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23화 (124/232)
  • 123화

    호텔 객실에 처음 들어가본 나는 소파 위에 무성의하게 던져져 있는 금메달 3개를 볼 수 있었다.

    ‘뭐... 당연한가.’

    선배는 대신 뛰어줬을 뿐이니까. 본인의 명예나 연금도 아닌 메달에 애착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아저씨가 네 몸으로 술을 마시려고 했다니까!”

    자연스럽게 따라온 송선영이 선배의 엽기적인 행각을 실토했다.

    “국가대표가 술을...?”

    “당연히 못 마셨지. 마셨으면 금메달은커녕 출전도 못 하고 실격 처리됐을걸? 내가 막았어.”

    “고마워.”

    “흥! 알면 앞으로 잘해. 그 수상한 언니에게 휘둘리지 말고.”

    “전지은 씨?”

    “어!”

    소파에 버려진 금메달 3개를 탁자 위로 치우고 드러누운 송선영. 매우 편해 보였다.

    “...선영아.”

    “왜?”

    “일은 어떻게 했어? 장기휴가?”

    “내가 전속계약을 한 회사가 마오짜이 씨에게 인수됐어.”

    “하아?”

    이건 무슨 소리야?

    “그래서 회사의 인수인계와 구조조정을 겸해서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일이 없어.”

    “대체 무슨 생각이람.”

    부자들의 사고방식을 모르겠다. 마오짜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선배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어제 우연히 들었는데,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를 자신의 경험으로 각색한 장편영화를 만들 계획이란 모양이야.”

    “그럴 돈이 있어?”

    현대가 아닌 시대극은 복장부터 배경까지 싹 준비해야 해서 돈이 곱절로 들어가니까. 가문을 뿌리째 뽑을 게 아니라면 변덕이나 취미로 할 사업은 절대 아닐 텐데...

    “이번에 누구 덕분에 용돈치고는 많이 벌었다던데?”

    “......”

    누구를 위한 올림픽이었는지 점점 더 헷갈렸다.

    “태권도는 네가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배당이 7배 정도?”

    “낮진 않네.”

    올림픽 육상 3000m 종목의 내 배당금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94배가 말이 되는 숫자인가?

    “수영의 네 배당금을 들으면 깜짝 놀랄걸.”

    “얼마인데?”

    “네가 출전한 종목 중에서 가장 거리가 짧은 자유형 2000m는 201배.”

    “......”

    “수영은 기술이 필요하니까. 적성이 안 맞으면 어렵다고 사람들이 판단한 거지. 엄마도 자유형 2000m는 불안하다며 안 걸었어.”

    “으으...”

    너무나 큰돈이 눈앞에서 떠나가는 바람에 현기증이 났다.

    스포츠토토는?

    올림픽 개막식 직전까지만 배당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제 기회가 영영 없는 셈.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어렵겠지...’

    2년 뒤에 또 참가했을 때는 내 실력이 알려진 상태니까. 지금처럼 높은 배당금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즉, 우울하다.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아.”

    “안 돼! 자유형 2000m에 나의 전 재산을 걸었단 말이야!”

    “...정말로?”

    “정말로!”

    “안전한 종목 놔두고 대체 왜...?”

    수영 장거리 종목은 눈 감고 헤엄쳐도 1등을 할 자신 있다. 송선영도 그 사실을 잘 알 텐데?

    그녀는 짧게 답했다.

    “마네킹 따위에게 지기 싫으니까.”

    마네킹.

    송선영의 관점에서는 우리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무생물.

    사회생활을 해야 하기에 평소에는 티를 덜 내지만, 내가 한눈팔면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즉, 모두가 마네킹이긴 하지만, 그녀가 지금 지칭하는 대상은?

    ‘전지은이겠지.’

    그 집안이 무슨 목적으로 내게 접근했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이성으로는 전혀 끌리지 않았다. 나는 종마(種馬)가 아니니까.

    아무튼,

    “너무 무모해. 내가 안 깨어났으면 싹 잃었을 텐데...”

    “믿으니까.”

    “......”

    “그리고 나는 달라. 그 여자는 못 해도 나는 할 수 있어. 내 마음에 계산 따위 하지 않으니까.”

    “어... 음... 감사합니다.”

    소파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아 앉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내 심장에 부담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근두근!

    짧은 핫팬츠로 우월한 유전자를 한껏 강조한 그녀의 새하얀 다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정말로 음란마귀가 꼈나...?’

    선배의 핀잔이 떠오르며 살짝 자괴감마저 들었다.

    “문수야.”

    “...어?! 어, 응. 왜?”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두고 싶은데. 2000m는 어때?”

    “흠... 저번에 잃은 능력이 복구됐다면 0.8초 차이로 금메달, 아직 안 됐다면 꼴찌려나.”

    “극단적이네.”

    “어쩔 수 없지.”

    자유형 4000m와 마라톤 10km는 내 전공이기에 문제없다. 하지만 2000m는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 끌려가서 어이없게 한 번 죽은 뒤부터 불안해진 게 사실.

    그 뒤에 두 차례나 성장할 기회가 있었지만, 꿈속에서 수영을 따로 연습하거나 이용하진 않았다.

    “자신 있어?”

    “현재로선 해봐야 알겠네.”

    “그렇다고 부담 갖진 마. 잃으면 또 벌면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로 자살하진 않아.”

    “저기요?!”

    더 부담되는걸!

    기분 전환을 위해 호텔 객실의 화려한 6인용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삑!

    (하계 올림픽을 관전하는 시청자분들의 열기가 날씨보다 뜨겁습니다!)

    (신기하네요. 2년마다 열리는 하계 올림픽인데, 올해의 관심이 더 각별한 이유가 뭘까요?)

    이 시기에는 어떤 채널을 틀어도 세계적인 행사를 이야기한다.

    올림픽.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정치적인 도구란 주장이 더러 있지만, 그런 식이라면 국민의 약 15%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는 정치의 온상이리라.

    (올해 스포츠토토 배당금이 50년 만에 최대치를 찍었습니다!)

    (아직 몰라요. 화재의 선수가 수영 종목 자유형 2000m에서 금메달을 따면 기록이 더 상승하니까요!)

    “......”

    여기서 내가 나온다고?

    채널을 돌리기 위해 리모컨으로 손을 옮겼다.

    “조금만 더 보자.”

    “...그래.”

    송선영의 만류로 조금만 더 시청하기로 했다.

    (섣부른 결론을 좋지 않지만, 배당금이 어떻길래 그렇습니까?)

    (201배!)

    (예? 65배가 아니라요?)

    (네! 201배입니다!)

    (세상에! 201배요? 어떻게 이런 배당금이 나올 수 있죠? 성적이 저조하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조차 100배를 넘기기 힘든데...)

    (적성이 함정입니다. 무당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적성검사가 잘못된 걸까요?)

    (그건 P만이 알 겁니다. 우리는 P의 정체도 아직 모르지만...)

    삑-

    바로 껐다.

    “크흠! 뉴스도 재미없네!”

    내가 스포츠토토를 찍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시청해줬겠지만, 지금은 놀리는 것처럼 들릴 뿐!

    매우 우울하다.

    “잘해봐. 이번에 돈을 따면 앞으로 데이트 밥값은 내가 계산할게.”

    “...어? 진짜?”

    “내가 거짓말한 적 있어?”

    “있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언제?”

    “병원에서 같이 눈을 뜨고 옥상에서 내가 너에게 물었잖아. 아직도 사람들이 마네킹으로 보이느냐고.”

    “아아, 그때.”

    “이젠 아니라고 했지. 그러면서 나에게 남자로 안 보인다고 덧붙였잖아. 내 말이 틀려?”

    완벽한 논리!

    송선영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바보네.”

    “어느 부분이?”

    “나에게 다시 남자로 보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였어.”

    “...그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데?”

    “네가 둔한 거야.”

    “억지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리 없잖아?”

    “큭!”

    완벽한 줄 알았던 내 논리는 송선영의 결과론적인 반론에 무너졌다. 우리의 관계가 그때 끝났다면 지금처럼 대화도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너는 노력은커녕 말도 없이 이사나 가버리고.”

    “끙...”

    졸렬했던 내 과거를 그녀가 몽땅 끄집어내기 전에 항복할까?

    그때,

    띠로리~♪

    신(神)의 계시 혹은 구원처럼 내 스마트폰이 울었다.

    “전화 왔어.”

    “이 멜로디는 과장님인데...”

    “일부러 비극적인 분위기의 멜로디로 고른 거야?”

    “예전에 환자의 꿈속에서 안 좋은 경험을 했을 때, 나에게 권유한 과장님을 원망했었거든.”

    “지금은?”

    “고마운 어른이지.”

    하지만 이 멜로디는 절대 바꾸지 않는다!

    삑-

    “여보세요.”

    (축하해. 금메달 3개. 나도 지금까지 줄줄 새기만 하던 투자금 이상으로 회수해서 기분이 좋네.)

    “과장님도 토토하셨나요?”

    (당연하지. 나는 땅 파서 환자를 돌보는 자원봉사자인 줄 아니? 연구비는 넉넉하게 나오는 편이지만.)

    “환자는요?”

    (윤소라 양이라면 안정됐어. 너의 올림픽 육상경기 재방송을 시청할 정도로 좋아졌지.)

    “다행이군요.”

    “이상하네. 방금 깨어난 환자가 네 경기에 왜 관심을 가질까?”

    “...그러게. 참 이상하네.”

    송선영의 예리한 지적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아! 환자랑 통화해볼래?)

    “...네.”

    마오짜이 2탄은 사양이다!

    ‘그때는 너무 기습적이라서 막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떳떳하다.

    (여보세요. 윤소라입니다.)

    “안녕하세요. 무당 강문수입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꿈속에서 한 약속처럼 금전적인 문제는 없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절 책임지고 맡아주신다는...?)

    책임!

    굉장히 위험한 단어다.

    “저는 윤소라 양의 부모가 아니기에 책임은 못 집니다. 하지만 꿈보다 현실이 끔찍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직접 뵐 수 있을까요?)

    “그건...”

    굳이 만날 필요가 있나?

    옆에서 통화를 가만히 듣는 송선영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때,

    (환자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 그리고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서혜주 과장님이 통화를 다시 받았다.

    “...알겠습니다.”

    (법적인 문제는 전지은 양이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해.)

    “네.”

    (생명공학전공인 내가 어째서 여성들의 연애심리상담까지 맡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적성검사결과에서 ‘무당’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평범했다. 내 주위에는 최강훈 같은 동성의 남자로 가득했고, 여자랑 대화할 기회는 편의점 손님과 학교 선생님 정도뿐.

    (옆에 선영이도 있니?)

    “네.”

    그러니 오해가 없도록 단어 선택에 주의해주세요!

    (감성적인 젊은 여성 환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는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흑기사야.)

    “벌써 오글거리는데요?!”

    내 옆의 공주님은 탑에서 밥 먹듯 뛰어내리며 자살했다.

    (앞으로 네가 꿈속에서 젊은 여성 환자를 설득할 때는 단어 선택에 주의해줘. 안 그러면 코 꿰인다.)

    “어렵네요.”

    (남녀의 관계는 원래 어려워. 선영이에게도 안부 전해줘.)

    “네.”

    (나중에 보자.)

    뚝.

    할 말을 끝낸 서혜주 과장님이 통화를 종료했다.

    “흑기사? 낭만적이네.”

    송선영이 내 어깨에 자신의 턱을 얹으며 바로 딴죽을 걸었다.

    두근두근!

    내 귀를 자극하는 그녀의 숨소리와 머리카락이 피를 쏠리게 했다.

    ‘이건 무슨...?’

    뱀 앞에 개구리처럼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어흠! 너무 오글거리지 않아?”

    “별로.”

    “그, 그래?”

    우리의 감성은 전혀 다르구나!

    “예쁜 여자애에게 잘해주는 흑기사와 백마 탄 왕자는 찾아보면 많아.”

    “뭐...”

    그건 남자의 본능이므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하지만 나에게 이 세상에 남자는 너뿐이야. 명심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아닌 그녀가!

    “좋아.”

    쪽!

    유일한 남자의 대답에 만족한 그녀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어...?”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날아오는 저격수의 총알도 피할 수 있는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열심히 해.”

    “...그래.”

    지금이라면 헤엄쳐서 태평양도 횡단할 수 있을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