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57화 (158/232)

157화

“그분이 오셨다!”

“연합군의 구세주!”

“영웅 아몰랑...!”

전투적인 판타지 요소가 없는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개인이 기사단을 몰살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나란 존재 자체가 반칙.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미남들이 무조건 주인공에게 집착하는 설정이 더욱 말도 안 되는 반칙이잖아?

즉, 나는 떳떳하다!

“흠... 왔는가.”

“크흠!”

“수고했네.”

동화책에 나올 법한 업적을 세운 나에게 환호하는 병사와 기사들이랑 달리, 지휘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니, 무관심하면 차라리 다행이리라.

“영웅이라니...”

“공녀님께 어찌...”

“이거 참...”

공녀가 소속된 공국을 상대로 잘 싸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귀족과 지휘관이 많았다.

원인은?

‘여긴 연령대가 높네.’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와 기사들은 평균 연령이 낮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30대 초반? 그래서 그들은 세계관 설정의 영향을 안 받는다.

반면,

“지금이라도 휴전이 어떤가?”

“공녀님께 칼을 들이밀다니...”

“이건 상처뿐인 전쟁이야.”

두 발로 걷고 명령할 힘만 있으면 되는 연합군 지휘부는 노인들로 바글바글했다.

뼛속까지 공녀의 추종자!

그들의 연륜과 지혜는 틀림없이 쓸모 있지만,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글러 먹었다.

더 큰 문제는?

“여러분은 군인입니다. 첩자로 의심될 수 있는 사심 섞인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해주십시오.”

“허! 젊은 백작이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가!”

“아몰랑 백작! 폐하의 신임만 믿고 기고만장하군!”

“전쟁은 개인이 싸움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가진 능력보다 자존심이 강해서 이성적인 대화가 되질 않았다.

“좋습니다. 아직 젊은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희에게 후퇴나 휴전이 없다는 것만 기억해주십시오.”

“......”

“......”

지휘부의 노인들은 주름으로 가득한 이마를 찡그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반박하진 않았다.

그거야말로 첩자 혹은 반역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 저는 기사단이 전멸했기 때문에 따로 별동대를 운영할 예정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별동대? 아몰랑 백작! 병력 차출을 누구 마음대로...”

“1인 별동대입니다.”

“하아?”

그게 뭔 개소리냐고 묻는 사령관에게 미소로 회답한 후에 지휘부 막사를 빠져나왔다.

(의외로군)

뭐가요?

(조만간 사고 칠 것 같은 저것들을 싹 죽이고 공국에 혐의를 뒤집어씌울 줄 알았지.)

“하핫!”

선배가 크게 오해하고 계시는데, 저는 악당이 아니라 무당입니다.

(저것들이 사고 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얘기군.)

네.

그리고 어쩌면, 저 늙은이들이 사고 칠 기회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 * *

야외에 친 천막에 방음효과가 있을 리 없잖은가?

그래서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지휘부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건 적의 진영도 마찬가지.

내 인지력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공국의 지휘부에서는 심각한 대화가 한창 오가고 있었다.

‘기사단의 피해가 극심하오!’

‘계집처럼 화장하는 사내새끼들로 기사단을 꾸린 탓이야...!’

‘기사가 얼굴로 싸우니 이따위지!’

‘불경하다! 사랑스러운 공녀님의 부탁은 절대적이다!’

‘크흠!’

세계관 설정 탓에 제정신이 아닌 건 공국의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힘으로 밀어붙이긴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공국의 기사들이 볼링핀처럼 너무 잘 쓰러지는 것 같았는데...

얼굴만 보고 뽑은 기사단?

방산 비리만큼 안타까운 뒷사정이 있었다.

‘공녀님의 친위대가 필요해.’

‘아! 친위대!’

‘하지만 그들은 공녀님의 명령에만 따르지 않는가?’

‘공국이 망하면 공녀님께도 좋을 게 없지. 그 부분을 잘 설명하면 친위대도 이해해 줄 거야.’

‘그랬으면 좋겠는데...’

친위대.

내가 쓰러트린 공국의 기사단은 올림픽 선수로 따지면 2군.

1군에 해당하는 최정예로 구성된 친위대는 근위병처럼 공녀를 호위하는 임무만 맡는 듯했다.

‘사령관님!’

‘오! 드디어 왔나!’

‘공녀님께서 지원군으로 제2 기병대를 보내셨습니다!’

‘제2...?’

‘네! 제2입니다!’

‘맙소사! 칼도 간신히 드는 그 비실비실한 새끼들로 구성된 제2 기병대를 보내셨다고? 그나마 남자 구실을 하는 제1도 아니고 제2를...?’

‘네. 사령관님!’

‘허허... 현명한 공녀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었는가?’

‘제2 기병대는 기사단처럼 전부 잃어도 아깝지 않으니 승리만 가져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군. 그동안 자애로운 공녀님께서 봐주셨지만, 밥값도 제대로 못 하는 제2 기병대를 쳐내기로 드디어 마음을 먹으셨군. 힘든 결단을 하셨어.’

‘그렇습니다!’

공녀 한정으로 굉장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령관이었다.

‘그 여리신 분이...’

‘지금쯤 울고 계신 건 아닌지...’

‘이토록 어려운 결정을...’

나름 똑똑한 인간들로만 구성됐을 참모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정이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군.)

그러게요.

저 바보들의 명령을 따르는 젊은이들의 운명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일은 이렇게...’

‘기병대를...’

‘반드시 성공...’

이 전쟁만 이기면 공국이란 조그마한 껍데기를 부수고 대제국으로 성장할 게 확실하기 때문일까? 공국의 지휘부는 연합군보다 열성적이었다.

반면,

‘옳은 전쟁인가?’

‘폐하는 무슨 생각인지...’

‘공녀님께 불경하다!’

연합군 늙은이들은 내일 전술보다 공녀의 마음이 더 중요한 듯했다. 내가 엿듣는 장소가 지도부 막사만 아니었다면, 공녀를 아끼는 철학자들의 모임으로 착각했을 것 같다.

어째서 공녀님을 적대하는가?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철학적인 주제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 * *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의 이틀째를 맞이했다!

적당한 습도, 맑은 하늘, 눈부시지 않은 햇살, 시원한 바람...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잘 해보자.”

“히이잉!”

군대의 두뇌를 맡은 바보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나는 ‘기사도’만 익히면 그만이다.

“잘 부탁합니다!”

(오냐.)

오늘은 위대한 선배님께 가르침을 받을 예정이다.

예전에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궁기병의 정석을 배울 기회가 있었으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미뤘다.

그리고 이때, 나중에 배울 목적으로 선배가 기마궁술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을 훔쳤다.

“아주 좋아.”

나의 오늘 연습 상대는 라누벨 환자에게 버림받은 제2 기병대.

단단한 갑주로 온몸을 보호하는 기사단은 화살이 안 통하지만, 기동력과 지구력이 장점인 기병대는 화살과 창에 매우 취약하다.

(궁술도 아직 제대로 익히지 않은 녀석이 두 단계쯤 건너뛰어서 뭘 하겠다는 건지...)

“하핫!”

기마궁술을 익히면 궁술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죠!

(둔재에게 천마신공을 줘서 주화입마에 빠트리는 소리를 하는군.)

“오네요.”

공국의 전술을 전부 엿들은 덕분에 제2 기병대의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해두고 있다.

기습은 나 혼자!

무기는 활 한 자루!

굳이 해보지 않아도, 허공에 날릴 화살이 아주 많아질 예정이라서 잔뜩 챙겨왔다.

(이론은 어젯밤에 전부 설명했다. 지금부터는 답답한 네가 실수할 때마다 조언해주마.)

“감사합니다!”

잘생긴 얼굴을 자랑하듯 투구도 안 쓰고 한껏 노출한 미남들이 말을 타고 질주해오고 있었다.

무기는?

허리춤에 찬 칼 한 자루뿐!

여성의 잘록한 허리를 잡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그들의 얄팍한 팔로는 장시간 창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공국의 제2 기병대.

무장이 너무 가벼워서 바람을 불면 훨훨 날아갈 것 같다.

“예정대로네.”

전투력이 없다시피 한 그들의 용도는 연합군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식량 창고를 불태우는 것이다.

불태운 후에는?

알아서 후퇴!

이들은 연합군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서 식량 창고에 불만 지르면 역할이 끝나는 소모품인 셈이다.

“공녀님을 위해!”

“나의 사랑을 그대에게!”

“승리를 선물로~!”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 제2 기병대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자신들을 버린 공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숲길을 달리고 있다.

“거참...”

그들의 접근을 확인한 나는 말에 탄 상태로 활시위를 당겼다.

끼익-

내가 노리는 표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흔들림이 없도록 숨을 참고, 가장 큰 변수인 바람을 느끼고...

자! 쏘세요!

피용-

“컥?!”

푹!

명중했다!

내가 노린 금색 미남 옆에서 달리던 은색의 미간을 꿰뚫긴 했지만, 문제없다. 다음에 더 잘 쏘면 되니까!

“기습이다!”

“어디?”

“정체를 밝혀라!”

화살 한 발에 우왕좌왕하는 제2 기병대는 훌륭한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갈색 미남...!”

또 쏘세요!

피용-

“크억?!”

“히이잉~?!”

푹!

회색 미남이 화살 박힌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흠. 안장을 붙잡는 허벅지의 힘이 좋아서 자세는 문제없군.)

감사요!

(너의 문제는 극단적으로 연습이 부족한 궁술이다.)

즉, 궁술만 확실히 익히면 기마궁술도 문제없다는 거네요?

(말이야 쉽지.)

“하핫!”

이럴 줄 알고 화살을 넉넉하게 챙겨왔다. 다 떨어지면 본진으로 돌아가서 보급받으면 그만이고.

피용-

우왕좌왕하는 적들이 나를 찾아줄 때까지 계속 제자리에서 쐈다.

명중률은 20% 정도?

기병대가 뭉쳐있어서 지금은 좀 빗맞아도 누군가가 대신 맞아줬지만, 숫자가 줄어들거나 산개하면 이런 요행도 힘들어지리라.

그리고 마침내,

“저기다!”

“저쪽이다!”

“쫓아!”

나를 발견한 기병대가 용감하게,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불나방처럼 일제히 돌격해왔다.

두두두-

두두-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식량 창고를 불태운다는 계획은 사라진 지 오래. 군인으로서는 실격이었다. 애초에 군인도 아니지만.

“가자.”

“히이잉!”

평소의 나였다면 도망치지 않고 맞부딪혔겠지만, 오늘은 기마궁술을 연습하는 날이다.

(후배야. 허리 병신이 되고 싶냐? 여기선 괜찮지만, 현실에서 몸을 그렇게 틀면 척추에 무리가 간다.)

“끙...”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면서 선배의 잔소리도 늘어났다.

피용-

“악~?!”

그만큼 실력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헌터물 세계의 S급 초능력 ‘가속’도 잡아낸 나의 육체는 평범하지 않다.

기마궁술?

군마가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제자리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체감하는 말의 속도는 너무 느려서 아무런 장애가 안 됐으니까. 불편한 안장에 앉아서 활을 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흠. 후배야.)

네.

(네가 기마궁술을 익히려면 말보다 훨씬 빠른 이동수단... 여자친구의 스포츠카에서 연습해야 할 것 같다.)

시속 80km인데요?

이 말이랑 큰 차이가 없다.

(운전 실력이 늘면 언젠가는 연습에 도움이 될 거다.)

송선영이 시속 100km를 넘기기 전에 동계 올림픽이 열릴 것 같아요.

피용-

“악~?!”

“비겁한 놈! 정정당당하게- 컥...?!”

“젠장! 나는 퇴각하겠어!”

나의 연습용 표적이 되어준 제2 기병대가 추적을 멈추고 몸을 돌려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오오!”

내가 기마궁술을 연습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순간이다.

추격전!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내가 압도적인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눈 뜨고 당했던 끔찍한 전술.

‘사냥의 시간이 왔구나!’

나에게 등을 보인 미남들을 향해 아낌없이 화살을 선물해줬다.

피용-

“아악?!”

“히이잉~?!”

털썩, 풀썩, 철푸덕...!

빗맞아서 말의 엉덩이에 명중할 때도 있지만, 처음이랑 비교하면 실력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또 말하지만... 너는 실전에 정말 강하군.)

“그러게요!”

내가 착실하게 기마궁술 실력을 키우는 사이,

뿌우우우!

뿌우우~!

공녀를 사랑하는 연합군 늙은이들이 진짜로 사고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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