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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54화 (155/232)
  • 154화

    “마치, 짐의 패를 훤히 내다보는 것 같은 실력이군.”

    “과찬이십니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탁.

    나에게 2판을 연속으로 패배한 임금님은 자신의 카드 중 1장을 아예 보지도 않고 탁자에 엎어놨다.

    “...안 보셔도 됩니까?”

    “카드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안 보고도 다음 패를 예상할 수 있다네.”

    “그렇군요.”

    이 임금님이 허세를 부리는 건지,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엎어놓은 저 카드만은 나도 훔쳐볼 수 없었다.

    (흥미롭군.)

    “흠...”

    찜찜하긴 했지만, 경기는 그대로 진행됐다.

    한 장을 제외한 모든 카드를 보고 있기에 내 승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임금님은 패배가 거의 확실해진 시점에 엎어놓은 카드를 뒤집었다.

    스윽-

    “아...”

    조커, 역전의 한 장.

    나에게 우세했던 승기가 단숨에 임금님에게 기울었다.

    “허허! 이번 판은 아무래도 짐이 이긴 것 같군.”

    “감탄했습니다.”

    “이 수법은 공녀가 갑자기 카드게임을 그만두기 직전까지 종종 사용했던 기예네.”

    “그렇습니까.”

    “정말 대단했지. 그녀는 카드를 2장씩 엎어놓고 했으니까. 지혜가 깃든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역전의 한 장을 뒤집는 공녀의 모습을... 30년도 더 된 추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네.”

    “공녀님이 카드게임을 그만둬서 슬프셨겠네요.”

    “이유를 물었더니 짜증을 내더군.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

    알맹이가 바뀌면서 공녀의 카드게임 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추억에 잠긴 왕이 슬픈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아로니아. 다음 판을.”

    “네. 섞겠습니다.”

    탁, 탁, 탁.

    입양한 조카... 치마에 가려진 다리가 예쁠 것 같은 공주님이 흩어진 카드를 모아서 섞기 시작했다.

    휙~

    그리고 이번에도 임금님은 카드 1장을 엎어놨다.

    “...가차 없으시네요.”

    “허허!”

    하지만 두 번째는 안 통한다. 임금님은 카드를 안 보고 엎어놨지만, 나는 카드가 바닥에 완전히 밀착하기 직전에 잽싸게 봐뒀기 때문이다.

    이윽고,

    스윽-

    임금님이 엎어둔 카드를 뒤집어도 승기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설마, 이마저도 예상한 건가?”

    “네.”

    “허어! 자네는 배우는 속도가 정말 빠르군.”

    “감사합니다.”

    임금님의 감탄을 겸허하게 넘겼다. 내 실력이 뛰어나거나 늘어서 이긴 게 아니니까.

    탁.

    패배를 직감한 왕이 손에 쥔 카드를 내려놨다.

    “허! 정말 잘하는군. 짐이 졌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멋진 경기였습니다, 폐하.”

    이건 빈말이 아니다.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공녀님이 카드게임 최강자란 설정 때문일까? 그녀를 사랑하는 미남들의 평균 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그 증거로,

    5승 2패.

    한 판은 엎어놓기 기교에 졌다면, 다른 판은 패가 조금 안 좋게 나와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어쨌든 2패.

    나에게 이토록 많은 패배를 안겨준 카드게임 실력자는 눈앞의 임금님이 처음이었다.

    “약속대로 짐의 병을 치료할 기회를 주겠네.”

    “감사합니다.”

    “침실로 이동해야 하는가?”

    “네. 치료 직후에 현기증으로 쓰러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흠. 알겠네.”

    나에게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게임의 시작이다.

    * * *

    역사가 느껴지는 중후한 멋의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임금님.

    내가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기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유일한 가족인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가?”

    “네.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어떻게 치료하는지 미리 알려줄 수 있는가?”

    “지금부터 폐하의 이마에 손을 올릴 겁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것만으로 치료가 된다는 건가?”

    “네. 믿기 힘드시겠지만.”

    “흠... 하게. 짐의 이마에 구멍을 뚫겠다는 것도 아닌데.”

    “감사합니다.”

    스윽-

    나는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임금님의 이마 위에 얹었다.

    “음... 으음?”

    “기분이 어떠십니까.”

    “...모든 고민을 내려놓고 술에 취했을 때처럼 좋군.”

    “지금부터 진짜입니다.”

    임금님의 정신을 옭아매고 있는 세계관 설정을 무너트려야 한다.

    “시작하게.”

    “공녀님을 떠올리십시오.”

    “공녀를... 흐음?!”

    “자신의 모든 걸 주고 싶을 만큼 아직도 사랑하십니까?”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그랬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군. 이토록 오랫동안 그녀에게 매달렸던 짐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아. 허허!”

    주르륵.

    회한이 담긴 어조로 넋두리하는 왕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주입니다.”

    “저주...?”

    “네. 매우 강력한 저주이기 때문에 폐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녀를 향한 폐하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완벽하게 정리하셔야 합니다.”

    “...지금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기회란 거군.”

    “그렇습니다.”

    온갖 감정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칠 텐데도 임금님은 내 설명을 바로 이해했다. 원작에 총명하다는 설정이 분명 있었으리라.

    변변찮은 주인공에게 푹 빠진 시점에 총명함이랑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런 불편한 진실은 덮어두자. 사랑은 천재도 바보로 만든다고 하니까.

    “기사단장.”

    “네! 폐하!”

    “공녀에게 보낼 예정이었던 선물을 매각하게. 본국의 요리사들에게도 귀환 명령을 내리고, 미혼의 영애들을 초대하라. 미련하게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비워둔 왕비의 자리를 채울 것이다.”

    “폐하. 그러면 공녀님께서...”

    “상관없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후사를 보기에는 너무 노쇠한 것 같지만, 30년 넘게 참은 임금님의 판단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지금부터가 문제군. 짐이 제정신을 차린 사실을 눈치채면 공국에서도 움직일 터. 너무 오랫동안 공국의 성장을 방관했어. 아니, 아낌없이 도왔다는 표현이 옳겠군...”

    세계관 설정의 속박을 잠시 끊었을 뿐인데, 이 임금님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폐하.”

    “아! 이런! 자네를 깜빡했군. 너무 마음이 편해서 완전히 잊었어. 잠시만 더 그대로 있어 주게.”

    “네, 폐하.”

    임금님의 호출을 받은 수많은 관리가 침실을 들락날락했다.

    공녀를 위해 양도한 이권.

    공녀 때문에 미뤄둔 외교 문제.

    공녀가 주문한 미소년 공급.

    국가를 망치고 공녀가 소속된 공국의 배만 불려주는 황당한 사안들이 빠르게 정리됐다.

    ‘미쳤네.’

    정치를 모르고, 공짜를 매우 좋아하는 나조차 너무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이것들을 대가나 보답 없이 받아먹기만 한 ‘주인공’은 양심 없는 돼지의 화신이리라.

    “끝으로... 아몰랑 백작.”

    “예?”

    내가 언제 백작이 됐지?

    “그대는 짐과 이 나라를 구해줬네. 이 은혜는 차차 갚도록 하지. 지금은 공치사할 시간도 없기에. 공녀를 등에 업은 공국의 힘이 너무 비대해졌어...”

    임금님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그렇습니까.”

    “공국은 우리가 공녀에게 보낸 선물을 팔아서 힘을 키웠네. 반면에 우리는 약해졌고.”

    “뭐...”

    나라 꼴이 툭 치면 쓰러질 것 같긴 했다.

    “공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군대를 키우고 있었네. 세계의 보물인 공녀를 지키는 호위대로는 과한 숫자지.”

    “아!”

    전쟁!

    로맨스 판타지를 좋아하는 환자가 폭력적인 전쟁을 준비한다는 게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본인이 직접 위험한 전장을 뛰어다니며 싸우는 건 아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힘을 합쳐야 하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강자를 이기려면 약자들이 비겁하게 협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변국들은 여전히 공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네. 그들도 해방시켜야 해.”

    “이해했습니다. 폐하께서 자리만 마련해주십시오.”

    “정말 고맙네!”

    “폐하의 생각이 정리된 듯하니 이만 손을 떼겠습니다.”

    “잠깐!”

    “예?”

    “짐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명령하겠네. 아로니아.”

    “네. 아바마마.”

    “오늘 처음 만나긴 했지만, 아몰랑 백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군으로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사내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공주가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고, 임금님은 흐뭇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억지 아니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처신 잘해라.)

    네.

    나는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아로니아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내는 백작이 처음이네.”

    “영광입니다.”

    “이 위기만 극복하면 이 아이와 나라를 그대에게 맡기겠네.”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겸허하게 넘어가자.

    “허허! 더욱 마음에 드는군! 늘 주기만 하던 짐이 처음으로 욕심이 생기는구나.”

    “......”

    “이제 손을 떼도 좋네.”

    “분부대로.”

    스윽-

    다시 채워진 속박이 불쾌해진 임금님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아몰랑 백작이 손을 떼기 전에 마음을 정리하라고 조언한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렇습니까.”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도적이 정신공황을 일으켰던 점을 고려하면, 이쪽은 대단히 양호했다. 그 정신력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이게 연륜이란 것이다. 세계관 설정으로 채울 수 없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지.)

    그렇겠죠.

    “짐이 자리를 마련하겠네. 대부분 연적이라서 친하진 않으나, 같은 고민을 하며 늙어가는 처지이기에 통하는 구석이 있지.”

    “......”

    얘기만 들어도 너무 슬프다!

    “우리도 이젠 예전 같지 않으니. 공녀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검을 뽑던 시절도 옛말이 됐지. 이젠 카드를 들 힘밖에 남지 않았어...”

    “폐하, 힘내십시오.”

    계속 듣고 있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아로니아. 백작에게 편히 쉴 곳을 안내해주려무나.”

    “네. 아바마마.”

    담담하게 대답한 공주가 나에게 따라오라는 시선을 보냈다.

    이후,

    “......”

    “......”

    왕의 침실을 나온 나는 공주랑 나란히 왕궁의 복도를 걸었다.

    또각또각.

    공주의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릴 정도로 고요했다.

    “...감사합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공주였다.

    “흠. 공주님께 무언가를 해드린 기억이 없는데요.”

    “저의 두 아버지는 그 탐욕스러운 공녀를 언제나 좋게 평가했어요. 비난하는 저를 역으로 나무라셨죠.”

    “아!”

    “내가 이상한 걸까? 공녀의 매력을 나만 보지 못하는 걸까? 내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걸까?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마음고생이 심하셨네요.”

    “백작님은 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원작 세계관 설정.

    그 세계의 원주민은 절대 깰 수 없는 불변의 법칙.

    하지만 ‘아로니아’ 공주처럼 원작에 없었던 신세대는 영향을 거의 혹은 아예 받지 않는 것 같다.

    “정말로요?”

    “공녀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양심 없는 돼지라고 생각합니다.”

    “풉! 아하하!”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던 공주의 웃음보가 갑자기 터져버렸다.

    “......”

    “시, 실례했습니다! 백작님의 말씀이 너무 뜻밖이라... 정말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자주 웃으십시오. 건강에 좋습니다.”

    “제가 아는 사내 중에서 공녀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욕한 분은 아몰랑 백작님이 처음이었어요.”

    “그랬습니까.”

    여러분, 세계관 설정에 묶여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공주랑 나이가 비슷한 신세대는 전부 세계관 설정에서 자유로울 텐데...?

    (이 한심한 놈아. 배우자로 합격인 남자 중에 없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알아들어야지!)

    아하!

    눈이 굉장히 높은 공주님이시네.

    “아몰랑 백작님. 밤에 카드를 들고 찾아가도 될까요?”

    “좋습니다.”

    “아바마마랑 대결하실 때처럼 거침없으시네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임금님의 모든 카드를 훔쳐보면서 비겁하게 대결했다.

    “조금 얄밉네요. 이미 제 마음을 아신다는 소리잖아요.”

    “음?”

    이건 무슨 소리야?

    “밤에 기대할게요, 엉큼한 백작님.”

    “.......”

    살랄라~

    웃음보가 터진 뒤부터 감정이 살아난 공주가 살갑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너는... 말을 말자.)

    아, 왜요.

    아무튼,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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