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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47화 (148/232)
  • 147화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꿈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마녀 라누벨라가 나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가는 건 맞지만, 절대적인 규칙을 깨진 못한다.

    타인에게 간섭 불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는 환자를 왕궁에서 탈출시키긴 했지만, 그건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떨어져 있으면 간섭할 수 없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기당했다니?”

    “말 그대로야. 마녀에게 선물 받았다고 착각하는 그 오른손은 온전히 네 생명으로 만들어진 거야.”

    “생명...?”

    “이 세계는 네 꿈이야. 그건 알지?”

    “압니다.”

    “현실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달콤한 환상. 그 오른손도 네가 만든 환상이지. 네가 만들지 않은 건, 현실에서 난입한 나뿐.”

    “...어째서 그리 확신합니까?”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니까. 너처럼 말 안 듣는 환자를 여럿 치료했지. 전부 성공하진 못했지만.”

    남해수는 내 경력에 영원한 상처로 기억될 것 같다.

    어쩌면 오늘 추가될지도?

    남해수 때랑 차이라면, 지금은 내가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 힘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가?”

    “돌아가봤자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겁니다. 사채까지 끌어다가 쓴 도박 빚도 쌓였고.”

    “무슨 도박을 했는데?”

    “제가 일했던 시공사에서 가장 최근에 재건축한 아파트 단지의 부동산에 투자했습니다.”

    “아아, 영혼까지 끌어모았군? 그런데 집값이 안 올랐고.”

    “네. 사기였습니다. 지하철이 완공되면 역세권이라서 오를 줄 알았는데, 이미 거품이 잔뜩 껴서 미분양이 속출했습니다. 바보 같겠지만, 제가 계약할 당시만 해도 경쟁률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완공되고 중도금 유예기간이 끝나자마자 포기자가 속출하면서 집값이 곤두박질을-”

    “그만!”

    “......”

    “너의 한심한 과거사에 관심 없어.”

    내가 오랫동안 상가건물에 살며 주워들은 지식이 적지 않다. 분식점부터 문방구에 이르기까지 제법 다양한데...

    부동산 중개업자.

    나는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을 만나서 덜했지만, P의 적성검사결과로 이 업계에 뛰어든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버려진 창고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비싸게 파는 선수다.

    ‘제대로 걸렸네.’

    부동산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사기를 덜 당한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조심하니까.

    반면, 건설업에 종사한 박효만처럼 주워들은 정보가 많은 ‘자칭 전문가’들이 가장 쉽게 당한다. 남의 조언을 무시하고, 제대로 조사해보지도 않고 과감히 투자하니까.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호구다.

    “그러면 골라.”

    “저에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현실로 돌아가서 죽도록 빚을 갚던가, 꿈속에서 이틀 정도 죽도록 아프다가 정말로 죽던가.”

    “...이게 뭡니까?”

    “선택지.”

    “둘 다 최악이잖습니까!”

    “바보냐? 좋은 선택지가 있으면 너에게 안 물어보고 실행했지.”

    둘 다 마음에 안 들었던 박효만이 역으로 나에게 제안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저를 여기서 풀어주고 아몰랑 님은 현실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도 너는 안락사로 죽어.”

    “마지막 1초까지 꿈속에서 불태우다가 죽겠습니다.”

    “허허! 거참...”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멋진 놈이군.)

    그러게요.

    내 여자친구도 끼어있어서 조심스럽긴 한데, 라누벨 환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게 확실하다.

    “너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빚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소리네.”

    “그들도 2배로 갚겠다는 말에 혹해서 빌려준 겁니다.”

    “은행 대출은? 은행도 2배로 갚는다는 말에 혹해서 빌려줬나?”

    “이건 저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아몰랑 님이랑 관계없습니다.”

    “오! 맞는 말이야.”

    나는 재판관이 아니다. 그를 비난하거나 처벌할 자격이 없다.

    “저를 풀어주시고 서로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누구 마음대로?”

    “...아몰랑 님의 마음대로지만, 저를 고문하고 죽일 필요가 없잖습니까?”

    “있는데.”

    “없습니다.”

    “잘 생각해봐. 너는 빚을 까먹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빚을 절대로 잊지 않거든.”

    “무슨...”

    “허! 기가 막히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일을 까맣게 잊다니.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군.”

    “오해입니다! 꿈속이라서 괜찮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박효만이 다급한 어조로 변명했다.

    “괜찮지 않아. 이 꿈을 평범한 꿈이라고 생각해?”

    “...그래봤자 꿈입니다.”

    “이상하네~ 나를 죽이면 수명이 늘어난다고 믿었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고작 꿈이라면.”

    “그, 그건...”

    “솔직하게 말해줄게. 믿지 않는 건 너의 자유지만. 이 꿈속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판타지 소설처럼 과거로 회귀하는 재시작 따위는 없어.”

    “...거짓말.”

    “거짓말인지는 네가 죽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SSS급도 초월한 절대강자입니다! 저 같은 하찮은 놈에게 화풀이할 필요가 있습니까!”

    “뭐래? 하찮은 너보다 하찮은 여자들을 감금하고 욕구를 풀었으면서. 나도 재미 좀 보자.”

    “그 여자들은 꿈입니다!”

    “유언은 그걸로 끝?”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놈입니다! 그때는 잠시 미쳤었습니다! 제발! 제발...!”

    태도가 돌변하며 살기 위해 발악하기 시작한 박효만.

    하지만 의자랑 딱 달라붙은 그의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너를 위해 고문을 잘하는 친구들을 모집했어. 밖에 대기 중이지.”

    “농담이죠?”

    “이것도 직접 확인해봐.”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몰랑 님!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다시 생각해주세요!”

    박효만은 대단히 필사적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직도 꿈에서 안 깨어난다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니, 박효만이 평범하지 않긴 하지만, 고통을 못 참는 겁쟁이인 건 확실했다.

    (이상하군.)

    그러게요.

    이번 꿈은 내 예상을 벗어난 이상한 일들이 정말 많은 것 같다.

    “수고해.”

    “안 돼! 가지 마-”

    쿵!

    독방에서 나온 나는 문밖에서 대기 중인 보좌관에게 말했다.

    “준비는?”

    “대기 중입니다.”

    라누벨 환자를 겁주려고 한 거짓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도록 해줘. 내가 죽이라고 할 때까지는 죽이지 말고.”

    “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휙~

    독방에서 미련없이 몸을 돌린 나는 다음 지시를 내렸다.

    “루돌프를 준비시켜. 늦어도 내일 안에 SSS급 괴물들을 박멸한다.”

    “아! 네!”

    이젠 꿈이 끝날 때까지 자기개발에 힘쓰자.

    * * *

    마취 없이 살가죽이 벗겨지고, 끓는 기름에 튀겨지고, 거세당하는 고통과 굴욕보다 빚이 싫을 수 있을까?

    보통은 아닐 것이다.

    “이상한데.”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SSS급 괴물들을 몰살해버릴 때까지도 박효만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럴 리 없는데?

    내가 고문 전문가들을 부른 건 사실이지만, 박효만이 손톱 하나 뽑히자마자 꿈에서 깨어날 줄 알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됐지?”

    “아몰랑 님이 세계에 산재한 SSS급 괴물들을 박멸하기까지 40시간 25분 13초 걸리셨습니다.”

    “그렇군.”

    박효만이 고문을 40시간이나 참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놈이 의연하게 고통을 참았을 것 같진 않군.)

    저도 동감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며칠 안에 세계의 모든 괴물을 박멸시킬 수 있겠지. 이 녀석만 빼고.”

    깜빡깜빡~

    마음껏 살육한 눈깔 촉수가 즐겁게 몸을 흔들었다.

    “일정을 잡아볼까요?”

    “아니. 나는 다소 위협이 되더라도 괴물을 남길 생각이야. 괴물이 사라지면 헌터들은? 일거리가 사라진 그들은 인간처럼 생긴 괴물일 뿐. 어쩌면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일지도 모르지.”

    “아몰랑 님이 계셔서 전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바보가 아예 없진 않겠지.”

    “박효만처럼요?”

    “맞아. 박효만처럼.”

    라누벨 환자가 눈을 뜨면 사라질 세계지만, 나는 단련을 겸해서 평화와 질서를 구축했다.

    펑! 퍼엉~!

    도시마다 폭죽이 터졌다.

    괴물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된 폭죽.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거리로 나와서 폭죽을 구경하고-

    “산타 아몰랑!”

    “아몰랑! 만세!”

    “와! 아몰랑~!”

    피해 없이 SSS급 괴물들을 박멸한 내 이름을 연호했다.

    산타 아몰랑.

    내가 출세한 최고기록은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제국의 이인자가 된 것이었는데, 오늘로써 완벽히 갈아치웠다.

    펑! 퍼엉~!

    그 뜨거운 광경과 분위기에 취한 보좌관이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저 요란한 폭죽이 인류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 같아요!”

    “흠. 남은 승리는 다른 헌터들에게 양보하자고. 박효만은?”

    “아몰랑 님의 위대한 업적을 전해 들은 기술자들이 휴식도 거부하며 죄인을 고문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문 기술자들과 초능력자까지 투입된 엽기적인 고문이 40시간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이걸 버틸 수 있을까?

    나는 1시간도 힘들 것 같다.

    “오셨습니까!”

    “아몰랑 님!”

    “어서 오십시오!”

    내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말끔히 씻고 독방 앞에서 환대해주는 고문 기술자들.

    박효만에게는 악마로 보였겠지만, 그들의 인상은 어디에나 있는 정육점 아저씨, 아주머니였다. 인간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 뿐.

    “대화가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아몰랑 님께서 죄인을 살려두라고 지시하셨을 때부터 정신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

    전문가다운 명쾌한 답변!

    매우 만족스러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인류의 영웅입니다. SSS급 괴물보다 위험한 인간의 분노를 잠재웠으니까요. 또 부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인류의 승리를 만끽하며 푹 쉬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말뿐이긴 하지만, 내가 영웅으로 치켜세워주자 감동한 고문 기술자들.

    옆에서 듣던 보좌관들도 흠모의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혀가 잘 굴러가는군.)

    감사요.

    (너는 실전에 참 강하단 말이지. 검술 빼고.)

    “...밖에서 대기하세요.”

    끼익-

    이 세계의 인간이 들어서 좋을 게 없기에 이번에도 홀로 독방에 들어갔다.

    ‘진짜 제대로 했네.’

    환풍기가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평범한 인간보다 100배 이상 예민한 내 코를 짙은 피의 냄새가 마비시켰다.

    겉보기에는 깔끔한 실내.

    박효만은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제발 죽여줘...”

    애원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돼.”

    “나도 빌었어. 이 지옥에서 이만 깨어나게 해달라고.”

    “......”

    진심으로 꿈에서 깨어나길 원했음에도 실패했다는 것 같다.

    단 한 번도 없었던 현상.

    박효만이 말했다.

    “그러니 죽여줘... 내가 미운 건 알지만, 이젠 충분하지 않아?”

    “...살고 싶어?”

    “아니. 죽고 싶어...”

    고문으로 삶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박효만은 죽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또 바뀐 점.

    “왼팔은 어떻게 된 거지? 반항해서 절단된 건가?”

    오른팔처럼 왼팔도 회복하지 못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당신의 말이 맞았어. 마녀가 나를 속였어...”

    “흐음?”

    “왼손도 칼날로 변했어. 무서워서 저항하진 않았지만...”

    “무섭다? 기술자들이?”

    “내가 점점 괴물로 변하는 기분이 들었어...”

    엉뚱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말뜻을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운 발견이군.)

    정보와 표본이 부족하긴 했지만, 환자의 정신이 육체 변화에 영향을 준 건 틀림없었다.

    확인할 방법은?

    “박효만. 잘 들어. 나는 네가 현실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질 때까지 안 죽이고 고문할 거야.”

    “......”

    “어떻게 할래?”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안 될 거야. 나는 틀렸어. 뭔가 그런 느낌이 계속 들어...”

    “흐음~”

    라누벨 환자 면담 완료!

    지금부터는 무당의 본능만으로 처방전을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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