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출처는 정확히 모르지만, 예전에 어딘가에서 들은 기억이 있다. 기사는 낙마하면 죽는다고.
‘그 이유를 알 것 같네!’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철갑옷을 온몸에 덮은 통조림 같은 상태로 2m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아무리 단련된 육체라도 허리가 무사할 리 없다.
“창을 다오.”
“네. 스승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종자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기사.
빈틈없는 철갑을 온몸에 두르고, 군마 위에 오르고, 긴 창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면서 쥐고, 마지막으로 군마의 고삐까지...
이것들을 종자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나는?
“헉! 저, 저럴 수가!”
“아몰랑 백작님?!”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근육이 초고밀도로 압축된 내 육체는 매우 무겁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가죽옷처럼 두른 외피는 검귀의 칼날을 막아야 해서 더욱 튼튼하게, 살인적인 무게를 자랑한다. 이까짓 철판 통조림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수준.
“히, 히이잉~?!”
후덜덜-
그래서 군마가 무게를 버티질 못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나를 태운 직후부터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불안하게 떨기까지!
“흠...”
(후배야. 동물 학대는 그만하고 포기할 건 포기해라.)
검귀가 갑자기 난입하면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멀뚱멀뚱 서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
“쩝.”
무장해제는 쉽다.
하지만 내 몸을 보호하는 가죽옷을 다시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왜?
나의 세계는, 근본은 인간이니까. 순수한 인간으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을 억누르면서 형태를 고정해야 한다. 이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
(잔말이 너무 많구나. 네 수양이 부족한 탓이지.)
“킁.”
결론은 연습 부족이다.
스르륵...
검귀가 무섭다고 기사도를 안 배울 순 없기에 무장을 해제했다.
존엄성을 지켜주는 속옷 한 장만 남기고 말끔히 제거!
“푸르르!”
이제야 살만해진 군마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다그닥다그닥.
내가 무장해제를 안 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기사보다 무거운 마갑(馬甲)을 해제하면 된다.
‘그건 안 되지.’
하지만 그러면 군마가 화살과 창에 너무 취약해져서 적진을 절대 돌파할 수 없다.
“저... 백작님?”
임시로 내 종자로 배정된 소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힘드십니까?”
“힘들어 보여?”
“아, 아뇨! 너무 편안해 보이셔서 여쭤본 겁니다.”
“죽음의 고통과 경험을 3번 정도 넘기면 너도 할 수 있어.”
“아! 감사합니다!”
내 말을 은유적인 가르침으로 곡해한 종자가 매우 고마워했다.
뿌우우우-!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가볼까.”
기사를 포함한 모든 기마병과는 기동력이 생명이다. 그중에서도 중장기병에 속하는 ‘기사’는 체력 소모가 극심하기에 전속력으로 한 번 돌진하면 끝!
그 후에는 본진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두 번, 세 번 돌진?
승리 혹은 패배가 확실해서 퇴각할 체력을 남겨둘 필요가 없을 때나 하는 퍼포먼스다.
“아몰랑 백작님.”
“네.”
“백작님은 첫 돌격 후에 본진으로 귀환하십시오.”
“저만 돌아가란 겁니까?”
왜?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자가 풍부한 공국이 유리해집니다. 그리고 연합군은 사령관만 5명이나 되는 탓에 명령의 혼선과 불협화음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전쟁을 오래 끌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겠죠...”
“그래서 빨리 결판을 내야 한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중에 이탈해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저희는 적군의 좌익을 무너트리고 보급품이 쌓인 후방을 돌파한 후에 사령부로 진격할 겁니다.”
“워~”
안 싸우고 달리더라도 군마가 탈진해서 쓰러질 만큼 긴 동선이었다.
기동력을 상실한 기마병은?
죽는다.
“폐하께서는 전쟁에서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작님만은 꼭 살려서 귀국시키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런 짓을 하면...”
“동맹국들에서도 만장일치로 동의한 내용입니다. 그만큼 백작님을 기다리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많습니다.”
“어흠!”
그 아가씨들은 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싶은 모양이다!
“가시죠.”
“네.”
여러 왕국에서 긁어모은 탓에 통일성 없는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진형을 갖췄다.
다이아몬드 대열.
돌파력은 삼각형 대열보다 떨어지지만, 안정성과 방어력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신호다...!”
쿠구구구-
두두두-
군마에 오른 기사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은 적군의 좌익, 인간과 방패로 세운 벽의 왼쪽 끄트머리부터 무너트리는 전략이다.
“기사단!”
“온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날뛰도록 좌시할 공국이 아니었으니!
시간을 끌기만 해도 이긴다는 사실을 잘 아는 공국의 기사단은 후방에서 체력을 보존하며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회피나 우회는 불가.
말은 기계가 아닌 생명이기 때문이다. 뭉친 상태에서 뒤엉키지 않고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숙련과 기술이 필요하다.
남은 길은?
“속도를 높여라!”
“연합군을 위해~!”
기사들은 두려움을 떨쳐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훌륭하군.)
칭찬에 인색한 선배마저 인정했다.
“...흥분되네.”
기사의 숫자는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공국의 기사들은 무장이 좋고 체력도 유리했다.
척! 척! 척!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훈련하며 쌓은 명령 체계는 잡음이 없었다.
잡음이 없다는 건?
우리처럼 다른 기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훈련하던 속도로, 최고의 속도로 돌격할 수 있다.
“공국을 위해!”
“공녀님을 위해~!”
두두두-
쿠구구구-
지축을 울리며 두 중갑기병대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히이잉~?!”
“히잉~?!”
쾅! 푸직! 콰당!
그것은 의도된 교통사고였다. 긴 창에 꿰뚫린 기사들이 낙마하고, 충격으로 앞다리가 부러진 군마가 뒤집히며 공중제비하는 진풍경마저 벌어졌다.
“헤에~”
공국의 기사가 내지른 창이 정화히 내 복부를 노렸다.
말안장에 앉은 상태에서 회피할 수 있을까?
‘이제야 이해되네.’
나를 가르쳐준 기사는 완벽하게 피할 생각은 포기하라고 했다.
그 대신,
드르륵-
뾰족한 창끝이 갑옷을 관통하지 못하도록 상체만 살짝 틀어서 충격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마저도 싫으면?
푹!
“커억-?!”
상대 기사를 내 창으로 먼저 찔러서 낙마시켜야 한다!
(후배야. 기술이 아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다만?)
“하핫!”
일단은 살고 봐야죠!
“아아악?!”
“커억?!”
“으아아아~?!”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공국의 좌익을 무너트리고 후방을 교란한 후에 사령부로 돌진?
‘꿈 깨라!’
연합군은 그 첫 단추도 못 맞추고, 공국의 기사들에게 막혀서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기술이 아닌 힘으로 돌파한 나를 포함한 생존자는 극소수.
그 많은 기사가 단 한 번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반면,
“공국에 영광을!”
“공녀님을 위하여~!”
공국의 기사들은 수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절반 넘게 생존했다.
두두두-
쿠구구구-
놈들은 완전히 와해된 우리를 무시하고 연합군의 우익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젠장...!”
“오! 신이시여!”
“아, 안 돼!”
저것들이 난입하는 순간, 팽팽했던 전선의 균형이 단숨에 깨져버리라.
원인은?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양성된 공국의 기사 전력은 예상보다 강했고, 연합군은 상대적으로 너무 약했다.
“쫓아가죠!”
“백작님?!”
나는 망연자실한 기사들을 놔두고 홀로 공국의 기사들을 추적했다.
“푸르르릉~!”
“힘들지?”
단 한 번의 돌격이었지만, 내가 길들인 야생마는 매우 지쳐 있었다. 짊어진 무게가 너무 많은 탓!
그렇다면...
“이젠 필요 없지.”
휙~
쓸데없이 무게만 차지하는 갑옷을 하나하나 벗어서 버렸다.
(기사를 포기했군.)
“일단은 이기고 봐야죠!”
휙~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말을 지켜주는 마갑도 싹 벗겨냈다.
“히이잉!”
“가자!”
다그닥다그닥!
몸이 가벼워진 야생마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중장기병에서 경기병으로!
경주마 같은 속도는 안 났지만, 기세등등한 공국의 기사들이랑 거리를 좁힐 정도는 됐다.
“오! 나를 신경 써주네.”
두두두-
진형에서 이탈한 기사 3명이 방향을 틀어서 내게 돌진했다.
저들의 창에 찔리면 나도 무사할 수 없으리라.
‘안 찔리면 그만!’
일단, 손에 쥔 창을 던져서 한 명을 낙마시켰다.
“......”
“......”
하지만 남은 두 기사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창을 내질렀다.
한 명은 나를 향해.
다른 한 명은 말을 향해!
“이런...”
당연히 나를 노릴 줄 알았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젠 어쩔 거냐?)
“미안.”
하나뿐인 무기를 던지는 게 아니었다. 안 던졌다면 기사의 창을 쳐낼 수 있었을 테니까.
푹!
창에 목이 꿰뚫린 야생마가 고꾸라졌고, 나는 쓰러지는 말의 안장을 박차며 가볍게 창을 회피.
옆으로 옮겨탔다.
“빌릴게.”
“헉!”
빠각!
화려한 금장식으로 멋을 더한 공국 기사의 투구를 힘껏 후려쳤다.
“이것도 빌릴게!”
“......”
혼절한 기사의 창을 빼앗은 후에 1인승 안장에서 밀어냈다.
철푸덕!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의 기사가 크게 회전하면서 동료를 죽이고 말을 빼앗은 나에게 돌진했다.
“이놈...!”
“멋진걸.”
나의 잘못된 판단에 희생된 야생마에게 미안하지만, 족보 있는 뛰어난 혈통끼리 교배해서 태어난 공국의 군마는 매우 우수했다.
안정적인 승차감!
혈통 외에도 조련사의 꾸준한 정성과 훈련도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 못 버티고 쓰러질 것 같아서 자제했던 공격 방식을 채택해도 문제 없으리라.
부웅-
찌르는 용도인 긴 창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히이잉?!”
안정적이었던 공국의 군마가 무게중심을 잃고 살짝 휘청하긴 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그 정도면 됐다.
“뭔-?”
빠각!
잘못된 창의 사용법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 공국의 기사.
투구를 쓴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야구공처럼 훨훨 날아갔다.
탁.
“좋아.”
그가 남긴 창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낚아채서 왼팔 옆구리에 끼었다. 이걸로 양손에 한 자루씩.
혼자서 2인분을 할 준비가 됐다!
(뻔뻔한 후배야. 세상에 그런 기사가 어디 있냐?)
“하핫! 일단은 이기고 봐야죠! 가자!”
“히이잉~!”
공국의 기사 셋에게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쾅! 뿌직!
오른쪽 옆구리를 관통당한 연합군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패배 확정!
그건 곤란하다. 라누벨 환자 ‘비엔나 수잔’의 파라다이스를 무너트리려면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니까.
“간다..!”
부우웅-
부우우웅-
연합군 진영을 돌파하고 재정렬하는 공국의 기사단. 그 후미로 돌격한 나는 양손에 한 자루씩 쥔 창을 부채꼴 모양으로 크게 휘둘렀다.
“뭔-”
“무슨-”
퍽! 퍼억! 빠각-!
단련된 성인 남성도 간신히 들고 있는 게 고작인 돌격용 장창(Lance).
하지만 나에게는 다루기 적당한 무게감의 꼬챙이였다.
“하핫!”
속도를 줄이고 재정비 중이던 공국의 기사들이 볼링핀처럼 쓰러지며 줄줄이 낙마했다.
훌륭한 기사, 뛰어난 기사, 노련한 기사, 용감한 기사, 고귀한 기사...
인간의 탈을 쓴 괴물 앞에선 모두가 평범한 인간이었다.
“으아악?!”
“사, 살려?!”
“히이잉~?!”
푹! 콰직! 우직...!
공국이 자랑하는 기사단이 전멸하기까지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후배야.)
네!
(올림픽에서도 이럴 건 아니지?)
물론이죠!
그때는 올림픽 규정 때문에 창을 한 자루밖에 못 든다.
(하아...)
왜요?
(말을 말자.)
“네!”
전쟁의 첫날은 양측의 기사단이 공평하게 전멸한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