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30화 (131/232)
  • 130화

    (일이 꼬였구나.)

    “......”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 정당방위를 했을 뿐인데, 수백만 명이 사는 도시가 위기에 빠졌으니까!

    여기가 ‘꿈’이라서 그나마 죄책감이 덜했지만, 현실이었다면 숨이 탁탁 막혔을 것이다.

    ‘이게 내 잘못인가?’

    억울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일단은 수습이 우선이었다.

    (후배야. 칼도 없이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그래도 해야죠.”

    위이이잉-

    방어선이 뚫렸다는 경고음을 들은 사람들이 대피소로 피신하면서 한산해진 도시의 거리.

    괴물의 침공이 흔한 세계인 걸까, 이런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혼란 없이 질서 있게 이동했다.

    (도시에 등록된 C급 이상의 초능력자들은 평화의 광장으로 집결해주십시오. 불참할 경우에 생기는 법적인 책임과 불이익은...)

    “선배.”

    평화의 광장이 어디죠?

    (답답한 녀석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라. 네가 초능력자 모임에 가담한다고 해서 대세가 바뀌진 않는다.)

    “......”

    (네가 죽인 SSS급 초능력자들이 전부 이 나라의 소속인 줄 아느냐? SSS급 괴물을 쓰러트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것이다.)

    “......”

    (그런데 너는 그들이 적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부 죽였다. 전 세계가 위기에 빠진 셈이지. 며칠 안에 수십억이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거나 장난감처럼 유린당할 것이다.)

    “...그만.”

    선배의 말이 이어질수록 현기증이 몰려왔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때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중원을 피로 물들인 선배는요?

    (나? 나는 신중하게 선택했지. 살려주면 몸을 바치겠다는 절세미녀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까지... 실패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실수하도록 부추긴 내 잘못도 있으니 협조하마. 동쪽으로 달려라. 네 속도라면 10분 안에 갈 수 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명심해라. 네가 SSS급 초능력자 10명을 대신할 순 없다. 이건-)

    헛짓이죠.

    (그래.)

    혼란스러웠다. 옳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정면으로 부정당하면서 확신을 잃고 말았다.

    ‘마녀 라누벨라...’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죽음을 선사해주는 게 잘못된 걸까?

    이젠 그 무엇도 확신할 수-

    (답답한 녀석.)

    “......”

    (궁상떨지 말고 앞만 봐라. 너는 고작 20살이다. 힘이 좀 생겼다고 우쭐대는 애송이. 현실에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면 돼.)

    “현실... 네.”

    힘이 좀 생겼다고 우쭐대는 애송이란 말이 내 가슴을 푹 찔렀다.

    그러는 한 편,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이란 사실에 감사했다.

    (조금은 나아졌냐?)

    네.

    용병처럼 통일성 없는 전투복을 착용한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이곳이 평화의 광장.

    “이동!”

    “시간이 없어!”

    “빨리 타!”

    부우웅~

    두두두두-

    모여서 이동할 줄 알았는데, 초능력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신원 확인 및 출석 후에 바로 군용 차량이나 헬기를 이용해서 현장으로 보내졌다.

    그만큼 다급한 상황!

    2차 방어선이 뚫렸다는 의미가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듯했다.

    (2차 방어선이 뚫리는 일은 매우 드무니까. 최후의 보루인 3차 방어선까지 뚫릴 정도면 이미 도시의 모든 초능력자가 전멸했다고 봐야 하지.)

    “아...”

    이 세계의 원주민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 좋았지만, 기분 좋게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SSS급 초능력자의 부재.

    나를 상대로 한없이 무기력했던 그들의 역할이 이토록 클 줄 몰랐다.

    (다음부터 잘하면 돼.)

    “...네.”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김지영의 기억을 읽은 직후에 말리지 않아서? 그래. 내가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너는 안 죽였겠지. 하지만 그건 네 판단이 아니다. 남에게 의지하는 애송이를 벗어나라, 애송이.)

    “어라? 아몰랑 씨!”

    “안녕하세요. 금방 또 뵙네요.”

    거짓말을 판별할 수 있는 D급 초능력자가 있었다.

    “초능력자가 아닌 아몰랑 씨가 어째서 이곳에...”

    “저는 지킬 가족도, 재산도 없으니까요.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무작정 달려왔습니다.”

    “아...”

    “저도 궁금합니다. 소집령은 C급부터인데, 어째서 오셨습니까?”

    “저는 이름을 속이고 대리출석하는 분들을 찾는 역할이에요. 벌써 5명이나 발각되셨어요.”

    “아하!”

    초능력자의 권리는 누리고 의무는 내팽개치려는 얍삽한 자들.

    국가도 초능력자들을 마냥 우대해주는 호구는 아니었다.

    “별로 권하고 싶진 않지만, 종종 있으세요. 가족이나 애인의 복수를 직접 하겠다며 참전하는 민간인들이.”

    “......”

    “아몰랑 씨. 저쪽으로 가셔서 신청하시면 돼요. C급 이하의 괴물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와 방패를 지급해줄 거예요.”

    “네.”

    “무운을 빌게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회수할 수 있도록 위치추적기가 탑재되어 있을 만큼 공들여 만든 장비들이다. 그런데도 사망률이 90% 이상이지만.)

    해설 감사요.

    * * *

    보급관에게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는 설교를 10분쯤 듣고, 각서에 서명한 후에 장비를 대여받았다.

    덜컹덜컹.

    내가 달리는 속도보다 조금 빠른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

    “......”

    나랑 함께 탑승한 민간인들의 표정은 어둡고 비장감이 넘쳤다.

    10명 중 9명이 죽는 전쟁터로 향하는 인간의 표정이 밝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만.

    ‘나는 대체 뭘 하는 걸까?’

    코끼리 괴물의 뱃속에 사는 박효만 씨를 구출해서 설득해야 할 텐데,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엉뚱한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도살장으로 이동하는 돼지 같군.)

    “끙...”

    이곳에 있을수록 내가 왜소해지는 기분이었다.

    올림픽 삼관왕?

    지금은 이 세계의 인류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죄인이었다.

    (안 죽을 궁리나 해라.)

    네.

    (윤소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은 독창적인 세계관이다. 그래도 참고한 소설이 있는 것 같더군.)

    오오!

    미약한 희망이 보였다.

    (장르는 헌터물. 초능력 체계와 인물 설정은 를 따랐고, 강력한 괴물 설정은 <나만 SSS급 헌터>를 활용했다.)

    이 환자는 ‘SSS급 헌터’를 무척 좋아하네요?

    (묘한 집착이지.)

    “흠~”

    장르가 같긴 하지만, 어째서 복잡하게 두 작품을 참고한 걸까?

    (참고로, 네가 헌터물 의 세계관 주인공을 죽였다. 혼자서 SS급 괴물을 사냥할 수 있는 절대자의 멱을 따버렸지.)

    “.......”

    (그래도 희망은 있다.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세계관에는 괴물들을 창조하는 괴물이 존재한다. 그 괴물만 죽이면 괴물은 차차 줄어들다가 멸종하게 되지.)

    그 이야기를 자세히-

    “도착했습니다!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으시면 지금부터 제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십시오!”

    타인에게 방어막을 씌워줄 수 있는 A급 초능력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지휘관이 외쳤다.

    “예!”

    “네에!”

    칼과 방패를 쥐고 어설프게 군인 흉내를 내는 민간인들이 공포를 억누르듯 크게 외쳤다.

    “저희의 임무는 최전선에서 놓친 괴물들이 도시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사수하는... 준비! 옵니다!”

    “끼에에엑!”

    쿵!

    우리의 앞에 착지한 붉은색 토끼가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저 괴물의 이름은?)

    ...블러드 래빗?

    (오! 아깝게 틀렸다. 빅 블러드 래빗이다.)

    “D급 괴물, 빅 블러드 래빗입니다! 밟혀 죽기 싫으시면 뭉쳐 있지 말고 산개하십시오!”

    지휘관이 지시했다.

    “으아아아!”

    “하아아아!”

    하지만 이미 공포 혹은 복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듣고 있지 않았다.

    무모하게 돌격!

    나도 그 행렬에 가담했다.

    “끼에에에!”

    “아악?!”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 거대한 토끼의 앞발에 맞은 사람이 튕겨 날아갔다.

    삐지직-

    지휘관이 씌워준 A급 보호막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지만, 한 방에 활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죽어라!”

    동료의 희생으로 생긴 빈틈을 파고든 다른 사람이 칼을 휘둘렀다.

    껑충!

    “헛?!”

    그러나 뒷다리에 힘을 주며 가볍게 수직으로 뛰어오른 토끼 괴물.

    “멍하니 있지-”

    콰직!

    지휘관의 보호막도, 괴물의 육중한 몸무게를 버티진 못했다.

    첫 희생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나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복수라면...!’

    서걱-

    괴물 토끼의 왼발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줬다.

    “끼에에에~?!”

    “통하네?”

    이 칼에 초능력처럼 특수한 효과가 깃들어 있는 걸까?

    (S급 초능력 공학자들이 개발한 플라스마 전기톱이다. 평범한 날붙이랑 비교할 수 없지. 순수한 설정 성능으로만 따지면 <이 천마 실화냐?>의 천마도 일격에 썰어버릴 수 있다.)

    “하압!”

    “끼에에에...!”

    전혀 반응할 수 없었던 코끼리 괴물의 꼬리랑 비교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움직임.

    댕강!

    나에게 놈은 덩치가 황소처럼 거대해진 토끼일 뿐이었다.

    “끼에에에...”

    “오오! 훌륭한 솜씨입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지휘관이 나를 칭찬해줬다.

    “감사합니다.”

    “그 실력이면 C급 초능력자 수준의 전력입니다.”

    “예?”

    C급이라고?

    “하하!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하지만 자부심을 품어도 좋습니다. A급 초능력자인 제가 보증합니다!”

    “감사합니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렇다고 자만해서 B급의 괴물이랑 싸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 무기가 통하는 상대는 C급이 한계니까. B급부터는 미사일 폭격도 통하지 않는 진짜 괴물입니다.”

    “네.”

    “이것을 한 번 보십시오.”

    수긍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지휘관이 군용트럭에 설치된 실시간 모니터를 보여줬다.

    (끼에에에~?!)

    (끼에에~?!)

    내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힘들게 쓰러트린 괴물 토끼. 그 무리가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

    “이게 S급 초능력자의 실력입니다. 이 위에 SS급과 SSS급이 또 있지요. 그러니 아몰랑 씨는 무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나라는 절대 약하지 않으니까요.”

    “...네.”

    지휘관은 약하지 않다고 했지만,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벌어진 소모전은 도시에 큰 피해를 줬다.

    SSS급 초능력자들의 실종.

    그 영향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 * *

    “흠...”

    외면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최악의 기분이었다.

    (이상하군. 나는 네가 좀 더 뻔뻔한 줄 알았는데.)

    어째서요?

    (로맨스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소맥 공작의 야망을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킨 백작이 누구였더라?)

    “그건...”

    할 말 없었다.

    (환자의 로맨스를 부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과부를 양산한 네가 죄책감에 시달린다니? 이상하군.)

    “...그러게요. 참 이상하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나에게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해주지 않았으니까.

    역으로, 소맥 공작은 전쟁을 일으킨 나를 칭찬했었다.

    (답답하냐?)

    네.

    인간을 상대할 때는 SSS급도 간단히 죽였지만, 괴물은 목숨 걸고 싸워도 B급 1마리가 한계였다.

    초능력에 99% 의존하는 인간.

    육체가 순수하게 강한 괴물.

    그 차이가 명백했다.

    (이대로 네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포기하고 자살하는 전개도 나름 재미있겠지만, 실수를 유도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방법을 가르쳐주마.)

    “방법...?”

    이 박물관에서요?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환자를 삼킨 SSS급은커녕 흔한 B급 괴물도 버거운 나에게 희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만 구시렁대고 계속 가라.)

    네.

    박물관에는 괴물을 사냥하는 무기부터 박제된 괴물까지 다양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끼엑!”

    “크아앙!”

    심지어 F급의 하찮은 괴물은 구경거리로 사육 중.

    그것들의 우리 앞에 가장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었다.

    “......”

    온몸이 단단히 포박된 D급 괴물을 만져볼 수 있는 체험장까지?

    박물관 특유의 지루함을 뒤덮을 만큼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다.

    (오! 저기 있군.)

    “저건... 칼?”

    원통형 유리관으로 밀폐된 공간에 전시된 칠흑의 칼이었다.

    깜빡깜빡.

    십자 보호대(cross-guard) 정중앙에 박힌 커다란 생체 눈깔만 아니었다면 평범했을...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

    “...예? 슈퍼- 뭐요?”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 칼을 휘두를 때마다 사용자의 몸과 마음을 조금씩 빼앗는 SSS급 괴물의 이름이다.)

    “아!”

    (내 의도를 이해했냐?)

    “네. 확실히.”

    슈퍼 그랜드 갤럭시 제너럴 인피니티 블레이드.

    나는 너로 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