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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36화 (137/232)
  • 136화

    [7장-5절] 어른이 되라

    SSS급 헌터.

    아니, SSS급 초능력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생이 바뀐다. 누구나 하는 노력 따위 없어도, 유전자보다 모호한 재능에 눈을 뜨면 그걸로 끝!

    정말 불합리한 세계다.

    “아몰랑 님. 한 번 봐주세요.”

    “...이게 뭔가요?”

    여성들의 얼굴 사진, 이름, 나이, 몸무게, 혈액형, 학력, 가족 이력 등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면접시험이요.”

    “제가...?”

    “현재 가정부들은 급하게 모은 임시방편이니까요. 이 중에 마음에 드는 여성을 골라주세요. 세계에서 엄선한 가정부들입니다.”

    “......”

    쿵!

    이력서를 종이 한 장에 압축해서 작성했을 텐데, 탑을 쌓아도 될 정도로 매우 많았다.

    “솔직히 좀 많죠?”

    “...저는 지금도 만족합니다.”

    “아몰랑 님이 검소한 편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SSS급 헌터랑 어떻게든 연줄을 이어두지 못하면 정서불안을 겪는 정신병 환자가 매우 많아요.”

    “그렇습니까.”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겪은 권력자 생활 덕분에 이해했다.

    뇌물, 아부, 청혼...

    제국의 이인자 ‘아몰랑 백작’에게 잘 보이려는 고위귀족, 왕족이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그들의 목적은 가문의 안위.

    누명으로 반역, 역모죄에 엮이더라도 빠져나갈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아몰랑 님의 마음이죠.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신가요?”

    “흠...”

    여자친구가 이미 있어서 처신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매우 답답한 상황이었다.

    “혹시, 동성이 취향이신가요?”

    “아뇨. 여자가 좋습니다.”

    그건 절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확고한 취향이 있긴 하시네요?”

    “크흠!”

    나도 남자다.

    “이렇게 할게요. 조금 전처럼 하나씩 질문할게요. 아몰랑 님은 짧게 답해주시면 돼요.”

    “좋습니다.”

    “가정부의 순결을 따지시나요?”

    “......”

    첫 질문부터 매우 험난했다.

    * * *

    (이건 같은 남자로서 송선영에게 비밀로 해주마. 알려지면 네 머리털을 전부 뽑아버릴 듯하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심해라. 예를 들어, 네 씨를 품은 가정부가 생겨도 미련 없이 꿈을 떠날 수 있을까?)

    “......”

    어차피 꿈이니 상관없다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내 아이?

    작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회초년생에게는 너무나 멀게 들리는 얘기. 하지만 비현실적인 얘기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만큼은.

    자기소개서에 ‘육아에 자신 있음!’이란 문장이 들어간 가정부 희망자가 눈에 띄게 많은 게 우연일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 세계는 너무 이상해.)

    선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환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조건을 떠올려봐라. 이 꿈은 어떻게 아직 유지되고 있지?)

    “그건... 어...?”

    생각해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마오짜이도 천마에게 버림받은 뒤에 고생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무림이란 세계를 쭉 동경해왔기에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지.)

    ...비슷하지 않을까요?

    박효만 씨도 ‘SSS급 헌터’에 굉장한 집착이 있었다.

    (괴물의 뱃속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하는 SSS급 헌터가 좋다고? 지금의 네 삶이랑 비교해봐라.)

    “......”

    괴물의 뱃속보다 500배는 낫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21살 애송이에게 큰 기대는 안 한다만, 오래 살고 싶으면 빨리 어른이 되는 편이 좋을 거다.)

    어른.

    똥구멍으로 나이만 먹은 늙은이를 말하는 게 아니리라.

    “노력해볼게요.”

    (노력은 누구나 한다. 맨손으로 땅을 가르는 천마부터 맨손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까지. 얼마나 인정받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러면 뭘 해야 하는데요?

    (생각. 네가 가장 못 하는 부분이지.)

    “......”

    (생각해보지도 않고 나에게 의지하고 물어보는 습관. 이 소운현이 워낙 대단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네 미래에는 좋지 않아.)

    귀찮기도 하고요?

    (오! 처음으로 내 생각을 읽었군.)

    “아몰랑 님. 예민한 질문에 답변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저야 뭐...”

    비슷한 경험자로서, 대면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이력서만 보고 퇴짜를 놓은 아가씨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이게 사장님의 마음인가?

    P의 적성검사결과만 보고 판단한 그들을 자주 비난했었는데, 같은 입장이 된 후에야 이해됐다.

    “......”

    “......”

    공손히 양손을 모은 채 한쪽 벽에 일렬로 서서 대기 중인 가정부들.

    마네킹으로 오해할 정도로 흔들림 없는 자세와 표정에서 전문성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예외 없이 예쁘다. 옷만 바꾸면 동화 속 공주님처럼 보일 만큼.

    (드디어 실감이 되냐?)

    “크흠!”

    “아몰랑 님. 목이 마르시나요?”

    “아몰랑 님. 필요하신 게 있으세요?”

    “아몰랑 님?”

    정곡을 찌르는 선배의 말에 헛기침했을 뿐인데, 그녀들의 관심과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야한 생각을 했구나?)

    “......”

    (네가 원하기만 하면 바로 야한 짓을 할 수 있는 아가씨들이지. 아! 1대1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꿀꺽.”

    내 상상력을 부추기는 선배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괜찮다고 하겠지만, 제가 불편합니다. 거실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아서 대기해주세요.”

    “네.”

    “네.”

    우르르.

    가정부들이 군말 없이 내 침실을 나갔다.

    (오! 처음치고는 제법이군.)

    시험하지 마세요.

    (이게 다 훈련이지.)

    “훈련은 무슨...”

    SSS급 헌터로 인정받은 박효만도 이런 삶을 누렸을 터. 마오짜이랑 상황이 다르다.

    줬다가 뺏긴 상황이니까!

    천마에게 버림받아서 처음부터 상황이 좋지 않았던 마오짜이랑 달리, 박효만 씨는 좋았다가 나빠졌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으로 살았던 김은정이랑 매우 비슷하달까?

    현실에서 남자친구가 없었던 그녀는 꿈속에서 미남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떠나갔을 때 견디지 못했다. 어째서? 현실의 자신으로 다시 돌아갔을 뿐인데.

    상실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주 느끼지만, 너는 이론보다 실전에 정말 강하군. 문제나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바퀴벌레보다도 우수해.)

    “감사요.”

    부모님을 일찍 잃고, 의탁할 친인척도 없는 내가 살아남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면 ‘돈’이 필수였지만, 그 돈을 벌고 쓰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깜빡?

    혼잣말하는 나를 눈깔 촉수가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앞으로 잘해보자.”

    깜빡~

    손으로 애완동물의 머리를 쓰다듬듯 눈깔을 만지며 생각했다.

    ‘여긴 꿈이야.’

    선배가 현실의 내 몸을 대신 움직여줘서 체감이 덜하지만, 꿈속에 오래 체류할수록 현실이 망가진다.

    나만 망가질까?

    송선영.

    연애는커녕 문자, 통화조차 제대로 못 해주면서 무슨 남자친구인가? 그녀에게 강한 집착이 없었다면 진즉 이별 통보를 받았으리라.

    “...웃차!”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섰다.

    깜빡?

    “더 쉬고 싶어?”

    깜빡깜빡~

    푹신한 베개의 감촉을 즐기던 눈깔 촉수가 좌우로 움직이며 부정했다.

    “가야지.”

    미녀들의 관심과 봉사를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기에는 내 체력이 너무 아까웠다.

    휘릭~

    옷장을 열어서 낮에 산 헌터용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후, 미녀들로 북적거리는 거실로 나갔다.

    “외출하시게요?”

    “나틸리아. 이 일대의 괴물 정보와 인력거 호출을 부탁해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야간사냥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저는 밤눈이 밝거든요. 시험해봐도 좋아요.”

    “그렇다면...”

    톡!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가속 초능력을 사용한 나틸리아가 거실의 불을 끈 것이리라.

    “제 오른손의 숫자는?”

    “삼.”

    냉장고 앞에 있던 그녀가 현관문으로 장소를 옮겼다.

    “...왼손은요?”

    “흠. 등 뒤에 숨기고 있어서 안 보이는군요.”

    톡!

    거실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놀랍네요. 제가 스마트폰의 빛에 의존하여 이동할 만큼 어두컴컴한 환경이었는데.”

    “시험은 끝났습니까?”

    “네. 농땡이를 부리지 않았다면 인력거가 곧 도착할 거예요.”

    똑똑!

    테라스가 있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몰랑 님. 열까요?”

    가정부 하나가 침착하게 물었다.

    “네. 열어주세요.”

    사라락~

    테라스를 가린 커튼을 치우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썰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매우 튼튼해 보이는 강철 썰매가 있고, 그것을 끌기 위해 모집된 초능력자가 8명이나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복장이...

    “이 인력거의 이름은 루돌프예요.”

    “그런 것 같네요.”

    실용성을 다소 포기한 루돌프 사슴 복장을 하고 있었다.

    “후후! 급히 준비한 것치고는 멋지지 않나요?”

    “제가 산타입니까?”

    “네. 인류의 희망이 되어달라는 의미가 있죠. SSS급 헌터들은 고유한 코드명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몰랑 님은 산타가 유력해요.”

    “내가 산타라니...”

    산타 아몰랑!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내밀겠다.

    “루돌프는 공간도약을 쓸 수 없는 아몰랑 님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인력거예요.”

    “아하!”

    나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쥐어짜기 위해 고심했을 지식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몰랑 님이 급히 찾으셔서 안전검사가 아직 덜 됐지만, 성층권에서 시속 1820km로 질주할 수 있어요.”

    “와우?”

    인력(人力)으로 음속(1224km/h)을 돌파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그리고 무리했을 때는 최장 68분 15초 동안 시속 5403km를 유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경우에는 하루의 휴식이 필요하며, 그동안은 이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요.”

    “그 속도를 사람이 맨몸으로 버틸 수 있습니까?”

    “그래서 뒷좌석에서 B급 보호막 초능력자가 루돌프를 보호하고, A급 증폭 초능력자가 강화한다는 방식이에요.”

    “아...”

    선객인 줄 알았는데, 4인용 썰매의 뒷좌석에 앉은 두 여인도 ‘루돌프’의 일부였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나에게 인사하는 그녀들은 산타를 돕는 난쟁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녹색 부츠와 미니스커트, 새하얀 스타킹을 잡아주는 가터벨트...

    애써 시선을 돌리며 인사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깜빡!

    눈깔 촉수는 이 모든 게 신기하다는 듯이 부지런히 두리번거렸다.

    “가시죠.”

    스슥-

    가속으로 잽싸게 옷을 갈아입은 나틸리아가 썰매에 타며 말했다.

    “나틸리아? 매우 추워 보이는 그 복장은 대체...?”

    “...보시다시피 산타 복장이에요. 아몰랑 님은 모자만 써주세요.”

    아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19금 산타로 변신한 나틸리아!

    헌터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다.

    “거참...”

    그녀가 건넨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썰매 앞 좌석에 앉았다.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태풍을 부르는 SS급 괴물이 호주 대륙에서 북상하는 중이에요.”

    “호주면...”

    “2시간 정도 걸려요.”

    “허허!”

    호주까지 겨우 2시간?

    초음속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지만, 딱 이런 기분이 아닐까.

    정말 빨랐다.

    “아몰랑 님. 썰매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안전띠를 매주세요.”

    “네.”

    안전띠가 필요할까? 음속으로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즉사일 텐데.

    찰칵.

    테라스에 무단주차된 썰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희가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루돌프가 착륙하기 편하게 테라스도 개조될 예정이에요.”

    “그렇군요.”

    “루돌프, 출발합니다...!”

    선두에서 썰매를 끄는 빨간 코의 인간 사슴 내비게이션이 외친 직후-

    쎄에엥-!

    우리는 바람을 찢으며 호주 대륙까지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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