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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49화 (150/232)
  • 149화

    [8장-1절] 나를 믿어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직업, 회사의 직급, 사회적인 지위, 나이, 외모....

    그 자리의 종류는 다양하겠지만, 이 세상에 나보다 다양한 자리를 경험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는?

    “헤에...”

    화보 촬영 중인 여자친구의 길고 늘씬한 다리를 멍하니 감상하는 한심한 20대 청년.

    쭉 기다려준 송선영을 위해, 오늘만이라도 그녀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기특한 생각을 해봤다.

    “야!”

    “선영아~!”

    “이 바보야! 오면 온다고 미리 전화를 해줘야지!”

    그리고 혼났다.

    “어...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깜짝 맞아볼래?”

    “......”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정말로 맞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꼼짝 말고 기다려.”

    “네.”

    “...아니지. 다른 여자의 다리를 훔쳐보지 말고 대기실 안에서 기다려.”

    “어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너밖에 안 봐.”

    “안 믿어.”

    “선영아. 내 눈을 바라봐. 나의 진심이 느껴...”

    “좋은 말로 할 때 들어가.”

    “응.”

    스튜디오의 관계자 대기실에 얌전히 앉아서 송선영이 나오길 기다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안 나오네.”

    어느새 1시간 30분째. 메이크업을 지우는 여자친구를 기다리다가 화석이 될 것 같다!

    “어머? 강문수 씨.”

    “음? 아! 안녕하세요, 전지은 양.”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단번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녀는 한동안 나를 도와줬던 1살 연상의 누나, 전지은이었다.

    “여기 있는 걸 보니, 환자 치료가 끝난 모양이네요.”

    “얼마 안 됐습니다. 전지은 양은...?”

    “저는 여기로 출근하는 게 일과입니다. 수익 신경 안 쓰고 필요할 때마다 돈을 퍼붓는 이 기획사 소속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전지은의 적성은 배우.

    가문에서는 그녀의 화려한 외모만 보고 가업의 얼굴마담으로 썩혔는데, 지금은 초대형 영화의 주연 자리를 꿰차게 됐다.

    ‘인연이란...’

    어디서 어떻게 맺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 직전까지 여자랑 인연이 없었던 내가 ‘여자’ 문제로 여자친구에게 무릎 꿇고 싹싹 빌었으니 말이다.

    “송선영 양이 보면 또 뭐라고 할 테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여자친구에게 믿음을 못 주는 남자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당신의 냉동한 정자(精子)를 선물로 주면 돼요.”

    “쿨럭! 그, 그건 좀...”

    “농담입니다. 나중에 또 봐요.”

    휙~

    겨우 1살 차이지만, 송선영보다 여러 가지로 성숙한 어른의 분위기를 풍기는 전지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시사회에 나온 유명한 여배우들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대기실을 떠났다.

    띠리링~♪

    내 스마트폰에서 경쾌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이상한걸.”

    나는 이런 멜로디를 저장한 적이 없는데?

    하지만 누구의 소행인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통화: 귀여운 윤소라♥」

    “늦지 않게 발견해서 다행이네.”

    송선영이 봤다면 구두 굽으로 내 발등부터 부수고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통화: 윤소라」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한 후에 다시 저장하고, 통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문수 씨!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부원장님의 심부름만 아니었으면 병원에서 뵈었을 텐데...!)

    “괜찮습니다. 만날 시간과 기회는 앞으로도 많으니까요.”

    (시간을 잡아볼게요.)

    “흠. 당분간은 아무도 안 만나고 휴식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

    이건 엄살이 아니다.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세계에서 너무 흥한 인생이 돼버린 탓에 박탈감이 상당하니까.

    예상했음에도 이 정도.

    내가 그 세계를 현실이라고 믿었다면 견디기 힘들지 않았을까? 그만큼 완벽한 인생이었다.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알겠습니다!)

    “뒤숭숭한 마음이 정리되면 연락할게요. 병원에서 만날 수도 있고.”

    (네! 기다릴게요!)

    뚝.

    통화를 마쳤다.

    “...다행이네.”

    그녀의 목소리는 박효만의 꿈에 들어가기 직전보다 생기가 넘쳤다. 너무 넘쳐서 살짝 곤란할 지경이랄까!

    끼익-

    대기실의 문이 열리면서 진짜 잘생긴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딱 벌어진 어깨, 날렵하면서도 굵은 턱선, 짙으면서도 긴 눈썹,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눈매...

    부족한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 20대 중반 외모. 남자 얼굴에 관심 없는 나조차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 같았다.

    그런데...

    ‘전지은 양처럼 우연 같지는 않네.’

    대기실에 들어온 그가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강문수 씨죠?”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가 노래를 부르면 흐물흐물 녹아내릴 여자가 많을 것 같다.

    “네. 저를 아십니까?”

    “하하! 모를 리 없지요. 하계 올림픽을 뜨겁게 달군 삼관왕의 주인공을. 덕분에 돈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나에게 죄가 있다면 스포츠토토를 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그 얘기를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만... 설마, 저를 모르십니까?”

    “텔레비전에서 몇 번 봤습니다. 성함까지는 모르지만.”

    “그렇군요. 저는 배우 타우랑. 마오짜이 님이 감독을 맡은 영화 <이 천마 실화냐? 실사판>의 주인공을 맡게 됐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실사판!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주인공이 된 마오짜이의 경험담을 온전히 영화로 만든다는 의미.

    흥행은 둘째치고, 주인공(마오짜이) 역할을 맡은 이 남자가 얼마나 고생하게 될지는 안 봐도 훤했다.

    “대단한 영광이지요. 마오짜이 가주님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가 밤하늘의 별처럼 널렸는데, 저는 주인공을 맡게 됐으니!”

    “그 정도입니까?”

    “흥행은 확정입니다. 마오짜이 가주님이 만드셨으니까요.”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마오짜이 가주님은 영화를 제작해본 경험이 없는데요. 어떻게 흥행을 확신합니까?”

    “마오짜이 가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영화를 만들라고.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아하!”

    정말 완벽한 이유로군!

    현실에도 내 이해를 벗어난 세계가 있었다.

    “송선영 양을 만나러 왔습니까?”

    “네. 기다리는 중입니다.”

    “당신이라면 송선영 양보다 밤에 적극적이고, 애교도 많은 어린 소녀들을 만날 수 있을 텐데...”

    “배우가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군요.”

    죽여버릴까?

    한순간,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한 ‘아몰랑’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내 오른팔에 눈깔 촉수가 감겨 있었다면, 눈앞의 미남은 벌써 두 동강 났을 것이다.

    “하하! 오해하진 마십시오. 저랑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공하신 강문수 씨가 아까워서 해본 말입니다. 보통은 말도 걸지 않습니다.”

    “흠. 아무래도 타우랑 씨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제가요?”

    “네. 올림픽 국가대표는 제 본업이 아닙니다. 여러 종목의 세계신기록을 달성하고 금메달을 좀 따면서 주목받긴 했지만, 취미일 뿐이죠.”

    “취미...?”

    “당신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믿는 저의 모습은 발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저는... 아! 마오짜이 씨의 영화에서 당신을 빼버릴 정도는 됩니다.”

    “허풍이 심하시네요.”

    “못 믿겠으면 마오짜이 씨에게 물어보십시오. 물어보는 시점에 당신의 자리는 사라지겠지만.”

    “...실례했습니다.”

    휙~

    잘생긴 얼굴이 새빨개진 타우랑이 몸을 돌려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흐음.”

    참기 힘들군.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세계에서 너무 제멋대로 생활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끼익-

    그때, 거의 2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탈의실의 문이 열렸다.

    “어때?”

    같은 송선영이지만, 그녀가 질문하는 이유를 바로 눈치챘다.

    “더 예뻐.”

    촬영을 위해 이목구비를 강조한 짙은 색조 화장을 지우고, 질끈 묶은 꽁지머리는 꽃사슴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목선과 쇄골을 강조했다.

    복장도 길거리에서 입기에 부담 없는 새하얀 블라우스와 핫팬츠. 한껏 노출한 그녀의 매끈하면서도 새하얀 허벅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는 바뀐 게 없네.”

    “바뀌면 내 몸에 심각한 이상이 생긴 거지.”

    생물학적으로 보면, 수컷의 기능을 상실하고 죽을 때가 됐다는 신호다.

    “흐응~ 좀 더 능글맞아졌나?”

    꿈속에서 막 나온 나를 관찰하듯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송선영. 생선을 노리는 도둑고양이 같다.

    “가자.”

    “어디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는 유행은커녕 오늘 날짜도 아직 몰라.”

    “손이 많이 가는 남자친구네. 이것만 정해. 사람이 많은 곳, 적은 곳?”

    “적은 곳.”

    “좋아. 나만 따라 와.”

    엘리베이터로 향한 그녀는 어째선지 지하 2층을 눌렀다.

    * * *

    송선영이 전지은을 대단히 신경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부우웅-

    정면부가 독을 품은 노란색 개구리처럼 생긴 스포츠카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면서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

    “어때?”

    “...운전 잘하네!”

    내 머릿속에서는, 사고의 조짐이 보이면 송선영을 끌어안고 이 노란색 관짝에서 탈출, 못해도 그녀의 방패가 되어주는 시뮬레이션을 2436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이젠 두려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것보다 10배 이상 빨랐던 루돌프가 훨씬 덜 무서웠던 것 같다.

    심지어 심야 운전!

    운전면허증의 잉크도 아직 덜 마른 초보자가 운전하기에는 매우 좋지 않은 시간대였다.

    ‘내가 배워야지!’

    자살을 밥 먹듯 해서 겁이 없는 송선영에게 지금처럼 운전대를 맡겼다가는 언젠가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부우웅~!

    시속 90km를 돌파했다.

    “너무 좋아!”

    “그, 그래?”

    나는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은데!

    고속도로에서 시속 90km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내가 체감하는 속도는 시속 900km쯤 됐다.

    ‘진정해! 강문수! 진정해! 괜찮아! 문제없어! 진정해...!’

    흔들흔들~

    내 여자친구는 초보자답게 핸들을 자주 움직였다.

    차선 정중앙에 차를 예쁘게 위치시키려는 시도는 좋은데, 민감한 내 오감은 그 작은 움직임도 불안했다.

    하지만,

    “문수야. 놀랐지?”

    나에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무척 기뻐 보이는 송선영.

    그녀가 내 얼굴은 그만 돌아보고 운전석 정면만 봐줬으면 좋겠지만, 기분 깨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어. 잘하는걸?”

    “후후! 스포츠토토에서 딴 돈으로 샀어! 이게 여자들이 몰기 쉬운 차라고 하더라.”

    “그, 그랬구나!”

    “걱정하지 마. 이거 사고도 아직 많이 남았어.”

    나는 지갑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스포츠카를 추천한 인간의 목을 조르고 싶을 뿐!

    초보자에게 스포츠카? 스포츠카가 여성이 타기 좋은 차?

    송선영에게 앙심을 품은 인간이 틀림없다.

    “소개해준 분이 궁금한걸. 나중에 나도 소개해줘.”

    “응.”

    우리의 최종목적지는 바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는 풍경보다는 운전석에 앉은 여자친구의 새하얀 허벅지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데.”

    “내 다리가?”

    “아니. 우리를 1시간 넘게 쫓아오는 차들이 있어.”

    “목적지가 같은 모양이지.”

    “그럴 수도 있지만, 속도까지 완벽하게 같긴 힘들지.”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야간에 평균 시속 80km으로 달리는 스포츠카가 신기해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면...

    추적자다.

    “선영아. 나를 믿고 밟아.”

    “죽고 싶어? 운전은 내가 하는데, 너를 믿는다고 달라져?”

    “...그러면 내가 운전할까?”

    “그건 더 싫어.”

    부우우웅-!

    얌전히 달리던 송선영의 노란색 스포츠카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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