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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26화 (127/232)
  • 126화

    [7장-1절] 종이 한 장 차이다

    “찍습니다! 셋, 둘, 하나-”

    찰칵!

    수영복, 운동복 모델로 활동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체형은 운동선수로는 멋이 안 나는 모양이다.

    찰칵! 찰칵! 찰칵...!

    그래서 기념촬영 문의가 많았다.

    “감사합니다! 강문수 씨!”

    “아뇨. 저야말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심야방송으로 보던 분을 직접 만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하하! 저야 적성검사결과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죠. 강문수 씨야말로 정말 대단하십니다!”

    “흠흠.”

    칭찬해줘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유명해질수록 내 스포츠토토 배당금이 낮아질 테니까!

    또 우울해졌다.

    위이잉-

    촬영 동안 무음(無音)으로 설정해둔 스마트폰이 호주머니에서 진동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강문수 씨!)

    “...윤소라 양? 이건 과장님의 전화번호인데...”

    서혜주 과장님의 스마트폰을 어째서 윤소라가 쓰는 걸까?

    (이건 과장님의 8번째 업무용 스마트폰이에요. 제 폰은 장기간 요금 미납으로 정지됐어요.)

    “다시 안 살리나요?”

    나도 돈을 아끼는 편이지만, 스마트폰이 없으면 너무 불편해서 포기할 수 없었다. 잘 찾아보면 행사로 나온 저렴한 월정액도 많고!

    (굳이? 제가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강문수 씨밖에 없어서요.)

    “그렇군요.”

    못 들은 걸로 하겠다.

    (과장님은 일반 환자 수술 중이라서 제가 대신 전달할게요. 라누벨로 짐작되는 환자 중에서 괜찮은 후보를 여럿 뽑아봤어요.)

    “문자로 보내주시면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괜찮은 후보 중 개인정보에 예민한 분들이 많아서요. 직접 병원에 오셔서 고르셔야 해요.)

    “흠. 바로 가겠습니다.”

    (네!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 굳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심심해서 그래요.)

    “...네. 그러면 조금 이따가 병원 입구에서 만나요. 아마... 차로 30분쯤 걸릴 겁니다.”

    “대협. 어서 오세요.”

    탁.

    방송국 입구에 대기 중인 검은색 고급 승용차에서 내린 미모의 여인이 내게 포권을 취했다.

    복장은 내가 <이 천마 실화냐?>의 세계에서 미봉 같은 여협(女俠)들이 흔하게 입었던 새하얀 무복 차림.

    즉, 현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전지은... 영화배우가 된다더니 이런 의미였나...?’

    마오짜이가 자신의 간호사들에게 저지른 만행의 2탄!

    그래도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서 그도 경호원들의 총을 빼앗진 않았다. 허리에 장식으로 검을 착용시키긴 했지만!

    힐끔힐끔.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 속도를 늦추며 전지은의 특이한 복장과 얼굴을 훔쳐봤다.

    선남선녀가 자주 들락거리는 방송국에서도 눈에 띄는 그녀의 미모!

    가문의 얼굴마담다웠다. 현실에서 연기해야 하는 처지가 다소 안쓰럽긴 하지만!

    “이상한 가주를 만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뇨. 소녀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괘념치 마세요.”

    “...네.”

    의미심장한 인사를 마친 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탔다.

    “대협. 어디로 모실까요?”

    “엘몰랑스 병원으로 가주세요.”

    부우웅-!

    내 주문을 듣자마자 그녀의 차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면서 출발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1년도 안 된 사람을 운전기사로 써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살짝 스쳤지만, 신호등이 많은 도시에서는 속도를 낼 수 없기에 큰 사고는 없으리라.

    “......”

    “......”

    운전 중인 전지은에게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휙휙 지나가는 도시의 거리를 멍하니 구경했다.

    이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녀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8번째 정주행 중이에요.”

    “215권짜리를...?”

    “네.”

    “사부를 버린 난봉꾼 주인공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키워주고 무공도 가르쳐준 천마의 은혜를 외면하고 자기 여자들을 챙기기 바빴던 주인공.

    대협? 소인배도 과분하다!

    “천하를 호령하는 사내가 자기만 바라봐주길 바라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현실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니 이 또한 받아들여야죠.”

    “뭐...”

    의견은 존중해주겠다.

    “제작이 확정된 장편영화 <이 천마 실화냐?>의 주연으로 확정됐어요. 조연이 아닌 주연.”

    “아하!”

    전지은이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8번째 정주행 중인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영화배우 입문작부터 주연?

    대박이다.

    ‘그렇다면 저 복장도 이해되네!’

    배우는 ‘만능 적성’이지만, 그런 배우들끼리 모아놓은 세계에서는 후발주자들이 무조건 불리하다.

    연기는 모두가 최고!

    그나마 P의 적성검사기가 배우의 외모를 따지진 않기에 ‘독보적’인 선남선녀는 일찍 주연이 되기도 하지만, 이것도 옛말이 됐다.

    그 ‘일찍 주연’이 된 배우들이 10년 넘게 주연 자리를 꽉 잡고 후배들을 견제하니까. 그나마 가능한 배역이 아역(兒役)인데...

    적성검사를 19살에 받기에 현실성이 없다.

    “마오짜이 씨가 영화를 정말로 만들 생각이군요.”

    “가주님이 스포츠토토로 번 돈을 투자해서 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또 스포츠토토냐?

    “영화가 돈만 쏟아붓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분은 직접 경험하셨으니까요. 현실성은 보장될 겁니다.”

    “그렇겠네요.”

    소설 원작 초창기에 고생을 잔뜩 했던 마오짜이. 그런데도 무협의 세계가 그리운 모양이다.

    “전지은 양은 어떤 배역인가요?”

    “미봉입니다.”

    “쿨럭!”

    하필이면?!

    “천하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강한 사내를 원하고 있죠. 그리고 그 조건에 주인공이 부합해서 사랑했을 뿐, 낭만이 없는 현실주의적인 인물입니다.”

    “벌써 공부하셨네요.”

    “강문수 대협이 직접 만나본 미봉은 어땠나요?”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여인이었죠.”

    현실주의자.

    맞는 말일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미녀가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강해지거나 자신을 지켜줄 듬직한 남자를 만나야 한다.

    하물며 2번째로 예쁘다고?

    길을 지나가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천하제일미도 그랬지.’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스스로 지킬 힘도 제법 있었지만, 남장(男裝)으로 외모를 가린다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천마 실화냐?>가 대충 쓴 무협 소설 같으면서도 작가가 세심하게 짠 설정이 종종 보인다고 할까?

    그래서 미봉이-

    “음?! 잠시만요!”

    “예?”

    “차를 세워주세요! 어서!”

    “아, 네.”

    전지은은 이유를 묻지 않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미안합니다!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탁!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쳐나간 나는 달렸다.

    ‘마녀...!’

    오늘이 마녀, 좀비, 프랑켄슈타인 등으로 분장하는 할로원(Halloween)이 아닌 이상, 길에서 검은색 망토와 고깔모자를 쓴 여자가 흔할 리 없다.

    “실례합니다!”

    “네?”

    망설일 틈이 없었던 나는 길을 가던 남성을 무작정 붙잡았다.

    “마녀 같은 복장을 한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보셨나요?”

    “어?! 당신은 설마... 올림픽 삼관왕으...”

    “죄송합니다! 정말 급해서!”

    “저쪽으로...

    그가 손끝으로 건물 사이의 어두운 골목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탁!

    나를 알아본 행인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기념사진을 찍어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마녀답게 음침한 곳으로 들어갔네!’

    대낮인데도 어두운 골목.

    그 행인이 잘못 봤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확인질문을 할 시간도 아까웠다.

    “......”

    “......”

    좁은 골목 좌우에는 콘크리트 건물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힘없이 앉아있는 부랑자들로 가득했다.

    스윽-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자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관심 없다는 듯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찾았다!’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옆에 세워둔 마녀.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누워있는 한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 어...”

    당사자에게 ‘마녀’라고 불러도 되나?

    “라누벨라 13세.”

    “응?”

    “당신이 마녀라고 부르는 제 이름입니다, 강문수 씨.”

    깊게 눌러 쓴 고깔모자 밑으로 보이는 마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음? 반가움?

    이 골목의 분위기랑 잘 어울리는 섬뜩한 미소였다.

    “...라누벨라 양. 여기는 무슨 일이죠? 그 남자에게 뭔가를 했나요?”

    “대답해줄 의무는 없지만, 애써 찾아오신 분께 오해를 남기면 또 방해하겠죠.”

    “오해? 말장난으로 저를 속여서 꿈의 규칙에 얽매이게 한 것도 오해하고 할 셈입니까?”

    “당신이 제멋대로 해석해서 자빠졌을 뿐, 속인 적은 없어요. 방해받은 건 오히려 저입니다만?”

    “......”

    진심? 기만?

    챙이 넓은 고깔모자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죄인처럼 몰아붙이는 말투가 거슬리는군요. 마녀사냥이라도 할 셈인가요?”

    “그건...”

    “이 나라와 도시는 당신의 영토가 아닙니다. 제가 못 올 곳이 아니죠. 그리고 이 남자, 너무 한심해서 조금 도와줬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모두가 꿈속에서 행복한 건 아닙니다. 가령... 이 남자는 SSS급 초능력이 있음에도 실패했어요.”

    SSS급 초능력?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라누벨라 양. 당신도 저처럼 적성이 무당입니까?”

    “이 복장이 무당으로 보이나요?”

    “......”

    바보가 된 기분이다.

    “강문수 씨. 이번에는 제가 질문해야 공평하겠죠? 당신은 어째서 사람들의 행복을 방해하나요?”

    “방해가 아닙니다. 그들이 외면한 현실로 데려올 뿐입니다.”

    “당신의 이득을 위해?”

    “부수적인 거죠.”

    “단기간에 많이 크셨네요. 올림픽 삼관왕을 부수입 취급하다니.”

    “......”

    나도 너무 뻔뻔했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반박할 수 없었다.

    “남해수 씨.”

    “......”

    “당신의 방해로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그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검귀도 되지 않았겠죠.”

    “검귀의 정체가...”

    “그건 스스로 알아보세요.”

    “킁.”

    “강문수 씨. 아직 제 질문의 답을 듣지 못했는데요?”

    “......”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 못했기에.

    내 목적.

    원치 않게 휘말린 송선영의 꿈을 제외하면 치료비와 능력을 얻기 위해 무당이 되었다.

    환자의 행복?

    단 한 번도 우선하진 않았다.

    “저는 이 한심한 남자를 도와주기 위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왔어요. 그가 행복한 꿈을 꾸다가 죽길 바라면서.”

    “...당신은 무엇을 얻습니까?”

    “자기만족.”

    “......”

    “기적을 일으키는 성녀와 마녀는 종이 한 장 차이. 마녀가 신(神)을 팔면 성녀가 된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금전적인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공짜로 모르는 사람을 돕는다고?’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서툴게 봉사하는 모습을 지겹도록 봐왔다.

    그런데 이 여자는 뭘까?

    아무도 이런 음침한 골목에 들어와서 그녀의 선행을 보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마녀 라누벨라’는 이해할 수 없는 생물.

    이질적이었다.

    “강문수 씨.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짓을 그만두세요.”

    “...송선영, 최강민, 고윤정, 마오짜이, 윤소라.”

    “당신이 깨운 불행한 사람들의 이름이군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들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남해수 씨도 마지막에 회개하며 평온하게 돌아가셨고요.”

    “......”

    “이 남자도 당신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스스로 꿈에서 뛰쳐나왔겠죠. 그랬다면 이런 시궁창에 누워서 죽는 날만 기다리지 않을 테고.”

    “행복한 죽음이에요.”

    “아뇨. 이 세상에 행복한 죽음은 없습니다. 살기 어려워서 죽을 뿐.

    평온한 자연사도 따져보면 늙어서 몸이 힘들어지며 죽는 것이다.

    “이해를 못 하는군요.”

    마녀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속물 주제에.”

    “그건 할 말이 없네요.”

    솔직하게 인정한 나는 유쾌하게 웃으며 마녀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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