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올림픽 종목들이 진행되는 동안, 선배가 밀어둔 문제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올림픽 금메달.
연금이 전성기가 짧은 운동선수들의 노후를 보장해주는 장치라면, 스포츠토토 같은 부수입은 남해수처럼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이다.
광고도 마찬가지.
“형~!”
“강훈이냐.”
나를 보자마자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돌진해오는 후배 최강훈.
하계 올림픽이란 말이 무색하게 가을로 접어들었고, P의 적성검사결과를 받는 운명의 시간이 또 찾아왔다.
‘이 녀석은 뭐가 나올려나?’
진심으로 궁금하다.
“금메달 축하해!”
저 말을 직접 하고 싶어서 비행기까지 타고 해외로 날아온 후배.
“고맙다.”
이에 나도 숨길 수 없는 미소로 따뜻하게 맞이해줬다.
다만,
“내가 형을 응원하기 위해 스포츠토토도 잔뜩 찍었어!”
“너마저...”
돈에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최강훈의 반전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형, 광고 계약했어?”
“아직.”
태권도는 원래 강세였던 나라여서 제안이 적었지만, 금메달을 딴 역사가 없는 육상은 ‘애국지사’란 표현이 나올 정도로 매우 뜨거웠다.
음료 광고, 운동복 모델 제안, 라디오 출연, 스트리머 초청, 국가 홍보...
현재는 수영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를 붙여서 전부 미뤄뒀다.
“무당 일로 바쁜데, 이것까지 신경 쓰기 귀찮지? 하지만 돈은 벌어야겠고.”
“뭐... 그렇긴 해.”
“웃차! 마오짜이 씨가 괜찮은 방을 예약했네.”
푹신한 소파를 향해 폴짝 뛰어오르며 아이처럼 앉은 최강훈.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육상경기장까지 거리가 좀 된다는 걸 제외하면 좋은 편이지.”
호화로움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 본 황궁의 어느 침실이 최고였지만, 옥상 정원과 야외수영장이 딸린 이 호텔 객실도 만만치 않은 수준!
‘너무 신경 써주는데?’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꿈속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마오짜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건 내 예상 범주를 넘어선 호의.
이 세상에 순수한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거절 못 하는 내가 참 한심하다.
“형. 운동선수는 부업이야?”
“당연하지.”
나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선수들이 들으면 피를 토하는 심정이겠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없다.
적성이 다른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환자의 꿈’에서 얻은 비상식적인 성장 덕분이니까. 무당이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당이 아닌 일로 신경 쓰기 귀찮겠네?”
“맞아.”
“하지만 돈은 벌고 싶고.”
“그것도 맞아.”
오늘의 최강훈은 평소보다 매우 똑똑한 것 같았다.
“형. 나에게 맡겨 볼래?”
“너에게?”
“촬영 날짜에 갑자기 꿈속으로 들어가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잖아.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직접 회사를 차려야 하는데... 형이 경영까지 할 여유는 없을 것 같아서.”
“정확해.”
아직 적성검사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최강훈에게는 사업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것도 세계적인 대기업 총수의 우월한 유전자가!
그렇기 때문일까?
내 처지를 진지하게 얘기해준 적이 없는데, 녀석은 나의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해. 형의 사정이나 일정표에 100% 맞춰줄 관리팀을 짜는 거야.”
“그게 가능해?”
내가 올림픽에서 활약한 국가대표이긴 하지만, 그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니다.
“세계적인 기업과 가문이 힘을 합치면 가능해.”
“가문이라면... 마오짜이 가주님?”
“응!”
“......”
의도를 모르겠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형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거야.”
“흠...”
“하나만 물어볼게. 형은 올림픽에 또 출전할 마음이 없어?”
“놀면 뭐해? 또 출전해야지.”
최강훈의 질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 대비해야 해.”
“훈련?”
“스포츠토토.”
“...그건 이미 망했어. 이번 같은 배당금은 또 없을 거야.”
“반대를 생각해야지. 금메달이 확실한 형이 외압으로 탈락하는 변수를.”
“......”
외압(外押).
제삼자의 간섭.
내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없도록 방해하는 기득권의 존재.
‘남해수가 그랬지.’
스포츠토토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남해수가 비행기를 납치하는 극단적인 수단을 쓰는 바람에 나는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현실이라고 다를까?
똑같다.
“가장 귀여운 방법이 음식에 설사약을 넣는 거야.”
“정말... 귀엽네.”
설사 때문에 금메달을 놓친다면 화병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여기서 조금 더 악의가 담기면 설사약 대신 올림픽에서 금지한 약물을 넣고 공론화. 그러면 4년 동안 올림픽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아.”
“허...”
4년이면 전성기가 짧은 운동선수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아! 우발적인 교통사고도 흔한 수법 중 하나야!”
“기가 막히네.”
나는 스포츠토토로 금전적인 이득을 전혀 보지 못했으니까. 위험부담만 잔뜩 떠안았다.
“형은 역시 대단해!”
“갑자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겨우 1년밖에 안 지났잖아.”
“너도 적성검사를 받으면... 아! 적성검사결과가 나왔겠네.”
“응!”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아직 실감이 안 되지만, 내가 무당이 된 날부터 어느새 1년이 훌쩍 흘렀다.
‘꼭 그렇지도 않나?’
다른 환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현실보다 느리게 흘렀으니까. 다 합치면 체감 시간이 3년도 넘을 것이다.
아무튼,
“적성이 뭐야?”
“궁금해?”
“당연하지.”
내 질문을 받은 최강훈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간웅(奸雄).”
“...그게 적성?”
“응!”
“뭐... 무당도 있으니 영웅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순진한 녀석이 ‘간사한 영웅’이라니?
P의 적성검사기가 아픈 것 같다.
* * *
내가 엘몰랑스 병원에서 정식으로 치료한 환자들은 모두 대단했다.
수영황제 남해수.
대기업 총수의 장남 최강민.
대가문의 가주 마오짜이.
이중에 남해수는 살리지 못했지만, 원하는 유언을 남겼기에 그도 실패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놀랍네.’
서혜주 과장님이 환자를 엄선해서 치료하라고 조언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차별?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뿐! 이건 차별이 아니라 현명한 선택이다.
(보세요! 강문수 선수가 수영장에 입장하고 있습니다!)
(귀신 잡는 무당! 하지만 오늘은 금메달을 잡으러 왔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체력이에요! 얼마 전에 육상 100km 마라톤을 뛴 선수라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금메달! 세계신기록도 20분이나 단축했죠?)
(핵잠수함이란 별명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군요!)
근거 없는 약물 의혹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개인사업자들뿐. 큰 단체에 속한 언론사와 해설진들은 나를 악의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것이 권력의 힘!
세계적인 기업과 가문이 내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덕분이다.
(강문수 선수는 약 2시간 전에 자유형 4000m에서도 세계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무려 8초 단축!)
(8초... 혼자만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기록이네요.)
(이게 끝이 아닙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이어서 2000m에 도전하는 중이니까요! 어디서 저런 체력이 나오는 걸까요?)
(지치지 않는 귀신을 잡으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호호! 맞는 말이네요!)
스마트폰으로 듣는 올림픽 해설진들의 생중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남의 일처럼 여유롭게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분들이 주위에 잔뜩 있었으니!
“괴물...”
“사람인가?”
“어떻게...”
인체의 신비마저 초월한 나의 체력에 질려버린 선수들.
간신히 한 종목만 참가하는 그들에게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문제일 것이다.
삐--
“준비!”
수영장에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
목에 건 수건과 겉옷을 벗고 출발선 위에 섰다.
‘2000m. 잘할 수 있을까?’
탕-!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풍덩! 풍덩! 풍덩...!
출발선에 선 모든 선수가 일제히 수영장으로 다이빙.
동시에 헤엄치기 때문에 그들이랑 경쟁하는 모양새지만, 본질은 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습할 때랑 똑같은 최고의 기록을 내는 것이다.
‘옛날 생각 나네.’
내가 수영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송선영에게 수영을 배우던 당시의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자신 있으니까!’
탁!
결승선에 손끝이 닿았다.
“푸하!”
(그가 또 해냈습니다! 수영 2000m마저 세계신기록 달성! 무려 0.8초나 단축했습니다!)
(오늘은 무당이 귀신 대신 사람을 잡네요! 토토를 즐기시는 많은 분이 피눈물을 흘리실 것 같습니다!)
(그거, 제 얘기인가요?)
(하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농담 섞인 해설진들의 흥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대기실로 향했다.
“수고했어.”
송선영이 나에게 마른 수건을 건네며 축하해줬다.
“솔직히 아슬아슬했어.”
“1.3초 차이인데?”
“내가 환자를 무시하고 올림픽에 출전했으면 절대로 1등 못 했어. 전광판을 봐. 2등이랑 0.2초 차이야.”
“그렇네.”
내가 없었다면 세계신기록의 영광과 금메달은 2등의 몫이었으리라.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수영을 연습하진 않았지만, 검귀들이랑 싸우면서 미미한 성장을 이뤄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잘해도 은메달?
진짜 위험했다.
“삼관왕 축하해.”
전지은이 상큼하게 웃으며 낯뜨거운 단어를 언급했다.
삼관왕(三冠王).
육상, 태권도, 수영. 올림픽 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틀린 표현은 아니리라.
“고마워.”
“이젠 올림픽 폐막식 전에 열리는 수영 10km 마라톤만 남았네.”
“그거야 뭐...”
눈 감고 헤엄쳐도 금메달을 딸 자신 있다.
“오후에 시간 있어?”
“그렇긴 한데...”
매력적인 젊은 여성을 만날 때는 송선영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봐도 돼.”
“어? 정말?”
나 때문에 의심병이 생긴 여자친구가 무척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과 어조로 승낙해줬다.
“일이잖아.”
“그렇지!”
재산이 201배로 늘어난 만큼 송선영의 아량도 넓어진 것 같다.
* * *
수영 자유형 2000m, 4000m 금메달 소감을 적당히 남긴 후, 주목을 피해서 호텔로 돌아온 내 앞에 1살 연상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무슨 일일까?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 오래 있어서 현실 문제에 둔해진 나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먼저 사과부터 할게.”
“음?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잘못이라도?”
“난처하게 했던 일들.”
“......”
엄연히 여자친구가 있는 나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한 그녀 때문에 난처하긴 했었다.
“할아버지는 7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가문의 비전과 전통이 자신의 시대에서 끊기는 걸 두려워하셨어. 조상님들의 노여움을 산다면서.”
“흠...”
“나도 가문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담했지만, 가문의 서열을 무시하고 모든 걸 계승할 수 있는 ‘진짜 무당’이 내 남편이면 괜찮겠다는 계산도 깔린 결정이었어.”
“그랬구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놀랍진 않고 그저 갑작스러웠다.
‘갑자기 왜?’
계속 거리를 벌려도 안 물러서던 그녀에게 심경변화가 찾아온 이유나 원인을 모르겠다.
“내 적성은 영화배우야.”
“연기를 잘하겠네.”
“맞아.”
배우(俳優).
냉정하게 사람의 운명을 단정하는 P의 적성검사결과 중에서 상위권에 당당히 있는 좋은 적성.
타인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적성’도 그럴싸하게 연기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배우는 ‘만능 적성’으로 통한다.
“너랑 10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처럼 살갑게 연기할 수 있어. 은밀한 사랑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미안한데, 나에게 하려는 말이 뭔지 모르겠어.”
“송선영.”
“걔가 왜?”
“세상에 남자가 너 하나뿐인 것처럼 집착하더라고.”
“......”
그건 제대로 보셨습니다!
“내 연기로는 그 애의 진심을 이길 자신이 없어. 너도 그걸 알기에 좋아하는 것 같고.”
“맞아.”
하지만 여전히 갑작스럽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최강훈 대표의 제안을 받았어.”
“강훈이가?”
“맞지 않는 무당을 그만두고 영화배우가 되어볼 생각이 없냐고.”
“아...”
최강훈의 적성 ‘간웅’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일해서 즐겁고 고마웠어.”
슥-
전지은이 악수를 청하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진심?”
매우 좋은 적성으로 평가받는 배우의 치명적인 단점.
일상의 모든 행동까지 연기로 의심받으며 평생 살아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즐겁진 않았어. 남의 남자를 빼앗으려는 나쁜 여자 취급을 받았으니까.”
“아하!”
이건 진심인 것 같다.
“강문수 씨. 세계적인 무당이 되기를 멀리서나마 응원할게요.”
“어... 감사합니다.”
이게 배우의 재능이란 걸까?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 사무적으로 바뀌면서 관계가 원점으로, 처음 만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무안하게 안 잡아주실 건가요?”
“...이거 실례. 전지은 양도 영화배우로 성공하길 빌겠습니다.”
덥석.
우리는 손을 맞잡으며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