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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22화 (123/232)
  • 122화

    [6장-7절] 무당이 간다!

    언제나 건물 천장을 보며 눈을 떴던 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강문수 선수. 육상 100km 마라톤에 이어서 태권도 남성 20대, 전체연령 금메달까지 따신 뒤부터 약물 의혹을 받고 계신데요.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게 질문입니까?”

    “예? 아, 네.”

    서혜주 과장님 대신 기자로 짐작되는 젊은 여성이 눈앞에 있었다.

    ‘선배가 고생했네!’

    집중된 수많은 카메라와 시선. 하지만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대제국의 이인자였던 몸! 이 정도로 움츠러들기에는 지나온 경험이 험난했다.

    “그 약물들의 원리부터 공부한 후에 다시 오면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절 바보 취급하는 건가요?”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

    약물이란?

    선수의 통각이나 피로감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마비시켜서 기량을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당연히 몸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부작용, 후유증을 유발한다. 나처럼 며칠에 걸쳐서 여러 종목을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역으로 독!

    즉, 약물은 단점이 없는 종합비타민이 아니다.

    “강문수 선수. 이건 생방송..”

    “네. 더 귀찮게 하시면 경기 방해로 고소하겠습니다.”

    “...실례했어요.”

    나를 찌릿 노려본 기자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며 떠났다.

    “돌아왔네.”

    바로 뒤편에서 관망하고 있던 송선영이 바로 눈치챘다.

    “어... 안녕?”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는 모든 여성이 긴 치마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어서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그러나 송선영은?

    ‘영혼이 치유되는 기분인걸!’

    꿈속에서 내가 아무리 잘나가도 현실이 역시 좋다.

    “다행이야. 그 아저씨가 네 몸에서 영영 안 빠져나가는 줄 알았어.”

    “어... 미안하게 했네.”

    걱정 끼쳤다는 자각은 있었다.

    ‘나도 몰랐는걸.’

    꿈속에서 계약한 혈신이 현실의 내 육체를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미리 알았다면 그녀에게 귀띔해뒀을 터.

    송선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알면 됐어. 얼른 가. 저쪽으로 나가면 돼.”

    “응.”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내가 없는 현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일단은 눈앞의 육상경기부터 끝내야 했다.

    “자신 있어?”

    “당연하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환자의 꿈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무사히 빠져나온 나는 또 성장했음을!

    “여자를 또 사귄 건 아니란 거지?”

    “당연히 아니지!”

    “그러면 됐어.”

    “다녀오겠습니다!”

    환자가 마지막에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무죄!

    “강문수 씨. 조금 전에 기자랑 다투신 것 같은데, 나중에 본인이 오면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경기장 출입구 앞에 있던 전지은이 내게 따졌다.

    “그 본인이야.”

    “...문수?”

    “맞아. 나야. 안녕?”

    “또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이래선 도저히...”

    “음?”

    내가 무슨 실수한 걸까? 그녀는 굉장히 자존심 상했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다녀와.”

    “그래.”

    시간이 없었기에 의문은 뒤로 하고 경기장으로 나갔다.

    “......”

    “......”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선수들의 시선에 미소로 회답했다.

    “안녕하세요.”

    적성 ‘육상선수’들끼리 겨루는 신성한 육상경기에 이물질이 끼어들어서 매우 불쾌하다는 얼굴들.

    그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내 다리를 보며 조소를 보냈다.

    ‘억울하네!’

    내 다리의 길이는 이상적인 신체 비율이라고 자부하는데!

    육상.

    기술과 경험보다 육체 능력이 크게 좌우하는 올림픽 종목.

    구시대에는 수영황제 남해수처럼 독주했던 ‘육상황제’가 있었다는 것 같지만, 현재는 선수의 전성기가 수영보다 짧기로 악명 높다.

    (8조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9조는 출발선으로 이동해주십시오.)

    “준비...!”

    출발선으로 이동한 나는 준비된 발판에 두 발을 올리고 엎드려서 크라우칭 발주법으로 대기했다.

    ‘강문수. 한 번에 끝내자.’

    육상, 수영, 역도, 사격, 양궁처럼 ‘기록’으로 겨루는 종목은 반나절도 안 걸려서 끝난다.

    기회는 최대 3번!

    하지만 선택을 잘해야 한다. 재도전을 신청할 경우, 앞서 세운 기록은 무효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탕-!

    출발 신호가 들리자마자 웅크리고 있던 온몸을 쫙 펴며 질주했다.

    ‘빨리...!’

    내가 신청한 육상 종목은 100km 마라톤, 30km, 10km, 3000m. 거리가 짧은 편에 속하는 1000m, 300m 빼고 절반 이상 참가하는 셈.

    그만큼 체력에 자신 있기 때문이다.

    휙!

    “헙-?!”

    나에게 추월당한 육상선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조절하던 완급을 무시하고 속도를 끌어올려서 나를 다시 따라잡으려고 애썼지만, 우리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휙! 휙! 휙!

    “뭣...?”

    “크읍?!”

    수영도 똑같지만, 육상 종목은 비슷한 기량의 ‘인간 치타’끼리 1초 미만의 승부를 가리는 경기.

    엇비슷한 속도로 달리다가 무더기로 내게 추월당한 그들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지나갑니다!’

    3000m의 절반쯤 달렸을 때 선수 전원을 추월했으니, 내가 마지막으로 측정한 기록보다 확실히 상승했다.

    그러나 미미한 수준!

    내가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뛰어다닌 시간을 고려하면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달리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걸까? 혹은 성장한계선?’

    올림픽이 끝난 후에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팔랑~

    변수 없이 1등으로 결승선 통과!

    인기 종목이 아닌 까닭에 관중석의 환호와 박수는 적었지만, 그건 현장만 그럴 뿐이다.

    (시청자 여러분! 저 선수의 기록을 보셨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무려 4초 단축! 마라톤에 이어서 육상 3000m도 세계신기록!)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적성이 다른 선수가 이런 대기록을 달성하리라고 말입니다!)

    (저처럼 스포츠토토를 하시는 분들은 피눈물을 흘리실 것 같군요. 중개할 기분이 안 납니다.)

    (한 번 볼까요? 헉! 강문수 선수의 배당금은 94배! 실화입니까?!)

    (실화입니다. 적성이 다른 그를 예능 취급하며 무시한 결과인데요. 그걸 고려하면 배당금이 낮은 편입니다.)

    (아! 큰손들이 이 선수를 뽑았다는 소문이 떠돌긴 했지요.)

    (그랬지요. 그게 헛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시합이 끝나자마자 육상경기장 안까지 생중계가 들렸다.

    해설진들의 흥분한 목소리.

    올림픽 육상 규정상 2회의 재도전할 기회가 남아있고, 아직 기록을 측정하지 않은 대기자들도 있기에 시상식은 멀었다. 그러나 0.4초도 아니고 4초를 단축할 수 있을까?

    나는 금메달 확정이란 기분을 만끽하며 대기실로 향했다.

    “수고했어.”

    전지은이 내게 수건을 건네다가 멈칫했다.

    “언니. 문수는 이 정도로 땀을 안 흘리거든요?”

    송선영이 유치한 도발을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던 당신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가만히? 열심히 응원했는데요?”

    “그건 기본입니다.”

    찌릿찌릿!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송선영과 전지은.

    그동안 선배가 나 대신 둘 사이에 껴서 힘들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언니. 선을 넘지 마세요. 저는 문수의 여자친구거든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제가 당신의 연애를 방해라도 했나요? 아니면 문수랑 연애했나요?”

    “네! 아까부터 계속!”

    “어머! 송선영 양. 피해의식이 좀 심하네요. 감독이 따로 없는 그에게 수건을 건넸을 뿐입니다.”

    “감독이 없다고요? 방금, 제 엄마를 무시한 거예요?”

    “트집 잡지 마세요. 당신의 어머님은 수영 감독이시잖아요.”

    “그래도 저기에 계시거든요? 엄마! 엄마도- 토토는 그만 좀 봐!”

    장서연 감독님은 스마트폰으로 스포츠토토를 보고 계신 듯했다.

    “94배... 94배...”

    살짝 실성한 듯이 히쭉히쭉 웃는 모습이 섬뜩했다.

    경기는...

    (11조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12조는 출발선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끝나려면 멀었다.

    “...현실은 시간이 빨리 안 가네.”

    육상 3000m가 금메달 확정이면 이것보다 체력이 더 중요한 10km, 30km도 볼 것 없다.

    “엄마! 정신 차려!”

    “선영아! 봐봐! 94배야! 영혼까지 끌어모은 보람이...”

    “감독답게 굴어봐!”

    “감독? 문수야! 사랑한다!”

    “이 아줌마가...!”

    육상경기장의 내 개인실은 폭주한 송선영의 난동으로 엉망이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네.”

    얼른 금메달 3개를 목에 걸고 호텔에서 쉬고 싶어졌다.

    * * *

    올림픽을 포기하고 꿈에 들어간 까닭에 스포츠토토를 안 찍었다. 선배가 내 몸을 조종해서 올림픽 개막식에 대신 참석할 줄 알았다면...

    “크흑!”

    후회는 늘 늦는 법!

    내 통장이 94배로 뻥튀기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강문수 선수!”

    “...뭐죠?”

    목에 금메달 3개를 걸고 호텔로 돌아가려는 나를 기자가 붙잡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았던 기자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다른 기자였다.

    “현재, 금메달만 6개째이신데요! 피메달을 노리십니까?”

    피메달.

    동계와 하계를 합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보유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훈장.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작 2종목 금메달이라서 현재는 생각 없습니다.”

    기자의 교묘한 말장난에 넘어가면 안 된다.

    금메달 6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피메달은 종목별로 금메달 1개만 인정해준다. 내가 육상에서 금메달을 4개를 따든 1개를 따든 피메달 순위에는 1개로 반영된다는 의미.

    “나중에는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제 본업이 아니라서.”

    “아! 안 그래도 그 적성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강문수 선수. 무당이 어떤 적성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귀신을 잡습니다.”

    “......”

    “......”

    “...끝입니까?”

    “네. 무슨 문제라도?”

    “무당이 귀신을 잡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보인데요.”

    말장난을 좋아하는 기자답지 않게 올바른 지적이로군.

    “그러면 형용사를 추가하죠. 진짜 귀신을 진짜로 잡습니다.”

    “다른 무당은 가짜라는 뜻입니까?”

    “저야 모르죠. 다른 무당이 뭘 하는지 관심 없어서.”

    “아, 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기자는 주차장까지 따라오며 더 질문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히며 무산됐다.

    누구의 경호원?

    “강문수 선수. 금메달을 축하해요.”

    미모의 비서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탄 노파가 내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박한희 여사님.”

    어릴 적부터 달리는 걸 좋아해서 육상을 후원해온 박한희 여사.

    이젠 걷는 것조차 힘들어서 휠체어에 의존하는 노년의 여인은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줬다.

    “다음은 수영인가요?”

    “네.”

    “남편이 당신의 경기를 보지 못해서 아쉽군요.”

    그녀의 남편은 수영황제 남해수.

    내가 자신만만하게 시도했다가 구하지 못한 환자다. 그리고 끝내 검귀로 변해버린...

    “그분은 말년에 운동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으셨죠.”

    꿈속에서 너무 안 보여서 돌고래로 변한 줄 알았는데, 재벌 2세로 태어나서 과거의 역사를 바꾸기 바빴다.

    내 답변에 박한희 여사가 다 안다는 듯이 살포시 웃으며,

    “강문수 선수. 오늘처럼 기쁜 날에 이 늙은이가 조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경청하겠습니다.”

    “때로는 진실보다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때도 있어요. 빛을 더 보기 위해 올곧게 자란 나무는 거친 바람에 금방 부러진답니다.”

    “이해했습니다.”

    “정말요?”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남해수 씨의 뒤를 이어서 제가 수영황제로 군림해보겠습니다.”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수영협회에서 당신의 이 숭고한 의지를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그랬으면 좋겠다.

    영웅으로 추앙받은 수영황제의 아내가 말했기에 이건 단순한 바람이나 희망이 아닌 진실이 되리라!

    “감사합니다.”

    “호호! 저야말로 감사하죠.”

    “여사님이 저에게요?”

    “94배.”

    “아...”

    이분도 스포츠토토를 하신 모양이다.

    “수영도 기대하고 있어요.”

    “네.”

    재주는 무당이 부리고, 돈은 이웃들이 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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