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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53화 (154/232)
  • 153화

    내가 할 일은?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관 설정에 묶인 강대국들의 왕이 주인공에게 빠져서 국정운영이 전반적으로 엉망이다.

    생각해보라.

    민생을 살펴야 할 왕의 머릿속이 한 여자로 가득한 상황을! 그런데도 나라가 평화롭게 굴러가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다 함께 멍청하네.’

    인생은 상대평가다. 그런데 경쟁국, 주변국들도 상황이 비슷해서 국민이 깜빡 속고 있었으니!

    왕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냥 끝내는 게 어떠냐?)

    다 해보고요!

    (솔직하게 말해라. 카드게임에 재미 붙였군.)

    “흠흠!”

    이게 의외로 재미있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질리겠지만, 현재로선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게다가,

    “내가 지다니...!”

    “말도 안 돼!”

    “빌어먹을! 한 판 더!”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패배한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재미있다!

    탁.

    “잘 놀았습니다.”

    여관이나 술집마다 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항상 있다.

    그 지역 카드게임 고수들의 집합 장소라고 할까! 이건 아무래도 ‘공녀님은 카드게임을 잘하고 좋아한다.’라는 작품의 설정 영향인 것 같다.

    생각해보라.

    주인공의 취미가 대중적이지 않고 극소수만 즐긴다면, 따돌림당하는 외톨이 같잖은가?

    그래서 카드게임은 세계가 즐기는 오락으로 자리매김했다.

    유감스럽게도,

    (후배야. 네가 바라는 전쟁은 힘들 것 같은데...)

    기다려보세요!

    원작은 주인공의 16살 생일부터 19살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 3년!

    각국의 잘생긴 후계자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선물 공세를 받긴 했지만, 나라가 피폐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

    “......”

    재물이 한없이 쌓인 주인공이 사는 지역만 잘 사는 편이고, 조금만 밖으로 나가도 끔찍했다.

    거지, 시체, 깡패...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몸을 파는 여성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런데도 반란 한번 없이 평화가 유지됐다는 게 놀랍군.)

    “설정의 힘이죠.”

    카드게임을 하면서 주워들은 정보로는 그랬다.

    탁.

    “공녀님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의 임금님이랑 맺어져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지.”

    “어... 임금님이 공녀님보다 나라를 좀 더 신경 썼으면 하지 않나요?”

    “흠. 아니.”

    “......”

    “그랬다가 공녀님을 다른 나라에 빼앗기면 어쩌려고? 삶이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참고 견뎌야지.”

    “그렇군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도 느꼈지만, 말이 안 되는 비현실적인 억지를 밀어붙이려면 세계가 미쳐야 한다.

    세계적인 세뇌.

    곧 6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의 모든 왕, 국민이 혈안이 되어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는 이 정도까지 세뇌가 심각하진 않았다.

    일단, 백작 영애 ‘안질리나 치맥’에게 집착하는 미남들이 황제 빼고는 그다지 정치적인 힘이 없었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설정도 적었다.

    (그쪽은 순수한 매력을 강조한 실력파 미녀였지.)

    선배의 말대로다.

    원작 소설의 ‘안질리나 치맥’은 예쁘고 착했다. 그리고 검소했다.

    이런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있을까?

    그랬기에 알맹이가 바뀌면서 외모 빼고 장점이 다 사라진 안질리나 치맥은 쉽게 몰락했다.

    반면에 이쪽은?

    “와! 세뇌 수준이 철근콘크리트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윗대가리부터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됐다.

    어떻게?

    탁.

    “엄청난 실력이군! 우승하면 폐하랑 카드게임을 겨룰 수 있는 영예가 주어지는 대회에 나가보는 게 어떤가?”

    “그럴 생각입니다.”

    국민이 굶어죽는 시국에도 큼직한 행사가 꾸준히 열리고 있었다.

    (기사도는?)

    이거 끝난 후에요!

    (전쟁은?)

    그 과정입니다!

    (각국의 수뇌부만 암살해도 후계 다툼으로 전쟁이 벌어질 텐데, 참 힘들게 돌아서 가는군.)

    “흠흠!”

    인생이 항상 일직선일 수만은 없으니까요!

    (헌터물 세계에서는 일직선이 아닌 우회전이었냐? 너무 끌지 마라. 송선영에게 말하기 전에.)

    뭐라고요?

    (데이트보다 꿈속에서 카드게임하는 편이 더 좋아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고 해주지.)

    ...선배님, 이 연약한 후배를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너 대신 활동하는 나는 괜찮고? 노동법 위반이다.)

    “......”

    너무 죄송해서 할 말이 없다.

    (농담이다. 요즘은 네 인기도 조금 식어서 귀찮게 하는 인간이 없어서 살 만하다. 남는 시간에 중원 드라마를 욕하면서 시청하고 있지.)

    “휴우...”

    그러면 다행이고요.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변변찮은 이유로 꿈속에 너무 오래 있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알겠다.

    왕국A에서 매년 치러지는 카드게임 대회!

    다른 나라들에서도 경쟁적으로 열리지만, 시기가 가장 가까운 왕국A의 대회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죽기 싫으면... 어...”

    “가진 걸 내놔라!”

    “맞아! 내놔라!”

    대회가 열리는 왕국A의 수도까지 가는 길에 마주친 산적, 도적들은 간단히 썰어주면서.

    절대로 놀고 있지 않다.

    “히이잉~!”

    “워워.”

    기사도에서 가장 중요한 승마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마차가 아닌 말을 직접 타고 이동했다.

    말은 어디서?

    세계를 여행하는 귀족이랑 카드게임 해서 땄다.

    (반복 학습은 역시 대단하군. 아니면 집사장의 말이 사실이던가.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어.)

    감사요.

    내가 왕국A의 수도에 도착할 때쯤에는 상대방의 패를 훔쳐보지 않고도 가볍게 이기고 있었다.

    * * *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관에서 카드게임이 모두가 즐기는 민속놀이처럼 취급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세뇌다.

    하지만 정말 그뿐일까?

    아니다.

    카드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쉬운 접근성 또한 무시 못 한다.

    탁!

    대회의 예선전이 시작됐다.

    “아몰랑 승리!”

    탁! 탁!

    “아몰랑 승리!”

    “아몰랑 승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만큼 대회의 참가자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한 판이 금방 끝나는 카드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예선전만 닷새 동안 진행됐으니까.

    (흠...)

    왜요?

    (내 정신이 너의 기억을 읽으면서 오염된 것 같다. 나도 카드게임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어.)

    “하핫!”

    같이 즐기시죠!

    예선전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됐다.

    탁!

    카드게임은 손에 들어온 패가 좋아야 하기에 ‘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5판 3승제.

    경기를 여러 차례 하면 운보다 실력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선으로 넘어오면서 이 부분은 더욱 엄격해졌다.

    탁! 탁! 탁! 탁! 탁!

    9판 5승제로 바뀐 본선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상대방의 패를 볼 수 있어서 운이라는 요소가 극히 낮은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승률은 대략 99% 정도?

    내 손에는 최악의 패가 들어오고, 상대방에게는 최상의 패가 쥐어졌을 때만 졌다고 보면 된다.

    휙~

    결승전에서 귀부인이 카드를 사납게 집어 던지며 외쳤다.

    “이건 사기야!”

    “......”

    드디어 사기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남자는 내 패를 보면서 하는 게 틀림없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사실이기에 상대방이 무슨 모욕을 줘도 담담히 넘어갔다. 그리고 이러는 편이 내 평판에 도움이 된다.

    “신사로군.”

    “멋진 사내야.”

    “나라면 주먹을 날렸을 텐데.”

    이 세계는 마법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공녀가 미남들에게 아낌없이 받은 선물 중에는 ‘젊음의 묘약’ 같은 판타지 요소가 있긴 하지만.

    카드게임에서 사기 치는 마법사와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윽...”

    결승전에서 0승 5패의 굴욕을 맛본 귀부인은 신경질적으로 떠났다.

    “아몰랑 우승!”

    진행자가 힘차게 선언했다.

    “감사합니다.”

    저 아줌마는 진짜 강적이었다. 패를 안 보고 정정당당하게 대결했다면 0승 5패는 나의 몫이었으리라.

    “부인을 이해해주게. 공녀만 바라보는 폐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카드게임을 30년 넘게 해오신 최다 우승자이시네. 대회에 참가한 이유도 폐하랑 시합하기 위해서지. 어디 보자... 13년 만에 처음으로 실패하셨군.”

    “아아, 그런 사연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랑 이야기잖아?

    하지만 ‘귀부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보아선 이미 결혼한 유부녀인데, 다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건 조금 심각하게 문제 같다.

    “아몰랑. 나를 따라오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네.”

    “예선전에서 2패, 본선에서 0패. 역사에 기록될 성적을 낸 우승자를 무척 보고 싶어 하시지.”

    “과분한 영광입니다.”

    국고가 텅텅 피어버린 왕궁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신기하군.’

    30년 넘게 선물을 보내는 이 나라의 임금님도 문제지만, 그것을 거절 한 번 안 하고 꾸역꾸역 받아먹는 공녀도 상당히 문제였다.

    선물을 공짜로 받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안 드는 걸까?

    진짜로 신기했다.

    끼익-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진짜 귀족이었던 아몰랑 백작에게 궁중 예법을 가르친다는 건 우스운 일!

    평민에게 예법을 가르치려고 나온 귀족이 당황했다.

    “저... 귀족이셨습니까?”

    “비밀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끼이익-

    임금님이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아무리 나라가 빈곤하고 어려워도, 국격을 대변하는 왕까지 빈곤하게 살 순 없는 법.

    아리따운 시녀와 늠름한 기사들이 곳곳에 배치된 실내는 화려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흠. 앉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원작에서 ‘어마어마한 미남!’이란 설정으로 외모를 보정해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으니...

    진짜 잘생긴 왕자님?

    그것도 옛말이 돼버렸다. 눈앞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초로의 노인만 있을 뿐.

    (3년 안에 과로사하겠군.)

    과로사...?

    (공녀에게 꾸준히 값비싼 선물을 바치면서 국가 재정도 관리하려면 쉽지 않지. 사람은 늙으면 얼굴 주름에 지나온 삶이 그려지는 법. 세계관 설정에 얽매이지만 않았으면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왕이 됐을 거다.)

    선배답지 않게 평가가 후하시네요.

    (없는 말을 하진 않는다.)

    “폐하, 소인에게 대화할 기회를 주져서 대단한 영광입니다.”

    선배의 말을 들은 직후인 탓일까? 왕을 상대하는 내 목소리에도 자연스럽게 존경심이 살짝 깃들었다.

    “한 여자의 마음도 못 잡는 한심한 남자에게 과분한 인사일세.”

    왕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훈훈한 미소로 내 인사를 받아줬다. 그 내용은 자조로 가득했지만!

    탁탁.

    아리따운 소녀가 다가오더니 능숙하게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복장은 완벽한 공주님.

    공녀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왕이 차선책으로 친동생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였다더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풍성한 치마에 다리가 가려지긴 했지만, 잘록한 허리와 골반의 위치로 보건데...

    (말한다.)

    카드게임에 집중하자!

    “올해 우승자는 다른 사람이라서 마음이 편하군.”

    “얘기는 들었습니다.”

    “불쌍한 여자지.”

    왕은 30년 넘게 자신을 짝사랑해온 귀부인을 동정했다.

    “......”

    “게임에 내기가 없으면 섭섭하지. 바라는 것을 말해보게.”

    “폐하의 병을 치료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허허! 짐의 병은 아무도 못 고친다네. 마음의 병이기에...”

    본인의 문제점을 알고 있긴 한 모양이다. 알면서도 못 고칠뿐.

    “잠깐이면 됩니다. 돈도 전혀 안 들고요.”

    “흠. 뒷말이 마음에 드는군. 내기에 돈이 안 들다니.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지 않은가?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탁.

    공주님이 카드를 한 장씩 분배하기 시작했다.

    “짐이 이기면 공녀에게 보낼 선물을 실은 마차에 동행해주게. 그리고 짐이 준비한 편지를 버리지 않고 읽는지 확인해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애잔하다. 이렇게 불쌍한 왕은 처음 봤다.

    “선공을 양보하지.”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우선, 불쌍한 임금님의 손에 들린 패부터 확인했다.

    (패도 불쌍하군.)

    그러게요.

    내가 공녀에게 선물과 편지를 전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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