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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55화 (156/232)
  • 155화

    [8장-3절] 시작해보자!

    공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선물을 쏟아부은 여러 왕국.

    다양한 독자층의 취향을 반영한 ‘병약한 모범생’이란 설정을 가진 미남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장수해서 자발적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

    “허... 졌네. 젊은 백작이 카드게임을 정말 잘하는군.”

    “멋진 대결이었습니다.”

    “큼! 마음에 안 내키지만, 약속대로 치료해보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톡!

    개인의 노력으로 절대 깰 수 없는 원작 세계관 설정.

    그 세계의 신(神)일지라도 벗어날 수 없는 법칙이 간단한 접촉만으로 파괴됐다.

    “아아!”

    설정에서 해방된 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지독한 부조리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의 탄성을 터트리고, 지난날의 자신을 후회하며,

    주르륵...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여봐라! 공녀에게 보낼 예정이었던 선물을 거두어라, 당장!”

    “하, 하오나...”

    “짐보다 공녀가 무서운가?”

    “아닙니다! 당장 거두겠습니다!”

    내가 원작의 설정을 깨긴 하지만, 똑똑하다는 설정의 인물이 갑자기 멍청해지진 않는다.

    지능은 두뇌 문제.

    판타지가 아닌 물리!

    내가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 세계의 SSS급 괴물 코끼리 ‘에이션트 블랙 엘리펀트’에게 물리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이유랑 똑같다.

    “아몰랑 백작.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이 은혜는 위기를 극복한 후에 갚도록 하겠네.”

    “마음만 받겠습니다.”

    무슨 보상을 받더라도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지니까!

    “이 사람이... 보상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지금은 힘을 합쳐서 공국의 야욕을 꺾어야 할 때이니.”

    “지당하십니다.”

    문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공녀 탓에 애써 외면했던 국가의 위기.

    무식하고 멍청한 미남을 좋아하는 독자가 있을까?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원작 작가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훤칠한 외모.

    공녀 앞에서만 바보가 되는 천재.

    노년에도 식지 않은 정력(精力)!

    모든 미남의 공통점이었다. 그래서 세계관 설정에서 해방된 직후의 생각과 계획도 비슷했다.

    “백작. 이미 은혜를 입은 몸으로서 염치가 없으나, 짐의 쌍둥이 동생도 치료해줄 수 있겠는가?”

    “아!”

    이 미남은 쌍둥이 설정이었나?

    공녀를 얻기 위해 쌍둥이가 피 터지게 싸웠을 것이다.

    그래도 곧바로 동생부터 챙기는 걸 보면, 공녀 문제만 내려놓으면 우애가 깊은 형제였으리라.

    “부탁하네.”

    “자리를 마련해주신다면.”

    “오오! 정말 고맙네! 짐에게 여식이 있었다면 그대에게 줬을 텐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폐하!”

    딸은 물건처럼 주고받는 상품이 아닐뿐더러, 그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행동입니다, 폐하!

    (희한하군. 네 녀석은 딱히 호감형이 아닌데.)

    사람은 성장하는 법입니다!

    (과연... 협상에 유리하도록 페로몬을 풀풀 풍기는 음란마귀 신체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군.)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요...

    (좀 더 지켜보면 알겠지.)

    “백작.”

    “네.”

    “이번 위기를 극복하면 꼭 소개해주고 싶은 아이가 있네.”

    “그렇습니까.”

    “이기적인 남자 때문에 자신의 혈통도 모른 채 시골 귀족의 딸로 평범하게 자란 영애라네. 올해로 꽃다운 17살이지.”

    “...그렇군요.”

    세계관 설정 탓에 공식적으로는 독신이지만, 뒤에서는 왕가(王家)의 혈통을 유지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왕국A에서는 조카를 양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다른 나라들도 비슷할 것이다.

    “참고만 해주게.”

    “알겠습니다.”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환자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 *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착각한다.

    “공녀님께서는 정기적인 공물을 보내지 않은 폐하께 대단히 실망하셨습니다! 일정을 맞추기 힘들다면 겨울까지 기다려줄 용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앞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분명히 전했는데, 겨울까지 기다려준다니.”

    공국에서 온 전령의 망언에 임금님의 표정이 굳었다.

    “저희는 폐하께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이대로 공녀님의 마음을 잃으실 생각입니까?”

    “저희라... 그게 누구지?”

    “...당연히 공녀님이십니다.”

    공녀만 들먹이면 바보가 됐던 임금님이 강하게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자신감이 충만했던 전령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돌아가라.”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이미 후회하고 있으니 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폐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공물을 보내주십시오. 갑자기 일방적으로 끊으시는 건 도리에 어긋납니다.”

    “경고하지. 한 마디만 더 하면 자네의 혀를 자르겠네.”

    “......”

    “물러가라.”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진 전령이 거친 걸음으로 떠났다.

    (약소국의 전령이 보일 태도는 절대 아니군.)

    제국도 저렇진 않을 겁니다.

    (그만큼 주변국들이 만만했다는 의미겠지. 공녀에게 보내는 선물을 노골적으로 공물이라 칭한 것만 보더라도.)

    공물.

    그건 패전국이나 속국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등한 국가끼리 언급될 단어는 절대 아니었다.

    “급하긴 한 모양이군.”

    공국의 전령을 쫓아낸 임금님이 후련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동시에 모든 자금줄이 끊겼으니 말일세. 공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덩치를 줄이거나,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약탈하거나.”

    “후자는 전쟁이겠군요.”

    “그렇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지만, 공국의 군사력을 고려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지.”

    “승산은 있습니까?”

    “...공국에 인재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렸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우리가 재정비할 틈도 안 주고 선전포고하겠지.”

    “흠.”

    표정이 심각한 임금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바라는 미래였다.

    “폐하~!”

    쿵!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올 것이 왔군.”

    “공국에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래... 흡!”

    피로에 찌든 임금님이 노구를 힘겹게 일으키며 외쳤다.

    “장군을 호출하라! 이 전쟁은 짐과 본국을 우롱한 공녀... 아니, 음흉한 마녀를 처단하는 성전이다!”

    성전(聖戰).

    전쟁은 명분 싸움이다.

    명분이 없으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가중된 세금과 통제로 고통받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니까.

    전쟁 중에 반란, 폭동, 암살 등으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지지 않으려면 명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성전.’

    어감이 좋군?

    내가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운다는 느낌을 줬다.

    “폐하. 소신이 기사들의 선봉에 서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백작이?”

    “카드게임만 잘하는 게 아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허어! 허락하겠네. 단, 절대로 무리하지 말게. 백작이 다치면 아로니아가 슬퍼할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줄 공격수단이 이 세계에 존재할지 의문이지만.

    (저기에 있군.)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모은 아로니아 공주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흠! 걱정하지 마시길.”

    성전을 시작하자.

    * * *

    기사(Knight).

    체스의 ‘나이트’ 생김새만 봐도 알겠지만, 기사는 말을 타고 적진을 돌파하는 중장기병이다.

    투구도 없는 조잡한 복장에 두 발로 뛰며 무쌍을 찍는 기사?

    마법이나 무공이 존재하는 판타지에서나 가능하다. 이걸 기사라고 정의해도 되는지 의문이지만.

    “어서 오십시오! 아몰랑 백작님!”

    “잘 부탁합니다.”

    나에게 ‘기사도’를 가르쳐줄 기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기사의 역할은 단단한 보병의 벽을 우회하거나 돌파해서 취약한 후방 부대를 공격하는 겁니다. 보급대, 공성 부대, 궁병, 지휘부...”

    기사와 군마의 중장갑을 관통하는 석궁과 포병은 없는 듯했다.

    (답답한 놈아! 있었다면 이 환자를 추천하지 않았겠지!)

    아하!

    “기사는 돌격이 막혀서 포위되는 순간 끝입니다. 그렇기에 적진을 완전히 돌파할 때까지 달릴 수 있는 군마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과연...”

    “우수한 종마 대부분이 공국으로 유출되긴 했지만, 아직 길들이지 못한 야생마는 제법 있습니다.”

    “제가 직접 길들여야 한다는 얘기입니까?”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이미 괜찮은 군마는 짝이 다 있어서...”

    “이해했습니다.”

    왕국의 군사력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 정도면 양호한 편.

    기사는 야생마들을 가둬둔 목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히이잉~!”

    “히잉~!”

    사람이 다가가면 뒷발로 걷어차거나 도망치는 말들. 어떻게 목장까지 옮겼는지 신기할 정도로 사나웠다.

    그 대신,

    “...멋지네요.”

    덩치가 예사롭지 않다.

    “마갑과 안장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해보죠.”

    휙~

    높은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목장 안으로 들어갔다.

    “흠... 저 녀석이 가장 좋네.”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세계에서 거의 모든 괴물이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 앞에서 평등했지만, S급 이상은 한 방에 처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투력’이라고 정의할 무언가를 판단하는 눈을 키웠는데...

    (정답이다.)

    군마를 고를 때도 도움이 됐다.

    “히이잉~!”

    “닥쳐.”

    덥석!

    잽싸게 야생마의 목울대를 움켜잡으며 눈을 맞췄다.

    “푸르르르...”

    “착하네.”

    겁에 질린 말이 고분고분해졌다.

    (길들였다고 보긴 어렵지만, 오래 탈 건 아니라서 상관없겠지.)

    오래 못 타요? 왜요?

    (전쟁에 소모품이 아닌 건 없다. 물자, 식량, 시간, 병사, 재능... 군마도 예외는 아니지.)

    “허어! 아몰랑 백작님. 어떻게 하신 겁니까?”

    “간단한 기선제압입니다.”

    “그게 가장 어려운 겁니다만... 하여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인들을 불러서 마갑과 안장을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네.”

    나의 기사도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는 주인공에게 대단히 호의적이다.

    아름다운 공녀님, 상냥한 공녀님, 현명한 공녀님, 고귀한 공녀님...

    주인공을 욕하는 인물은 원작에서 ‘악역’으로 지정받은 극소수뿐.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 됐다.

    “마녀를 죽이자!”

    “마녀를 죽이자!”

    원작에서는 태어나지도 않은 까닭에 세계관 설정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젊은 신세대들.

    공녀에게 무한한 호의를 보내던 구세대는 늙고 병들어서 뒤로 물러났고, 전쟁은 젊은이들의 몫이었다.

    “분노가 엄청난걸?”

    당연했다.

    내가 위험한 전쟁터로 끌려온 이유가 한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해보라. 그 여자가 좋게 보일 리 없다.

    눈앞에 있다면 가장 잔혹하게,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지 않을까?

    “아몰랑 백작님!”

    “공주님.”

    예쁜 다리를 풍성한 치마로 늘 가리고 있는 아로니아 공주였다.

    “조심하세요.”

    꾸욱-

    그녀는 고급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새하얀 손수건을 내 손목에 묶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이 무사하실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어흠!”

    엄청 쑥스럽네.

    송선영이 이런 부분은 좀 배웠으면 좋겠다.

    (고스란히 전해주마.)

    살려주세요!

    “출발!”

    뿌우우우-!

    왕궁에서 출발한 군대는 귀족들의 영지를 지나갈 때마다 규모가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공국이랑 국경이 맞닿는 접전지에 도착했을 때,

    팔랑~

    팔랑팔랑~

    여러 왕국의 국기가 나부끼는 대규모 연합군이 형성됐다.

    “허...”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연합군의 반대편.

    머릿수만 채운 비실비실한 연합군이랑 비교할 수 없는 튼실한 몸과 갑옷으로 무장한 공국의 병사들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후배야. 축하한다.)

    “무슨 축하요?”

    (네가 바라던 대로 실전경험을 실컷 쌓을 수 있겠구나.)

    “그건... 그렇네요.”

    로맨스가 없는 로맨스 판타지를 실컷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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