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신기하네.”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초능력자가 존재했다.
시간을 멈춘다던가?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너무 터무니없는 초능력이었다. 수천억 광년이 떨어진 행성의 시간까지 멈춘다는 얘기였으니까.
이건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던 마법소년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 아니, 신(神)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무, 무효화?!”
내게는 안 통한다.
“죽기 전에 보여주고 싶은 다른 초능력은 없어?”
“히익?!”
겁에 질린 여자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주저앉았다.
“없구나?”
“살려주세요!”
“너만 멀쩡하면 먼저 쓰러진 8명에게 미안하지 않을까?”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 제발...!”
“정말?”
“네, 네...”
세상의 시간을 정지하는 사기적인 초능력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위협이 안 되는 초능력이기도 했다.
데리고 다니면 시간을 아낄 수 있지 않을까?
(또 여자냐?)
“...또 시간을 멈춰.”
“못 해요.”
“뭐든지 한다며?”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멈출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아요!”
“쓸모없네.”
“히익?! 저를 살려두시면 분명히 쓸모가 있을 거예요!”
“그건 보면 알겠지.”
“예?”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초능력자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선배.
(한심한 녀석. 나에게 의지하는 버릇을 얼른 고쳐라.)
노력해볼게요.
(호오~ 초능력으로 미소년들을 납치해서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고상한 취미를 가졌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11년 동안 이 짓을 해왔어.)
“11년 동안 미소년들을 납치해왔네?”
“나, 나는-”
우득!
변명도 듣기 싫었던 나는 그녀의 목을 단번에 부러트렸다.
“너무 성급했나.”
고통 없이 지옥으로 보내줬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꿈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할 필요는 없으리라.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범죄자로 몰리고 싶지 않으면.)
“물론이죠.”
내 목숨을 노린 자들을 용서할 마음은 없다.
“악마-”
“이 괴물-”
죽기 전에 악담을 퍼붓는 초능력자들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줬다.
(후배여. 축하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SSS급 초능력자를 전부 처리했구나. 강력한 괴물이 침공해오면 인류는 막지 못할 거다.)
“...하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너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
환자만 깨우면 그만인 내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맞았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째서일까?
살짝 혼란스러웠다.
(박효만의 초능력을 시기한 자들이 작당해서 그를 함정에 빠트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장소로군.)
“가보죠.”
“꺽-?!”
푹!
가장 처음에 만난 여자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마무리한 후, 나는 박효만 씨가 실종된 장소로 향했다.
* * *
(에인션트 블랙 엘리펀트다.)
“흠...”
환자의 상상력이 부족했던 걸까?
괴물이라고 했지만, 이름은 형용사와 명사로 구성된 순수한 영어. 외형은 심해어(深海魚)보다 평범했다.
검은색 코끼리?
덩치가 축구 경기장보다 크고 눈매가 사납다는 점만 빼면...
(육식성이지.)
초식성인 일반적인 코끼리랑 달리 고기를 먹을 뿐이다.
‘저 덩치를 유지할려면 하루에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하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자신의 둥지에서 태평하게 낮잠을 즐길 상황이 아닐 텐데, 저 거대한 괴물은 드러누워서 꿈쩍하지 않았다.
(꿈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킁.”
(괴물들은 몸속에 코어라는 동력원을 가졌기에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아하!”
그런데 어째서 육식성이죠?
(괴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유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별미이기 때문이지.)
그러면 사람이 사는 도시는 뷔페 맛집이겠네요?
(그런 셈이지.)
지금부터가 문제다.
“선배. 박효만 씨가 괴물의 뱃속에 잡혀들어간 건 확실한가요?”
(두 여자의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니라면 확실하다.)
“흠.”
저들이 죽었다고 단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박효만 씨는 괴물의 뱃속에 아직 살아있고, 나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서 설득해야 하는 입장.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해보죠.”
스르릉-
칼을 오른손에 쥔 나는 괴물 코끼리를 향해 살금살금 접근했다.
‘이 무슨...?’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실감 되는 괴물의 비현실적인 덩치.
커도 너무 컸다!
(SSS급 초능력자들이 사냥을 포기했을 정도로 강력한 괴물이지. 전 세계에 이런 놈은 23마리밖에 안 된다.)
23마리! 충분히 많은데요?
“......”
어떻게 쓰러트려야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선택은 네 자유다.)
“...해봐야죠.”
만만한 부위를 찾던 내 시야에 괴물의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마저도 두께가 기차 같았지만, 그나마 내가 베어낼 엄두라도 낼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정신을 집중하고...’
발렌타인에게 배운 검술을 떠올리며 칼을 힘껏 내리쳤다.
팅-!
“팅?”
칼이 튕겨져 나갔다!
“뿌우우우!”
하지만 괴물 코끼리를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휘릭- 퍽!
채찍처럼 휘둘러진 기차에 처맞은 나는 맥없이 훨훨 날아갔다.
(한심하긴...)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튕기고 구르며 콘크리트 잔해를 3개쯤 부순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커억?!”
한 방에 온몸이 엉망이 된 나는 피를 한 바가지나 토했다.
내가 가장 경계했던 순수한 물리력!
이 초대형 괴물 코끼리에게는 그것이 충만했다.
“뿌우우우!”
“콜록! 너무 세잖아?!”
어딘가에 떨어트린 칼을 회수할 생각도 못 하고 후퇴를 결심했다.
“뿌우우?”
몸을 일으켜 세운 괴물은 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쿵! 쿵! 쿵!
걸을 때마다 지축이 흔들렸다.
“...꿀꺽.”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괴물의 시야가 닿지 않는 배 아래에 숨은 채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
“뿌우우...”
쿠구구-
꼬리에 흠집을 낸 인간을 찾지 못한 괴물 코끼리는 평평한 둥지로 돌아와서는 다시 누웠다.
“미친!”
이대로 깔리면 100% 사망 확정이기에 나는 열심히 달렸다.
쿠웅!
그리고 완전히 바닥에 누운 괴물의 거대한 육체.
간신히 깔리지 않은 나는 얼굴에 묻는 피와 흙먼지를 옷으로 대충 닦고 조심스럽게 둥지를 빠져나왔다.
(소감은?)
괴물에게 잡아먹힌 박효만이 죽거나 내가 자살하지 않는 한, 꿈의 세계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즉,
“망했는데요?”
꿈속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 * *
소중한 내 목숨을 노린 SSS급 초능력자들을 몰살시킨 것에 후회는 없지만, 세상에 단 23마리뿐인 SSS급 괴물을 쓰러트릴 수단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사실이었다.
짤랑!
“감사합니다! 손님!”
선배가 훔쳐본 두 초능력자의 은행 계좌에서 돈을 뽑았다.
‘돈으로 고생은 안 하겠네.’
평범한 계좌였다면 어려웠겠지만, 고상한 취미에 쓰이는 비밀계좌는 계좌와 비밀번호만 알면 누구나 돈을 찾을 수 있게 해놨다.
그 액수가 적지 않은 덕분에 도시에서 옷을 새로 맞추고, 더러워진 몸을 씻고....
쿵! 쿵! 콰직- 쾅-!
마지막에는 미소년들이 갇힌 지하실로 향했다. 그들이 주인에게 버림받은 애완동물처럼 굶어 죽지 않도록 구출하기 위해.
나의 발길질 3방에 부서진 철문 너머에는 호화로운 방이 있었다.
“애완동물...?”
“웁웁!”
“웁웁웁!”
입에 물린 재갈 탓에 말을 못 하는 소년들이 일제히 나에게 달려와서 구해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등 뒤로 꺾인 채 포박된 두 팔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유일하게 자유로운 두 다리로 지하실 내부를 돌아다니며 사료와 물을 먹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했다.
“의외로 깔끔하네.”
나였다면 발차기로 주위에 보이는 가전제품을 전부 부쉈을 텐데.
(사고치면 거세당한다.)
“......”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얌전한 애완동물로 만드는 조교실도 있지. 나이가 들어 병든 애완동물을 처분하는 고문실도 있고. 구경할 테냐?)
아뇨.
여기서부터는 나라에 맡기기로 했다.
* * *
11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미소년 연쇄 납치면 매우 큰 사건일 텐데, 뉴스에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이게 나라냐.”
(생각이란 걸 해라. SSS급 초능력자를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시키면 괴물은 누가 막냐?)
“끙...”
필요악(必要惡)이란 걸까?
감금당한 미소년들을 구출한 내가 죄인처럼 조사받는 이유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거짓말을 감지할 수 있는 D급 초능력자입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정말로 반갑다!
이 인간 거짓말탐지기가 ‘나의 세계’에 막혀서 거짓말을 전혀 감지해내지 못할 테니까.
나로선 운이 좋은 셈.
“서로 눈살 찌푸리는 일이 없도록 진실만을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D급 초능력자까지 합석한 상태에서 조사관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까?”
“네.”
이번에도 망가진 개연성조차 고치는 최고의 변명, 만병통치약 ‘기억상실’을 활용하기로 했다.
“다음 질문입니다. 그곳은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기억을 잃고 헤매면서 쉴 곳을 찾던 중에 발견했습니다.”
조사관은 초능력자를 힐끔 돌아본 후에 이어서 질문했다.
“감시카메라에 은행에서 돈을 찾고 옷을 구매하셨더군요.”
“지금은 안 갖고 있지만, 호주머니에 은행 계좌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가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쉽사리 믿기 힘들었던 조사관은 D급 초능력자를 돌아봤으나,
“진실이에요.”
“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감이 좋은 조사관이군. 저 초능력자에게 감사해라. 없었으면 굉장히 고달팠을 거다.)
그러게요.
“질문은 끝났습니다. 괴물에게 가족이나 애인이 잡아먹히는 끔찍한 광경을 본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사례가 종종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송선영이 추락해서 죽은 모습을 잊고 싶으니까.
“시민권도 내드리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민의 의무로서, 당신이 우연히 발견한 지하실에서 본 것들을 비밀로 해주십시오.”
“의무입니까?”
“네. 의무입니다.”
SSS급 초능력자의 범죄를 발설하지 않는 것이 의무라?
정말 대단한 나라다.
“알겠습니다.”
“말로는 안 됩니다. 법적인 효력이 있는 이 서약서에 서명해주십시오.”
“...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인간혐오가 생길 것 같다.
* * *
“수고하셨어요, 아몰랑 씨!”
“초능력으로 제 거짓말을 감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원망하진 말아 주세요. 괴물을 잡을 수 없는 D급 초능력자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어요...”
D급 초능력자가 풀이 죽은 얼굴로 앓는 소리를 냈다.
“오해하지 마세요. 순수하게 수고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탐지하는 초능력. 저는 SSS급 초능력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을 잡는 초능력자!
멋지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가에서 그 괴물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이 D급 초능력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처럼 힘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한계이리라.
“그런데 아몰랑 씨.”
“네.”
“이름을 아몰랑이라고 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대현자가 키우던 애완동물의 이름입니다.”
“비밀... 애완동물...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네요.”
“예? 아, 네.”
딱히 의도한 이름은 아니었는데, 말해놓고 보니 그랬다.
SSS급 초능력자가 미소년들을 애완동물로 삼은 엽기적인 사건을 비밀로...
내가 ‘아몰랑’을 선택한 이유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이용했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몰랑 씨. 안 좋은 기억은 전부 잊으시고 새로운 삶을 사세요.”
“노력해보겠습니다.”
위이이잉-!
그때, 도시 전역에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방송도.
(2차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2차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불길하네요.”
방송을 들은 D급 초능력자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왜요?”
“최근에 최강의 SSS급 초능력자 박효만 씨가 당했어요. SSS급 초능력자를 더 잃게 되면 지금처럼 도시의 방어선이 쉽게 돌파당할 거예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이건 나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