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초능력.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오컬트.
마법, 무공, 선술 등도 따져보면 전부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있는 학문(學問)이란 두루뭉술한 설정을 넣어서 아닌 척할 뿐.
“그건 초능력입니까?”
“초능력이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하하...”
굉장히 쌀쌀맞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지만, 이 여성이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 아닐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환자의 아내나 여자친구 정도?’
아직 확인된 건 아니지만, SSS급 초능력을 가진 남자가 주위에 이런 매력적인 여성이 있는데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까?
그럴 리 없다.
“박효만 씨를 모릅니까?”
“알아요.”
“오!”
정말로 아내 혹은 여자친구? 의외로 쉽게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분은 왜 찾으시죠?”
“친구입니다.”
가장 무난한 답변.
남해수처럼 존재하지도 않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이번 환자는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은 듯했다.
“친구? 정말인가요?”
약간의 적의마저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
“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이 여성 초능력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박효만을 아주 잘 아는 모양이네?’
잘 모른다면 ‘아 그러세요?’라고 넘어갔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좀 과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가 죄입니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어째서 당연하다는 겁니까?”
“네. 왜냐하면...”
“......”
나는 중요한 순간에 말끝을 흐리는 사람이 너무 싫다. 그게 대단한 미녀일지라도!
“그는 SSS급 괴물을 사냥하다가 죽었으니까요.”
“...정말로요?”
“네.”
“.......”
아무래도 거짓말쟁이들끼리 만난 것 같다.
* * *
‘죽었다고?’
그럴 리 없다. 환자가 죽었다면 이 세계가 이처럼 유지될 리 없으니까.
박효만 씨는 이 부근에 있는 게 확실하다.
(수상하군.)
그렇죠?
(네가 저 여자의 머리를 만질 수 있다면 진실을 알 수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네.
손이라면 모를까, 다 큰 성인의 머리는 예의를 지나치게 벗어났다.
‘게다가...’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여자를 무슨 수로 잡겠는가?
“저 지니어스 울프는 혼자 잡으신 건가요?”
“어... 천재 늑대요?”
“아뇨. 늑대가 똑똑하다고 두 발로 뛰진 않잖아요? 이 괴물의 이름은 지니어스 울프입니다.”
“......”
번역하면 같은 의미잖나?
지적해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문제로 따질 생황이 아니었다.
‘박효만 씨가 죽었다고 단정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수도 있어.’
사극 <궁녀 덕춘이> 때처럼 내가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환자의 목숨을 구할 가능성도 있다.
“그 늑대... 괴물은 제가 혼자 죽였습니다.”
“등급이 어떻게 되시죠?”
등급.
내 운전면허증을 묻는 듯한 태도.
임기응변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제 개인정보를 모르는 분께 가르쳐주고 싶지 않군요.”
“그런가요? S급 앞에서 자신을 감춰야 할 만큼 자존심이 대단한 분일 줄은 몰랐네요.”
(답답하군! 후배야! 기습해서 이 건방진 계집의 머리통을 후려쳐라. 불필요한 정보까지 싹 얻어줄 테니!)
오! 멋진 제안이네요!
평상시의 나였다면 선배의 비윤리적인 제안을 거절했겠지만, 이 여성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냥 저질러?’
이런 내 마음을 아는 걸까? 거리를 좁힐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다.
언제든지 하늘로 도망칠 수 있는 초능력자를 잡으려면 일단 최대한 접근해야 하는데, 그녀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바보냐? 정체를 숨기면 당연히 경계하지!)
아하!
“혼자서 용케 S급 사냥터에 들어올 생각을 했네요.”
S급 사냥터!
처음 듣는 용어였지만, 괴물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장소라는 건 이해했다.
“실종된 친구를 찾으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말해줘도 모를 겁니다. 강문수. 아름다운 숙녀분은?”
“제 이름을 모르나요?”
매우 자존심 상했다는 말투로 내 얼굴을 째려보는 미녀.
피식 웃으며 답해줬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당신의 이름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틀렸어요. 모든 사람입니다.”
“......”
중증이네.
이 여자가 라누벨 환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능성을 열어둬라. 이번 환자가 강하고 예쁜 여자로 태어나고 싶었을 수도 있잖느냐?)
정말 충격적인 가능성이네요!
“저는 세상에 단 10명- 아니, 9명뿐인 SSS급 초능력자, 극동(極東)의 마녀 김지영입니다.”
“오! 대단한 분이셨군요. 같은 SSS급 초능력자였던 박효만 씨랑 어떤 관계이십니까?”
“함께 SSS급 괴물들을 사냥한 전우였어요.”
전우(戰友).
미지근한 관계였다.
‘수상한데...’
대단한 남녀끼리 꼭 사귀란 법은 없지만, 이 세계가 ‘환자만을 위한 꿈’이란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상했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을 가능성?
그랬다면 ‘김지영’이란 매력적인 SSS급 초능력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주인공 주위에 미남들만 득실거렸듯이.
환자에게 친절한 꿈의 세계는 취향을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기다려라. 현실에서 윤소라가 조사하는 중이다. 지니어스 울프, 김지영. 자료가 더 필요하다는군.)
감사요.
선배 덕분에 현실에서 바로 정보를 받을 수 있어서 편리했다.
‘이 세계가 소설이나 만화를 기초로 만들어졌다면...’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하리라.
“어디 가시죠?”
“SSS급 괴물을 사냥하다가 실종된 친구를 찾으러 갑니다.”
이 수상한 여자 때문에 시간을 많이 지체하긴 했지만, 환자가 ‘박효만’이란 본인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에 만족했다.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환자가 당연히 주인공 ‘덕춘이’일 줄 착각해서 고생했으니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다는 보증을 얻은 셈.
두둥실~
“솔직히 놀랐어요. 박효만 씨에게 친구가 있을 줄은.”
중력을 무시하는 유령처럼 허공을 날아서 따라온 여자가 나를 신기한 생명체처럼 쳐다봤다.
“당신이 박효만이란 사람에 대해 제대로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릴 수 있을 만큼 우정이 두터운 친구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돈을 빌렸었나요?”
“네.”
나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돈은 절대 안 빌려준다는 철칙이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그러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거짓말쟁이가 되기로 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찾는 건가요?”
“돈을 빌려줄 만큼 친한 사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목숨은 안 걸었습니다. 보다시피 멀쩡하잖습니까?”
주위는 조용했다. 나를 공격했던 늑대 괴물이 그리워질 정도로.
“그거야 아직 괴물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죠.”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판단하겠습니다.”
박효만 씨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찾아야 한다.
내가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사천성에서 마오짜이를 놓친 뒤, 중원 전역을 돌아다녔잖은가?
쉽게 끝낼 수 있는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머! 제 말을 곡해하셨네요.”
“무슨 곡해요?”
“목숨을 위협하는 대상이 괴물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군요.”
툭, 투둑, 툭...
내 목숨을 노리듯 날아든 물체들이 닿기 직전에 힘을 잃고 떨어졌다.
“무효화...!”
“시간 없는데 귀찮게...”
나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자를 향해 달렸다.
그녀가 수상한 태도로 거짓말할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알더라도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스르릉-
괴물을 썰었던 칼을 꺼냈다. 이건 내가 꿈속에서 시작할 때 옷처럼 가져온 특제품.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 때처럼 칼날에 매번 피를 묻힐 필요 없이 ‘나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억을 훔쳐본 후에 죽여라.)
노력해볼게요!
여자는 망설임 없이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칼이 닿지 않는 안전한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하겠다는 계획.
“흥!”
여기가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면 그녀의 판단이 옳았겠지만, 이곳은 반파된 고층건물이 즐비한 도시의 폐허.
그리고 나는 현대의 육상을 제패한 남자다.
팟!
꿈속에서 더욱 빨라진 나는 유리가 깨진 창문의 창틀을 밟으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S급 무효화에 B급 신체강화 초능력까지?! 넌 대체 뭐야?!”
경악한 여자가 물체를 던지며 건물을 오르는 나를 공격했다.
“까불긴.”
덥석.
나에게 날아오는 물건을 붙잡아서 역으로 그녀에게 던졌다.
“앗?!”
피를 묻혔다면 적중했겠지만, 너무 성급했다. 내가 던진 벽돌은 그녀의 초능력에 붙잡혀서 금방 힘을 잃었다.
“쯧.”
“감히...!”
쿠구구구-
나에게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가 꼼짝 않고 있던 양팔을 휘저었다.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모양새.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헉!’
캉! 카강!
건물의 위쪽에서 두꺼운 철근이 우수수 떨어졌다.
저건 초능력이 아닌 중력!
무시했다가는 살짝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베어버려.)
“말이야 쉽죠...!”
나는 깨진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회피했다.
(한심하긴.)
쉬운 길을 놔두고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상황을 이렇게 질질 끄는 건 좋지 않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오!’
현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가전제품의 전선. 식빵을 굽는 토스터면 무게도 딱 적당하다.
스윽-
칼로 내 손목에 피를 내서 가전제품과 전선에 대충 묻혔다.
(조잡한 발상이군.)
“킁. 두고 보세요.”
도망친 줄 알았던 여자는 건물 사이를 빠른 속도로 저공비행하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나로선 나쁘지 않았다.
“안녕?”
기습적으로 허공에 있는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흥!”
그녀는 나를 놀리듯 아슬아슬하게 안 닿는 거리까지 후퇴했다.
“받아!”
나는 예정대로 토스터를 던졌다.
“이까짓 거... 헛?!”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여자가 당황했다.
휘릭~
토스터의 전선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내려와!”
나는 그 상태에서 전선을 당겼다.
우득!
“커억-?!”
눈이 뒤집히고 입에 게거품을 문 그녀가 안간힘을 썼다.
두둥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탓에 초능력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녀는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훌륭한 인간 엘리베이터다.
(야! 머리!)
네!
무사히 착지하자마자 여자의 목을 감고 있는 전선을 당겼다.
“살려-”
“늦었어.”
빠각!
무릎으로 그녀의 안면을 찍었다.
(좋아. 됐다.)
털썩.
선배가 기억을 읽었음을 확인한 나는 팔다리가 축 늘어진 여자를 미련 없이 버렸다.
“.......”
“...어쩔까?”
이대로 머리를 밟아서 부술까?
“감히 네놈이! 당장 김지영 양에게서 떨어져...!”
그때, 나를 향한 덩치 큰 사내가 곰처럼 돌격해왔다.
“누구?”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남자! SSS급 초능력자, 강철의- 아악?!”
서걱!
내 칼에 오른팔이 절단된 남자가 추하게 비명을 질렀다.
“강철이 뭐라고?”
“내 팔?! 내 팔이- 꾸엑?!”
혼란에 빠진 남자의 복부를 태권도 옆차기로 힘껏 밀어쳤다.
“하압!”
이번에는 또 다른 여자가 칼을 들고 나를 향해 도약했다.
아직 20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앳된 얼굴.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대검은 자신의 몸만큼 크고 흉흉했다.
(겉멋만 들었군.)
그러게요.
하지만 코끼리처럼 큰 괴물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저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인간이지.”
사람을 죽이는 용도로 저렇게 큰 칼은 필요 없다.
서걱-
저렇게 무거운 쇳덩이를 힘들이지 않고 휘두르는 소녀가 놀랍긴 하지만, 내 감상은 딱 거기까지.
나보다 한참 느린 인간을 상대하는 건 간단했다.
“꺄아악...?!”
한쪽 다리를 잃은 소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이놈!”
“이 새끼가!”
동료가 더 있었군? 쓰러트린 연놈들까지 합치면 총 9명인 것 같다.
“덤벼.”
인간의 천적은 인간임을 이 괴물사냥꾼들에게 가르쳐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