤통수를 치기 전에 깔끔히 정리해두고 싶었다.

    ‘안타깝긴 해.’

    이들도 세계관 설정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공녀를 마음대로 다루려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될 필요가 있었고, 총사령관이 되려면 군대 내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으며, 기존의 지휘부가 ‘상식’만 지켜도 그게 힘들어서 치료를 안 했다.

    범죄를 유도했다고 할까?

    (후배야. 이래놓고도 악당이 아닌 무당이라고 우길 거냐?)

    선배님. 제가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요?

    (방조죄라고 들어봤냐?)

    하핫!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방조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아! 이런! 이 반역자들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군! 마음은 아프지만, 반역자들을 본국에 보낼 여력이 없다. 기둥에 묶고 태워버려라.”

    “아몰랑 백작...!”

    “공녀님! 공녀님~!”

    “놔라! 이거 놔!”

    산채로 태워죽인다는 말에 늙은이들이 발악했지만, 체격 좋은 병사들을 이길 순 없었다.

    금방 화형식이 준비되고...

    “내가 누군지... 아, 안 돼~?!”

    “백작! 죽어서도 저주하- 아아악...!”

    “공녀님! 공녀님~! 끄아아아!”

    활활!

    불쌍한 영혼들을 세계관 설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줬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 거냐?)

    무당입니다만?

    내가 아무리 과학신봉자라도, 영혼의 존재를 안 믿으면 안 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와아아!”

    “와아아아!”

    사람이 산채로 타죽고 있지만, 구경하는 병사들은 환호했다.

    이것이 중세시대.

    로맨스 판타지 작품들은 중세시대를 굉장히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그건 독자들의 입맛에 맞춰서 현실 고증을 제거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아몰랑 백작님!”

    “보고하라.”

    “포로들을 어떻게 할까요?”

    “마찰이 없도록 분리하되, 차별 없이 대우해줘라. 이 명령을 어길 시 교수형에 처한다.”

    “...네.”

    “못마땅한 모양이군. 이해한다. 동료들을 죽인 원수니까. 하지만 이건 점령전이 아닌 성전임을 명심해라.”

    “아!”

    “우리는 신성한 싸움 중이다. 탐욕스러운 공녀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공국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다...!”

    “명심하겠습니다, 백작님!”

    “흠.”

    술법에 통달한 선배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싶은데, 점점 신빙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목소리의 힘.

    나의 피와 살이 아닌 목소리에도 ‘나의 세계’가 깃드는 듯했다. 그 농도가 공기처럼 매우 옅긴 하지만.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죠.

    (네가 성장할수록 세계의 힘도 강해진다는 증거다. 과거에 네 목소리에는 이만한 설득력이 없었으니까.)

    “성장...”

    (마녀가 신경 쓰이냐?)

    당연하죠.

    마녀 라누벨라.

    나보다 훨씬 먼저 환자들의 꿈속을 들락날락한 그녀의 ‘세계’는 얼마나 강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의지만으로 세계의 지형을 편집할 정도니 너보다 강하긴 할 거다.)

    “끙...”

    남해수의 꿈속에서 경험했다.

    마녀랑 대화하는 도중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바닥이 사라지면서 교수형 당할 뻔했지!

    물리적인 위협은 안 됐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신(神)에게 경고받은 기분이었기에.

    “오늘은 여기서 숙영한다.”

    “네! 백작님!”

    공국은 땅이 기름진 축복받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지만, 덩치가 매우 작은 나라에 속한다.

    재정비?

    내가 장담컨대, 영토 중앙의 아름다운 성을 지키는 문지기와 치안대, 공녀의 명령만 따르는 친위대가 공국에 남은 마지막 병력일 것이다.

    “공짜는 늘 옳지. 공국의 곳간을 활짝 열고 축제를 벌여라! 오늘 밤은 아무 걱정 없이 푹 쉰다.”

    “오오! 네! 아몰랑 백작님!”

    패전 소식을 접한 라누벨 환자의 반응이 궁금하군.

    오늘은 푹 쉬고, 공국의 수도에 도착하는 모레 저녁쯤에 인지력으로 훔쳐볼 수 있으리라.

    “백작님.”

    젊은 친구들로 다시 채운 사령부 막사에 기사가 들어왔다.

    “뭐지?”

    “공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아, 항복하겠다는 사절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아몰랑 백작님께 1대1 결투를 신청하겠다고 합니다.”

    “격이 떨어지는 애송이를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전하라. 본 백작이랑 결투하고 싶으면 공녀의 기둥서방쯤 돼야 한다고 말이야.”

    “네! 백작님!”

    “이젠 별 시답잖은 새끼가...”

    내가 반항적인 포로들을 움직이는 과녁으로 활용하는 연습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백작님!”

    “또 뭐지?”

    “자신을 공녀의 38번째 남자라고 소개한 기사가...”

    “나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고?”

    “그렇습니다.”

    “......”

    38번째면 내연남보다도 훨씬 먼 사이가 아닐까?

    “공녀가 아끼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남자만 상대해준다고 해라.”

    “네! 백작님!”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조차 안 나오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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