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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25화 (126/232)
  • 125화

    올림픽 종목 진행 순서는 주최국에서 정할 수 있지만, 하계 올림픽은 마라톤으로 시작해서 마라톤으로 끝낸다는 전통, 규정이 있다.

    개막식 직후에 육상 100km 마라톤.

    폐막식 직전에 수영 10km 마라톤.

    그래서 하계 올림픽은 바다를 낀 항구도시여야 한다.

    “끼룩~!”

    “끼로~!”

    정겨운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바다 한복판.

    올림픽 마라톤을 위해 공수된 유람선 위에 수영복 차림의 선수들이 바글바글했다.

    시합 규칙?

    저 멀리 보이는, 10km 떨어진 육지의 해수욕장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는 것이다.

    “......”

    “......”

    유람선 위는 그런 규칙이나 경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우울한 장례식장을 연상시킬 만큼 무거운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 이유는,

    (드디어 올림픽 대망의 수영 10km 마라톤까지 왔습니다!)

    (선수들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비장감이 넘칩니다.)

    (소문을 들은 거겠죠.)

    (무슨 소문이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마라톤 세계신기록을 1시간 이상 단축할 선수가 있다는 소문입니다.)

    (1시간?! 그게 가능한 수치인가요?)

    (그 진실은 곧 밝혀질 겁니다.)

    “쩝.”

    해설진들의 수다를 듣는 내 기분은 착잡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올림픽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딱 두 번 헤엄쳤던 수영 10km 마라톤. 그 정보가 외부에 노출된 탓이다.

    ‘전(前) 감독이 원흉이겠지.’

    선수들은 비밀서약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타인의 연습 기록이나 성적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법에서 자유로운 전 감독이 가장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아! 보세요! 강문수 선수가 화면에 잡혔네요!)

    (그는 올림픽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선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올림픽에서 단체전 없이 개인전만으로 삼관왕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니까요.)

    (금메달이 현재 몇 개입니까?)

    (듣고 놀라지 마세요. 태권도 2개, 육상 4개, 수영 2개로 총 8개입니다!)

    (순수하게 금메달 숫자만 따지면 피메달을 노려도 될 수준이네요.)

    피메달.

    최근에 자주 듣는 단어.

    하지만 피메달은 금메달을 종목마다 1개씩만 인정해주기 때문에 잔뜩 따는 건 의미가 없다.

    (핵잠수함. 우리는 이미 그의 별명이 과장이나 허세가 아님을 수차례 보았습니다.)

    (한 번 보시죠. 그가 9번째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을지를요.)

    (경기가 곧 시작합니다.)

    “선수들은 정해진 번호의 보트로 이동해주십시오.”

    유람선에서 조그마한 배로 옮겨 탄 나와 수영선수들은 육지에서 10km 떨어진 거리에 일렬로 대기했다.

    수영 10km 마라톤.

    내가 올림픽에 출전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종목인 만큼 가장 자신 있다. 그만큼 자존심과 애착도 있고.

    ‘전설을 찍어보자.’

    입으로 말하기 낯뜨거운 대사를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읊으며,

    삑-!

    풍덩! 풍덩! 풍덩...!

    출발 신호가 들리자마자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 다이빙했다.

    “푸하!”

    두두두두-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해설진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빠릅니다! 강문수 선수가 선두!)

    (저 속도를 보세요! 체력 분배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무모합니다! 하지만 저 속도를 결승선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1시간 단축이 정말로 벌어질 겁니다!)

    촤아-

    안정된 호흡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체력은 내가 라누벨 환자의 꿈속에서 허무하게 죽지만 않으면 무조건 오르는 기본적인 능력.

    가장 자신 있다.

    (강문수 선수! 단독 선두!)

    (주위에 아무도 없어요! 혼자 헤엄치고 있어요!)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8km째 흔들림이 없습니다!)

    (귀신 잡는 무당이 저래도 되나요?!)

    (저 속도와 체력이면 물귀신도 잡을 것 같습니다!)

    (어머! 잘 보세요! 강문수 선수가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저건 여유네요!)

    “푸하!”

    파도가 거센 해수욕장에 길게 늘어진 새하얀 밧줄이 보였다.

    결승선.

    직접 보는 건 처음이고 설명을 들은 적도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후읍!”

    해변이 가까워지면서 물의 깊이가 헤엄치기 힘든 수준으로 낮아졌다.

    두 발로 물밑을 밟으며 3m쯤 전진.

    톡.

    바닷물에 젖은 새하얀 반줄이 내 가슴에 닿았다.

    (이변은 없었습니다!)

    (강문수 선수의 수영 10km 마라톤 금메달 확정!)

    (1시간 21분 단축입니다!)

    (다른 선수들이 이곳에 당도하려면 아직 1시간이나 남았어요!)

    (핵잠수함! 그에게는 10km가 짧은 모양입니다!)

    촤아-!

    해수욕장의 새하얀 모래를 밟으며 육지로 올라왔다.

    “금메달을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주최국의 올림픽 홍보팀 얼굴마담으로 활동하는 미모의 여배우가 내 목에 금메달을 걸어줬다.

    이번 올림픽의 마지막 금메달.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축하합니다! 강문수 선수!”

    “강문수 선수! 마라톤 우승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적성이 정말로 무당입니까?”

    “삼관왕을 달성하셨는데요. 동계 올림픽도 생각이 있으신가요?”

    “누구에게 수영을 배우셨나요?”

    나는 쇄도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며 걸어갔다.

    “감사합니다. 예상한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성은 무당이 맞습니다. 동계 올림픽은 제 본업의 일정에 따라 결정할 예정입니다. 적성이 수영선수였던 여자친구랑 사귀기 위해 배웠습니다.”

    “강문수 씨.”

    “이쪽입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기자들을 물리며 나를 보호했다.

    ‘편하네.’

    그리고 귀한 사람처럼 대접받는 기분이 만족스러웠다. 이래서 사람들이 권력에 집착하는 걸까?

    감독님이 허탈하게 웃으며 스포츠음료를 건넸다.

    “수고했어.”

    “감독님도 수고하셨어요.”

    “말뿐이라도 고마워! 내가 잘 가르쳐주지 못하는 만큼 말괄량이 딸에게 잔소리해줄게.”

    “엄마...!”

    옆에 얌전히 있다가 공격당한 송선영이 발끈했다.

    “선영아. 문수에게 잘해줘.”

    “잘해주고 있거든요...!”

    “더 잘해줘! 문수랑 있을 때는 야한 옷도 좀 더 입고.”

    “그게 딸에게 할 말이에요?!”

    “후후! 엄마라서 내 딸의 장점을 아주 잘 알지요~”

    “엄마...!”

    음란마귀가 득실거리는 내 마음을 잘 아는 감독님을 조용히 응원했다.

    “끝났네.”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 * *

    귀국한 공항에서 의도적으로 금메달 9개를 목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정말 엄청났지...’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고취감. 스포츠토토 빼고 완벽한 올림픽이었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과장님. 진짜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네요.”

    “너답지 않게 조금 늦었네.”

    “그게... 하하...”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엘몰랑스 병원에 나를 모르는 간호사가 없을 만큼 자주 방문했지만, 불러 세우면서 악수와 사진을 부탁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간호사의 부탁을 들어줬는데, 부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약속에 지각할 만큼!

    “그냥 해본 말이야. 네가 병원에 들어온 사실은 30분 전에 보고받았어.”

    “짓궂으시네요.”

    “앞으로는 이럴 일이 없을 거야. 네 기숙사로 병원 차량을 보낼게. 지하주차장에서 전용 엘리베이터로 곧장 올라오면 돼.”

    “그럴 수가 있어요?”

    일개 과장의 권한을 넘어선 것 같다.

    “앞으로는 돼.”

    “음?”

    앞으로는?

    “공적을 인정받아서 부원장으로 승진할 예정이거든.”

    “오! 축하드려요.”

    내가 마법소년 최강민의 꿈속에서 만났던 ‘미래의 서혜주’의 모습에 한걸음 가까워졌다.

    “축하는 지겹도록 들었지만, 올림픽 삼관왕이 해주니 기분이 또 좋은걸? 매우 영광이야.”

    “영광까지야...”

    “너는 바뀐 게 없네. 조금은 거만해질 줄 알았는데.”

    “꿈이긴 하지만, 제국의 이인자도 경험한 몸입니다. 이 정도로 오만해지기에는 눈이 너무 높네요.”

    “장점 같으면서도 단점이구나?”

    “그런 셈이죠.”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대제국의 개국공신이었던 ‘아몰랑 백작’의 위상은 정말 대단했다.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있는 존재는 소맥 황제와 발렌타인뿐!

    운동을 조금 잘하는 일개 서민인 현실의 ‘나’랑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찰칵.

    그때, 과장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나랑 비슷한 또래의 간호사 소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강문수 씨!”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인사했다.

    “어? 어라?”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윤소라 양이야.”

    서혜주 과장님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줬다.

    “과장님. 환자인 그녀가 어째서 간호사 복장을...?”

    “조수로 쓰기 딱 좋더라고.”

    “뭐가 좋은데요?”

    “한창 연구 중인 라누벨 환자를 곁에 둘 수 있으니까. 적성도 의사라서 말귀를 잘 알아듣고, 갈 곳도 없어서 내 사무실에 상주시킬 수 있어. 같은 여자라서 편한 점도 많고. 이 정도면 완벽한 조수의 조건이 아니니?”

    “허...”

    듣고 보니 그랬다.

    “너에게 관심이 많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정말 큰 단점이네요!”

    우리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들은 윤소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할게요. 서혜주 부원장님의 조수로 일하게 된 윤소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벌써 이렇게 움직여도 되나요?”

    “절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환자니까요.”

    그녀의 대화에 말려들면 안 된다.

    “윤소라 양은 내 조수이기 때문에 앞으로 네 일정을 관리하는 비서도 겸하게 될 거야.”

    “비서...?”

    “대기업 회장님이나 정치인만 비서가 필요한 건 아니란다. 그리고 너는 자각할 필요가 있어. 올림픽 전이랑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이미 느끼고 있는데요?”

    “그러면 덜 느꼈어.”

    “아, 네.”

    윤소라의 부모는 게임중독 말기 판정을 받고 치료 중. 게임은커녕 인터넷도 안 되는 섬의 격리시설에서 3년 동안 생활하게 됐다고...

    월세가 밀린 집도 비우게 돼서, 그녀는 서혜주 과장님의 사무실에 얹혀살기로 했다.

    “월급은 주나요?”

    “당연하지. 네가 현실이 불행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며?”

    “그건... 네.”

    살짝 와전된 것 같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윤소라 양.”

    “네.”

    “제가 해드린 게 없어서 조금 민망하긴 한데, 돌아온 현실은 어떤가요?”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너무 만족스러워서 꿈인지 의심될 만큼!”

    “그런가요.”

    “정말이에요. 포기했던 적성을 살릴 수 있었고, 꿈속에 없었던 수세식 변기도 있으니까요.”

    “수세식 변기... 공감합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

    사극 <궁녀 덕춘이>

    수세식 변기가 없었던 암흑기에는 요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세계에서 로맨스?

    작품에서는 불편한 생리현상이 언급되지 않아서 모를 뿐, 현대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데이트하는 쪽이 훨씬 낭만적일 것 같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좋을지 모를 만큼.”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서혜주 과장님이 다 하셨죠.”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전지은 양이 수고했다.

    “물론, 부원장님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강문수 씨가 아니었다면 부원장님이 저를 조수로 써주실 리 없잖아요?”

    “흠.”

    그것도 맞는 말이다.

    “강문수 씨.”

    “네.”

    “여자친구에게 차이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위로해드릴게요.”

    “하, 하...”

    대답하기 난처해진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이 아닐까?

    스포츠토토 빼고 완벽한 올림픽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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