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51화 (152/232)
  • 151화

    기사도(騎士道).

    기사의 길.

    유럽 중세시대의 탱크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이 지켜야 할 덕목, 행동 양식 혹은 규범의식들.

    말만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이고, 올림픽의 기사도는 ‘마상시합’을 빙자한 각국의 대리전이라고 보면 된다.

    “위험하지 않아?”

    내 계획을 들은 송선영이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말은 제대로 탈 줄 알고, 칼은 꿈속에서 자주 써봤고, 창 돌격은 실습만 안 했어.”

    “활은?”

    “어... 연습해야지.”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전문가에게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시간 절약을 위해 내팽개쳤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위험하잖아. 이번에도 갑자기 차에서 뛰어내린 거 진짜 놀랐어.”

    “반성하는 중이야. 흠흠!”

    그때는 본능에 너무 충실하긴 했다.

    “기사도는 잊고, 경호와 보안을 강화하는 건 어때?”

    “강화는 이미 됐어.”

    안일했던 정부의 대처가 꽉 조여지면서 내 경호에 쓰이는 세금과 인력이 적지 않다.

    “그러면 된 거 아니야?”

    “...잡고 싶은데.”

    스포츠토토를 망쳤다고 선수에게 화풀이한 녀석의 손모가지를 ‘꼭’ 잘라버리고 싶다.

    “안 돼.”

    “제발...!”

    혼자일 때는 내 계획에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생긴 현재는?

    송선영의 허락이 없으면 내 몸뚱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없었다. 부조리한 것 같으면서도 이 구속이 기분 좋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면 조건이 있어.”

    “뭔데?”

    “절대로 안 다친다는 믿음을 나에게 심어줘.”

    “...심을 방법을 찾으란 거지?”

    “응.”

    “.......”

    대단히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것도 못 할 거면 기사도는 깔끔히 포기해.”

    “찾아볼게.”

    일단, 기사도에 필요한 내 능력부터 ‘압도적으로’ 키워놓고 생각하자.

    * * *

    라누벨 환자의 꿈은 내가 임의로 바꿀 수 없다. 그들이 바라는 이상향에 내가 난입하는 형식이니까.

    하지만 선택이라면?

    지금부터 내가 할 작업이다.

    “중세시대 배경의 꿈을 꾸는 라누벨 환자를 찾아달라고 할 때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저는 진지합니다.”

    “기사도에 출전해서 1대30의 영화 실사판이라도 찍으려고?”

    “네.”

    “하아... 살펴봐.”

    슥-

    서혜주 부원장님이 환자의 신상정보가 적힌 종이 6장을 나란히 내 앞에 내밀었다.

    “흠... 환자가 전부 여성이네요.”

    “남자들은 커도 애라서 좀 더 과격한 전투를 선호하니까. 마법이라던가, 초능력이라던가, 무공이라던가...”

    “아하!”

    남자들이 읽은 소설과 만화는 기사들이 설 자리가 없다. 마법 한 방으로 수천 명씩 몰살시키는 세계관에서 기사는 돈만 먹는 쓰레기니까. 총화기의 등장으로 기사 계급이 몰락했듯이.

    ‘맞네.’

    내가 지금까지 돌본 남성 환자들의 꿈을 살펴보니 그랬다.

    마법소년 최강민, 무공 초고수 마오짜이, SSS급 헌터 박효만.

    남해수는 과거로 돌아가서 경제활동에 집중했기에 유일하게 예외. 다른 남성 환자들은 꿈의 세계관에 특수한 힘이 존재했다.

    반면에 여성들은 어떤가?

    여자친구 송선영, 백작가 막내딸 김은정, 궁녀 윤소라.

    그녀들의 꿈은 이상한 힘이 거의 없는 청정지역이었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장담은 못 해. 환자의 꿈속을 들여다보고 고른 건 아니니까.”

    “그것도 이해했습니다.”

    팔랑팔랑~

    지금부터는 라누벨 환자들의 신상정보를 보면서 나의 직감과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이 현실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의 제목만 보자면...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

    <철혈대공의 증손녀가 되었다.>

    <내가 황제의 며느리?!>

    <왕자님! 제 손을 잡으세요!>

    <황제의 수양딸>

    <영애는 가출을 결심했다!>

    “...비슷하네.”

    줄거리는 아직 보지도 않았지만, 시작부터 부잣집 딸내미로 태어나서 편하게 자란다는 설정은 똑같았다.

    딱히 중요한 건 아닌데, 내가 어릴 적부터 고생한 탓일까? 인생이 순탄한 주인공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못 고르겠어?”

    “전쟁이랑 너무 동떨어진 작품들이라서요. 기사들이 칼 대신 꽃을 들고 다닐 것 같달까.”

    “음... 네가 원하는 작품을 잘 모르겠는데. 예를 들자면?”

    “잠시만요.”

    인터넷에서 한참을 뒤진 끝에 간신히 찾았다.

    <패전국 공주님이 되었다!>

    제목부터 주인공의 고생이 끊이지 않을 것 같은 작품!

    “딱 봐도 인기 없을 것 같네.”

    “왜요?”

    “주인공이 변비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는 없어. 어떤 남자랑 어떻게 맺어지는지가 궁금하지.”

    “흠...”

    “네 취향이 대중성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알겠는데, 환자들은 지극히 편안한 삶을 추구해.”

    “윤소라 양은요?”

    궁녀의 삶이 편할 것 같진 않은데...

    “그 애는 일벌레야. 휴일에 청소라도 안 하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자더라.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아하!”

    개인의 성향 차이는 있지만, 라누벨 환자들이 꿈속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재벌의 손자, 마법소년, 천마의 제자, 백작가 막내딸, SSS급 헌터...

    시작부터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강력한 특권이다.

    “환자를 더 찾아볼까?”

    “아뇨.”

    “...뭔가 꾸미는 얼굴인데.”

    “하하! 설마요.”

    기사들이 칼 대신 꽃다발을 드는 세계관이라면?

    내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만이다.

    * * *

    전 세계에 확인된 라누벨 환자만 수백 명쯤 된다. 반면에 치료할 수 있는 무당은 ‘강문수’ 한 명뿐.

    심지어,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무턱대고 환자를 전부 받을 수 없다.

    결론은?

    나이, 신분, 재산, 외모, 성격...

    이것저것 따져서 치료할 환자를 선별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너의 출국에 대단히 부정적이야.”

    “왜요?”

    “네가 출국해서 안 돌아올 가능성도 있으니까. 애국심을 품기에는 나라에서 해준 게 너무 없잖아?”

    “정확합니다.”

    나는 인종차별이 없고, 언어만 통하면 어느 나라에서 살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국가보안청 관계자의 변명을 들어봤는데, 참 가관이더라.”

    “뭔데요?”

    “너의 안전보다 출국을 더 신경 썼다는 거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걸 보면 P의 적성검사기도 완벽하진 않은 것 같더라.”

    “그래서요?”

    “너에게 치료받고 싶은 라누벨 환자는 무조건 입국해야 해. 정부에서 경호를 핑계로 강력히 요구했어.”

    “거참...”

    여기서 라누벨 환자의 대부분이 걸러졌다.

    입국하려면?

    비행기를 장시간 탈 수 있을 만큼 환자가 건강해야 하고, 보호자가 언어장벽과 숙박 문제를 해결하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도 통과해야 한다.

    “정말 까다롭지.”

    “이 나라가 그랬나요?”

    “아니. 너를 만나기 때문에 까다로운 거야. 너를 데려가고 싶은 나라가 많으니까. 환자의 보호자란 명분으로 입국해서 너를 꼬드기는 상황을 매우 경계하고 있지.”

    “...피곤하게 사네요.”

    “정치란 그런 거야. 그러니 정치인이 필요한 거고. 그 피곤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족속이 정치인이고.”

    “오...”

    정말 멋진 말인 것 같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내가 보여준 6명의 환자 중에서 아무나 골라도 돼. 이것저것 따진 조건들을 전부 통과한 생존자들이니까.”

    “흠...”

    환자의 외모, 국적, 이름 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에 작품들의 제목만 다시 한번 살펴봤다.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

    <철혈대공의 증손녀가 되었다.>

    <내가 황제의 며느리?!>

    <왕자님! 제 손을 잡으세요!>

    <황제의 수양딸>

    <영애는 가출을 결심했다!>

    밑에 잘 정리된 작품의 줄거리까지 추가로 읽고 생각을 정리했다.

    ‘내 목적.’

    송선영이 안심할 만큼 압도적인 마상시합 기술을 익혀야 한다.

    조건은?

    나를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

    실전(전쟁) 경험을 쌓을 환경.

    예전부터 쭉 돈이란 이익을 좇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순수하게 나의 능력 향상만을 위한 치료였다.

    “...이 환자로 할게요.”

    팔랑팔랑~

    종이를 흔들었다.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

    미남들의 선물 공세에 하루도 심심할 날이 없는 공녀님이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이야기.

    사람이 아닌 작품을 보고 고르는 느낌이지만, 환자보다 꿈의 세계관이 더 중요하기에 어쩔 수 없다.

    “이걸 고른 이유가 궁금한걸.”

    “변수가 없어서요.”

    “변수?”

    “환자가 주인공 외의 인물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거든요.”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환자가 미남들의 선물을 마다하고 다른 인물을 선택할 것 같지 않다. 이 작품은 선물 까는 재미 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즉, 주인공이 환자.

    확실하다!

    “환자를 찾는 작업이 가장 피곤한 모양이네.”

    “네. 굉장히.”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환자를 ‘덕춘이’로 착각하는 바람에 한참을 돌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깨우기도 쉬울 것 같고.’

    아리따운 주인공에게 선물을 나르던 미남들이 ‘전쟁’에 휘말려서 전멸하면 바로 꿈에서 깨어나리라.

    완벽하다!

    “바로 준비할게. 지금 연락해도 입국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돼요. 저도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을 분석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효과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방법을 연구해보자!

    * * *

    아무리 환자가 뒷전이라고 해도 아예 무관심할 순 없다.

    “5년 넘도록 링거만 맞은 사람치고는 멀쩡하네요.”

    입국한 환자는 며칠 전에 잠들었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상태가 좋았다.

    “마른 거야.”

    “이게요?”

    “쓰러지기 직전의 몸무게가 세자릿수였데.”

    “...엄청 말랐네요!”

    “그래서 처음에는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오해했다더라.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초고도비만으로 건강이 위험했던 환자에게는 잘된 일일지도?”

    “눈만 뜬다면?”

    “맞아. 이제 눈만 뜬다면 건강하게 새 출발 할 수 있지.”

    “좋네요.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서 꿈속의 환자에게 보여줘야겠네요.”

    환자를 깨우고 싶을 때 보여주면 효과가 좋을 것 같다.

    서혜주 부원장님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쉽게 일하네?”

    살짝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요령이 늘었다고 해주세요.”

    “그러면 전 세계의 라누벨 환자들을 위해 치료 속도를 조금만 올려봐.”

    “덤으로 부원장님도 승진하고? 이제 한 걸음 남으셨네요.”

    “잘 아네.”

    엘몰랑스 병원의 이인자가 능숙하게 환자의 몸에 링거를 꽂았다.

    “윤소라 양은요?”

    적성이 ‘의사’인 간호사를 놔두고 어째서 직접 하는 걸까?

    “부모님 뵈러 재활센터에 갔어.”

    “아...”

    그녀의 부모는 가상현실게임 중독 판정을 받고 재활센터에 입원했다. 입원을 거부하면 정신병이 아닌 ‘악의적인 범죄’로 취급되어 가중처벌을 받기에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도 좀 뜬금없지?”

    “그러게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미안하지만, 저를 좋아하니까요.”

    “선영이도 안 왔잖아.”

    “어... 어라?”

    생각해보니 그렇네?!

    살짝 충격이다.

    “소라는 어젯밤에 부모가 게임에서 키우던 애완동물이 굶어 죽게 생겼다며 발작했다더라.”

    “...못 올 만했네요.”

    “슬슬 시작할까?”

    “네.”

    환자의 옆에 붙인 침대에 반듯이 누웠다.

    선배가 내 몸을 조종해서 금방 일으켜 세우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곤히 잠든 환자 ‘비엔나 수잔’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관찰한 후,

    톡.

    라누벨 환자의 손등을 건드리며 꿈의 세계에 침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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