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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52화 (153/232)
  • 152화

    [8장-2절] 이건 확실하다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줄거리라고 할까, 전개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매우 간단하다.

    수컷 개개인의 취향을 깔끔히 무시하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컷이 주인공이고, 그 암컷이랑 결혼하기 위해 집안 좋은 수컷들이 순진하게 선물을 들이붓는다는 내용.

    그게 끝이다.

    (이 작품의 애독자들이 들으면 거품 물고 달려들 소리를 하는군.)

    맞잖아요?

    (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멋진 사내들이 경쟁하고 질투하는 행동과 대사에서 독자들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는 미묘한 감정선이 있지.)

    잘 아시네요.

    (여자들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아하!

    “그나저나... 허허...”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 나는 정원사들이 부지런히 가꾸는 아름다운 정원 한복판에 세워진 웅장한 저택에 헛웃음이 나왔다.

    공녀가 사는 집.

    당장 저택으로 쳐들어가서 환자 빼고 싹 죽이면 꿈이 끝나리라.

    (오! 방법이 상당히 과격해졌군. 힘이 강해진다는 건 좋아. 소심하게 안 살아도 되고. 안 그러냐?)

    “어흠!”

    정곡을 찌르시네요!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절세미녀를 옆구리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도 이불에 천하를 그리는 오줌싸개였던 시절이 있으니.)

    다그닥!

    다닥!

    외관이 화려한 사두마차들이 선물을 잔뜩 싣고 경쟁하듯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와...”

    작품의 제목처럼 주인공은 정말 아낌없이 받는 듯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꿈이라서 가능한 전개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헤어지면 줬던 선물을 전부 반환하라고 여자에게 요구하는 치졸한 남자도 적지 않다. 이 문제로 법원까지 갈 정도니.)

    그래요?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데이트할 때마다 송선영에게 전적으로 받아먹기만 하니까.)

    “흠흠!”

    저도 후식은 삽니다. 커피값이 밥값이랑 비슷해서 놀란다니까요?

    (자릿세와 인건비지.)

    우리가 자잘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마차가 끊임없이 저택을 들락날락했다. 조금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 그러면...”

    휙~

    몸을 돌렸다.

    이번 꿈은 환자를 깨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까. 지금부터 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를 찾아가서 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후보는 3명.

    공녀에게 선물을 바치고 시를 낭독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 중인 사내들을 가르친 기사들이다.

    왕국A의 기사A, 왕국B의 기사B, 왕국C의 기사C!

    내가 조금 오만해진 것 같지만, 이젠 작품 세계관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기억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실례합니다.”

    “예?”

    지나가던 행인A의 어깨를 붙잡았다.

    “술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길을 따라 쭉 가다가 광장이 보이면 왼쪽을 돌아보시오. 간판이 바로 보일 거요.”

    “감사합니다.”

    중세시대에 가장 다양한 정보가 모이는 장소를 꼽자면?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이는 술집!

    비밀스러운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아니라서 금방 끝날 것이다.

    * * *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죽어요?”

    “그렇다니까. 겨울을 88번 보내셨으니 건강하게 오래 사신 편이지.”

    “......”

    환자는 매우 건강한 상태로 5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만큼 꿈의 세계에서 오래 보냈다는 의미.

    시간이 훌쩍 흘렀다.

    “네 질문에 대답했으니 한 판 더!”

    “좋습니다.”

    나는 술집 중앙의 원형 테이블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다.

    이유?

    탁, 탁, 탁...

    정보를 살 돈이 없어서 카드게임으로 대신하는 중이다.

    ‘다 보이는구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나의 인지력으로 상대가 가진 카드 패를 훤히 훔쳐보고 있었다.

    이러면 질 수가 없잖아?

    다들 편하게 카드게임을 즐기고 있지만, 돈이 걸렸다면 사기라는 소리가 수십 번은 들렸을 것이다.

    “허! 또 피하는구먼!”

    “제가 감이 좋습니다.”

    “으으... 젠장.”

    휙.

    함정을 들킨 남자가 게임을 포기하듯 패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제가 또 이겼군요.”

    짝짝짝!

    카드게임을 구경하던 술집 손님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스윽-

    “서비스입니다.”

    우리 덕분에 매상이 늘어난 걸까? 술집 주인장이 공짜 술을 제공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흥이 올랐다는 의미.

    패배한 남자가 테이블에 흩어진 카드들을 모으며 말했다.

    “허허! 이 친구, 한 번도 안 해봤다더니 선수였구먼!”

    “초심자가 강한 법이죠~”

    “킁. 뭐든 물어봐.”

    내가 이 세계에서 필요로 했던 정보는 얼추 다 수집했다.

    마지막 하나.

    “대공 저하의 셋째 따님이며, 왕국의 보석으로 불리는 공녀님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흠.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숫자에 약해서 말이야. 어디 보자... 내가 태어난 해부터 공녀님이 청혼을 받기 시작했으니...”

    “......”

    주인공의 정확한 나이를 못 들었음에도 충격받았다.

    이 남자는 딱 봐도 40대 중반. 원형탈모 때문에 나이가 더 들어 보일 순 있지만, 그걸 고려해도 젊은 편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공녀보다 한참 어리다고?’

    양손의 손가락까지 써가면서 계산을 마친 남자가 말했다.

    “공녀님은 영원히 16살이시지. 겨울을 53번 보셨지만.”

    “아하!”

    기대수명이 늘어난 현대에서 53살은 한창 활동할 현역 취급이다.

    하지만 복지가 좋지 못했던 중세시대에는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노인!

    물론, 이때도 잘 먹고 편하게 살던 귀족들은 훨씬 오래 살긴 했다. 노인 취급이란 건 변함없지만.

    “또 한 판 할까?”

    “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런! 젊은 친구가 빨리 자는군. 좋아, 마지막 판을 시작하지!”

    “섞어주세요.”

    탁탁!

    그리고 다시 시작된 카드게임.

    마지막이기도 하고, 패배만 하다가 끝나면 남자가 슬퍼할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게 져줬다.

    “하하! 드디어 이겼군!”

    “축하드립니다.”

    “초심자를 이기고 축하는 무슨. 그래도 기분이 좋구먼! 멀리서 온 여행자 같은데, 잘 곳은 있나?”

    “지금부터 구해봐야죠.”

    “그러면 공녀님의 저택에 가보게.”

    “거긴 왜...”

    남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사교모임에서조차 카드게임을 안 하시지만, 과거에 공녀님은 왕국 최고의 고수이셨네.”

    “아아.”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에 있었던 설정이다.

    그런데 그게 왜?

    “공녀님께 카드게임을 가르쳐준 집사장이 내 외삼촌이지!”

    “오! 대단한 분이셨군요.”

    “어흠. 자랑하려던 건 아니고, 외삼촌은 대공 저하를 향한 충성심만큼 카드게임을 사랑하시네. 외삼촌께 배운 3번 함정을 좋아하는 조카가 안부 전한다면서 한 판을 제안해보게. 반갑게 맞이해줄 걸세.”

    “감사합니다.”

    카드게임은 내 인생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이유를 상기했다.

    기사도.

    내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제대로 배워놨으면 끝났을 문제.

    ‘배워서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이젠 뭐든지 기회가 있을 때 배워두기로 했다.

    * * *

    당연한 얘기지만, 알맹이가 바뀐 공녀의 카드게임 실력은 잘 쳐줘도 일반인 수준이다.

    마법, 초능력, 무공, 체질...

    타고나는 부분은 무리 없이 원작 주인공처럼 할 수 있지만, 뚜렷한 형태가 없는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심리전을 걸지도 않았는데, 내 패를 전부 들여다보는 것처럼 거침없이 카드를 뽑는군.”

    “감이 좋거든요.”

    추천을 받아서 찾아간 저택의 집사장은 정말 감이 좋았다.

    “하지만 표정과 시선으로 자신의 패를 보여주는 습관은 고치게. 그것만 바꾸면 무서운 고수가 될 테니.”

    “표정과 시선이라면...”

    “안 좋은 카드가 손에 들어왔다고 이마를 찡그리거나, 다음에 고를 카드를 계속 힐끔거리는 습관 말일세.”

    “아아.”

    머리카락이 없어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집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한 판 더 하겠는가?”

    “네.”

    “이번에는 방법을 모르면 상대의 패를 알고도 지는 판을 보여주겠네.”

    “호옹...”

    전문가는 확실히 달랐다. 주인공에게 카드게임을 가르쳐줬다는 말도 허풍이 아닌 듯했다.

    P의 적성으로 분류하면, 선수와 감독의 자질을 전부 갖춘 경우랄까?

    집사장이 말했다.

    “자네는 재능이 있군.”

    “그럴 리가요.”

    상대의 패를 마음껏 훔쳐보는 편법 덕분이다.

    “카드게임을 해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네. 자네는 조심성 많은 맹수에 속하지. 확실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아.”

    “그야...”

    상대의 패가 다 보이니까요!

    불확실한 패를 던지면서 모험할 필요가 전혀 없다.

    “허허! 지금은 몰라도 돼. 재능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게.”

    “네.”

    카드게임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공녀의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참 총명하셨는데...”

    “지금은 다른가요?”

    “공녀님만을 위한 요리사가 저택에 8명이나 상주하고 있네. 선물로 받은 별장에도 3명이 있지.”

    “아하...”

    현실에서 강제로 다이어트 중인 만큼 꿈속에서 식욕을 해소하고 있었다.

    “밤에 공녀님의 침실로 들어가는 미소년은 요리사보다 훨씬 많네. 고귀하다는 세간의 평가하고는 정반대지. 안 그런가?”

    “그러게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혼인을 권유했다가 공녀님이 던진 꽃병에 머리를 맞고 실신한 적도 있지.”

    “오우!”

    대단히 폭력적인 공녀님이시네!

    “하지만 이해하고 말았네. 그 일로 앓아누운 늙은이를 찾아오신 대공 저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지.”

    “무엇을요?”

    “공녀님은 절대 멈출 수 없는 불붙은 마차임을. 그동안 너무 많은 선물을 받기만 하셨어.”

    “아아.”

    상대방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 선물이긴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서 왕자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자가 됐네. 국가의 위신 때문에라도 타국에 공녀를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

    “어렵네요.”

    “잠이 없는 늙은이랑 놀아주고 푸념도 들어줘서 정말 고맙네.”

    “아뇨. 저에게도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도 카드게임으로 밤을 지새울 줄은 몰랐다!

    (환자는 원작을 무시했군.)

    그러게요.

    원작의 주인공은 귀족 영애들의 결혼적령기가 끝나는 마지막 겨울에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1등에게 자신의 전부를 상품으로 내건 토너먼트.

    사실상 결혼이다.

    이 토너먼트의 참가 자격조건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선물을 바친 32명의 미혼 남성으로 한정하고, 패배하면 순순히 그녀를 포기하고 승자를 축복해줄 것!

    굉장히 깔끔한 결말이었다.

    (누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지 안 가르쳐주고 완결해서 독자들에게 욕을 좀 먹긴 했지만, 가장 뒤탈이 없는 완벽한 마무리긴 하지.)

    동의합니다.

    “음? 가는 건가?”

    “네.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식사라도 하고 가게. 대륙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지. 공녀님 덕분에 요리사들의 실력이 좋아.”

    “풉! 실례했습니다.”

    웃으면 안 되는 심각한 상황인데 웃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떤가?”

    “좋습니다. 하지만 저도 공짜로 먹긴 그러니 정보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정보?”

    “네. 듣고 무시하셔도 됩니다.”

    “흐음... 듣고 판단하지.”

    나는 집사장이 안내하는 식당으로 향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전쟁이 날 겁니다.”

    “허! 기사들도 카드게임으로 명예를 수호하는 이 평화로운 시국에? 농담으로 알겠네.”

    “......”

    이 집사장은 본인이 말해놓고 깜빡한 걸까?

    나는 확실할 때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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