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 정도면 SSS급 괴물 코끼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사심과 주관이 잔뜩 섞인 합리적인 추론을 해봤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다 끝난 후에 지상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온 나틸리아가 반쯤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네. S급 괴물의 공격을 무효화하면서 일방적으로 공격한다니... 이런 전투는 본 적이 없어요.”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요.”
“어머!”
S급 괴물의 레이저와 화염에 전부 날아가고, 내 몸이랑 같은 소재(나의 세계)로 되어있는 속옷만 남았다.
겉옷은 괴물 코끼리의 꼬리치기 한 방에 못 쓰게 된 탓!
이 속옷이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좀 더 연습해보고 싶지만, 옷부터 해결하죠.”
“네. 백화점- 아니, 헌터 전투복 전문점으로 이동할게요. 괴물의 튼튼한 외피로 제작한 S급 이상의 전투복만 취급하는 곳이에요.”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몰골로 그곳에 가면 불편한 소문이 돌 수 있어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깐 입을 옷을 가져올 사람을 부를게요.”
“저는 괜찮습니다.”
“속옷만 입은 사진이 인터넷에 박제될 텐데요?”
“......”
“금방 와요.”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이 세상에는 막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는 SSS급 괴물이 다수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SS급과 S급 괴물이 무시당하는 건 아니다.
진도 6의 지진이냐, 진도 10의 대지진이냐의 차이랄까?
뉴스로 뜨기에 충분했다.
(여러 차례 시도했음에도 박멸에 실패한 쉐도우 마우스의 서식지를 마침내 정리했습니다.)
(블루 레이저 카우와 그린 파이어 디어 토벌에도 성공하면서 새로운 농지를 확보했습니다.)
(오랫동안 박물관에 잠들어 있던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 그 주인이 등장했습니다!)
(이 SSS급 괴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부 대변인은 11번째 SSS급 헌터라고 단언했습니다.)
“흠...”
내 얘기로군?
호텔 텔레비전에서 온종일 저 얘기만 틀어줬다.
해외 방송은 다를 줄 알았는데, 큰 차이가 없었다. 물리적인 교류는 없어도 정보는 계속 주고받으니까. 그래도 좀 과한 홍보였다.
“최근에 SSS급 헌터가 전부 실종돼서 어수선하니까요.”
“아하!”
호텔 객실까지 따라온 나틸리아의 설명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시작부터 꼬여버린 이 꿈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또 간절!
뉴스에서도 그 이야기를 다뤘다.
(에이션트 블랙 엘리펀트 토벌을 나섰던 SSS급 헌터 10인의 흔적이 닷새 만에 발견됐습니다.)
(극동의 마녀 김지영 님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에이션트 블랙 엘리펀트의 둥지 인근입니다.)
(최강의 SSS급 헌터로 불렸던 박효만 님을 잃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뉴스에서는 시신이 발견됐다고 정중히 말했지만, 머리뿐이었어요. 몸은 지나가던 들개나 괴물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못 찾았고요.”
정부 관계자라서 더욱 자세한 정보를 아는 나틸리아가 툭 던지듯 내게 가르쳐줬다.
“...그녀를 좋아했습니까?”
“김지영 님이요?”
“네.”
“고인을 욕하고 싶진 않네요.”
“......”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SSS급 괴물들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어요. 한 마리를 쓰러트릴 때마다 인류의 터전이 30%씩 증가할 정도로 매우 넓죠.”
“30%...”
SSS급 괴물들은 욕심도 SSS급이네!
“그래서 에이션트 블랙 엘리펀트 토벌을 시도했던 건데, 보시다시피 최악의 형태로 실패했어요.”
“전멸이군요.”
“네. SSS급 괴물 중에서 에이션트 블랙 엘리펀트를 고른 이유는 토벌에 실패해도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분노한 괴물이 안 쫓아오나요?”
“D급 초능력 ‘색적’으로 살펴본 정보에 따르면, 에이션트 블랙 엘리펀트는 시력이 좋지 않아요.”
“시력...”
그래서 나를 못 찾았었군?
“집은 내일 오전에 리모델링까지 완벽히 끝날 거예요.”
“빠르네요.”
“F급, D급 초능력자 다수가 투입되기도 했지만, 특별한 요구사항이 없으셨으니까요.”
“특별한?”
“예를 들어,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김지영 님의 집은 뭐든지 최고여야 해서 신경 쓸 게 정말 많았죠.”
“아하!”
고인을 모욕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몰랑 님.”
“편하게 불러요.”
“이젠 안 됩니다. 정식으로 SSS급 헌터가 되셨으니까요. 인류의 자존심이자 희망인 SSS급 헌터를 평범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면 민중은 헌터를 신뢰하지 못해요.”
“이해했습니다.”
내가 투표했든 아니든, 외국에서 대통령 혹은 왕(王)을 욕하면 ‘누워서 침 뱉기’가 되는 거랑 똑같다.
‘잘 알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전쟁을 치러봤으니까.
전력에 도움이 안 되는 영주나 귀부인이 죽거나 생포됐다는 소문만 퍼져도 사기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상징성.
그리고 구심점!
인간은 늑대처럼 무리를 이루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몰랑 님. 쉬세요.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야근입니까?”
집에 안 돌아가고 호텔 거실에서 업무를 볼 모양이다.
“제가 불편하신가요?”
“...그건 제가 물어보고 싶은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몰랑 님의 경호는 제 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거예요. 이것을 위해 선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흠.”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나는 샤워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간단히 씻었다.
깜빡깜빡~
이때도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은 눈깔 촉수.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즐기듯 눈깔을 흔들었다.
“너도 박물관에 가만히 전시된 동안 따분했겠네.”
깜빡!
SSS급 괴물이 긍정하듯 눈깔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애완동물 같네.’
사기적인 성능까지 고려하면 다른 꿈에도 데려가고 싶을 정도. 마법소년 같은 ‘신(神)’만 상대가 아니면 매우 큰 도움이 되리라.
“쉬자.”
3명이 써도 될 정도로 넓은 침대에 팔다리 벌리고 편하게 누웠다.
깜빡깜빡~
인피니티 블레이드도 부드러운 베개의 감촉이 좋은지 눈깔을 비벼대면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자냐?)
오! 선배님!
오시는 타이밍이 예술이네요.
(온 건 한참 됐다. 네가 잘하고 있는지 잠자코 지켜봤을 뿐.)
어땠나요?
(순수하게 전투력만 따졌을 때, 네가 <나만 SSS급 헌터>의 주인공보다 압도적으로 낫다. 일반인과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의 차이겠지.)
당연하다는 거네요.
(그렇지.)
칭찬받기 참 힘들다.
(너는 신기하게 주연보다 조연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군. 발렌타인, 미봉, 덕순이, 나틸리아.)
나틸리아도?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풍요의 여신처럼 생긴 SSS급 외모의 S급 헌터가 평범할 리 있냐?)
...그래서 역할이 뭐였는데요?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지키다가 대신 죽는 역할.)
최악인데요?!
(그래서 의 작가가 욕을 엄청나게 먹고 1년 동안 잠적했었다는군.)
“흠...”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어차피 꿈이잖느냐?)
“...네.”
깜빡깜빡?
나는 어리둥절하는 눈깔 촉수를 왼팔로 쓰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 * *
리모델링이 끝난 집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숙박객은 공짜’인 호텔 조식을 먹고 싶었지만, 집에 환영회가 준비되어 있다는 나틸리아의 말에 포기.
곧장 집으로 이동했다.
탕탕!
「S급이 지키는 동화마을」
그런데 마을 입구에 달린 간판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 대신,
「SSS급이 지키는 동화마을」
알파벳 SSS에 금칠한 새로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틸리아 양.”
“편하게 나탈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아몰랑 님.”
“저러면 S급 헌터가 기분 나빠서 떠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아! 사전에 S급 헌터에게 허락을 받고 간판을 바꾸는 거군요.”
“네. 제가 허락했습니다.”
“...음?”
“제가 이 마을을 지키는 S급 헌터에요. 실제로 지킨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그렇군요.”
나는 인력거 대신 호텔 입구에 대기 중인 고급 승용차로 이동했다.
“어서 와요! SSS급!”
“환영합니다~!”
“사랑해요! 헌터 님!”
우리가 올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마을주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손을 흔들며 환영해줬다.
살랑살랑~
예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꽃가루도 뿌려주고...
“엄청나네요.”
형식적인 환영인사는 몇 번 경험해봤지만,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는 환영은 처음이었다.
“SSS급이니까요.”
“SSS급이 대단하긴 하군요.”
“이 마을의 집값이 하룻밤 사이에 100배 올랐다면 믿어지세요?”
“아무리 그래도 100배는 좀...”
“예전 같으면 20배 정도 올랐겠죠. 하지만 어제 뉴스 보셨잖아요? 아몰랑 님은 현재 세계에 단 한 명뿐인 SSS급 헌터에요.”
“유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마을이 12곳에서 1곳으로 줄어들었어요. 돈으로 안전을 사려는 사람은 이 지구에 넘쳐나고. 그렇다보니 마을의 집값이 미친 듯이 오를 수밖에요.”
“......”
스포츠토토도 그렇고, 내 주변 사람만 돈을 버는 것 같다.
“도착했어요.”
“흠... 이삿짐? 정리가 아직 덜 된 모양이네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아몰랑 님의 집은 리모델링이 끝났어요. 저건 이웃집의 짐이에요.”
“그렇군요.”
“못 하나를 박더라도 최대한 조용히 하라는 지침을 내려두긴 했지만, 약간의 소음은 이해해주세요.”
“네.”
나는 작년까지 상가건물 창고에서 살았던 몸! 웬만한 소음은 자장가처럼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곧 아시게 되겠지만, 옆집에 대통령 가족이 이사 와요.”
“대통령...?”
“옆집에 대통령 가족이 이사 올 예정이고, 윗집도 어느 왕족이 샀다는 소문이 있어요.”
“......”
“그리고 저는 아몰랑 님의 아랫집입니다.”
“...그렇군요.”
“며칠만 참아주세요. 안전을 돈 받고 팔 만큼 궁핍한 사람이 없는 동네라서 집값이 아무리 올라도 이사는 앞으로 거의 없을 거예요.”
“흠.”
스포츠토토를 못 했을 때처럼 속이 또 쓰렸다.
띵-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문이 열린 순간부터 환영회가 시작됐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내 또래의 소녀들이 엘리베이터 좌우에 서서 공손히 인사했다.
‘이건...?’
최강민의 집에 갈 때마다 보던 풍경인데?
모두가 똑같은 흑백 기조의 하녀 복장, 허드렛일로 썩히기에는 아까운 얼굴과 몸매...
내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따라온 나틸리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초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류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들이에요.”
“엘리트군요.”
강한 헌터를 보좌하는 가정부.
괴물이 날뛰는 세계에서 헌터의 집만큼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
게다가 동성이 아닌 경우, 우수한 헌터를 유혹해서 결혼까지 하면 단숨에 인생 역전!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왕이나 왕자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궁녀들이랑 비슷했지만, 이 세계의 가정부들은 연애가 자유롭고 사회 인식 또한 매우 긍정적인 최고의 직장이었다.
(답답한 후배.)
네?
(대접받아서 기분이 좋냐?)
...솔직히 좋습니다.
(그러냐? 충고 하나만 하자면, 네 목적을 잊지 마라.)
당연하죠!
(톱니바퀴처럼 잘 풀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
환자 박효만이 아닌 나를 위한 꿈의 세계 같았다.
(조심해라.)
네.
선배의 경고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