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21화 (122/232)

121화

덕순이!

지금까지 덕춘이만 신경 쓴 탓에 자주는 아니지만, 완전히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덕춘이를 조용히 만날 수 있도록 부탁하고, 도적이 그녀를 납치하러 오길 기다리며 대화하고...

그러나 말투와 몸짓 등이 현지화가 너무 잘 돼서 토착민인 줄 알았다. 이 적응력은 대체 뭐야?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라.)

“끙...”

좋은 경험.

선배의 말대로다. 지금까지 ‘작품’을 기초로 한 꿈의 세계는 환자가 주인공이었으니까.

‘한 방 먹었네!’

김은정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주인공 ‘안질리나 치맥’에게 빙의했다. 혼자서 여러 나라를 망친 그녀는 틀림없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

마오짜이도 무협 소설 <이 천마 실화냐?>의 주인공이었다. 본인의 능력 부족으로 천마의 제자가 되진 못했지만, 주인공의 몸뚱이답게 천지음양지체를 타고났으니...!

(사족은 그만하면 됐다.)

“실례합니다!”

“음? 날 불렀소?”

“네. 덕순이를 보셨습니까?”

“덕순이?”

권력에 관여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략 500명쯤 되는 궁녀의 이름 따위를 관리와 경비 등이 알 리 없지만, 사극 <궁녀 덕춘이>의 궁녀는 특별하다.

사원 복지가 매우 잘 되어있는 ‘(주) 왕궁’이란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현대의 여성 같다고 할까!

역사 고증 따위...

(불평 그만하고 빨리 찾기나 해라. 축구 끝났다.)

“벌써...?!”

“음?”

“죄송합니다. 덕순이는...?”

“아, 그랬지. 그 활기찬 궁녀라면 개울가에 빨래하러 가는 걸 봤소.”

“감사합니다!”

시간의 흐름이 더욱 빨라졌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지금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냐?

내 수명이 1시간마다 하루씩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30분이 하루가 되지 않을까.

(저기 있군. 그런데 죽기 직전이군.)

“안 돼~!”

팟!

돈보다도 증발한 내 현실 시간을 고려하면, 여기서 환자가 죽으면 내 손해가 너무 막심하다.

‘어째서 넘어져 있는 거야?!’

끼긱-!

검귀가 개울가 근처에 쓰러진 덕순이를 향해 2쌍의 팔을 휘둘렀다. 몇 초 후면 그녀의 저 가녀린 몸이 두부처럼 부드럽게 절단될 터!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팟!

칼로 손목을 그어서 피를 묻히고 놈에게 도약했다.

‘늦지 마라!’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그녀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 검귀는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댕강!

등 뒤에서 기습한 내 공격에 놈은 간단히 목을 내줬다.

끼기긱-?

(이 녀석들. 2쌍의 팔과 4자루의 보검은 장식인가? 너처럼 몸뚱이에 의존해서 실력이 형편없군.)

죄송하게 됐네요!

끼긱!

내 뒤를 노리는 검귀를 향해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검을 휘둘렀다.

“......”

“놀랐지?”

이 새끼들이 강한 이유는 근접전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칼로 상대하면 칼이 절단!

창으로 찌르면 창대가 절단!

방패로 막으면 방패가 절단!

도끼, 둔기, 철퇴...

뭐든 간단히 잘라버리는 놈들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두꺼운 철판처럼 단단한 피부와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은밀한 기동력과 빠른 속도 또한 사기다.

‘이젠 안 통해.’

조건은 동일하다.

서로가 ‘자신만의 세계’를 몸에 구축해서 세계의 법칙을 무시한 독자적인 설정을 짰다.

차이라면?

놈들의 세계는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서 변수가 적고, 나는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빡!

남은 한 마리의 팔을 쳐내면서 복부에 옆차기를 꽂아줬다.

“......”

성대가 망가진 것처럼 검귀는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그러나 기아처럼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허리가 직각으로 꺾이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어서,

(빨리 끝내라. 농구 시작했다.)

네.

허리가 접히면서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진 검귀.

댕강!

자르기 좋기 내밀은 놈의 머리를 신속하게 분리해줬다.

정리 끝.

“마치 짠 것처럼 타이밍 한 번 예술이지 않습니까?”

일어서지 못하는 덕순이를 일으켜 세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절대 농담이 아니다.

내가 1초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남해수가 떠오르냐?)

네.

죽은 남해수는 검귀로 변하면서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였다. 그리고 꿈에서 한 번 더 죽으며 현실에서 사망!

원인? 원리? 아직은 모른다.

‘마녀라면 알지도...’

예전에는 나처럼 꿈에 들어올 수 있어서 신경 쓰였다면, 최근에는 안 보여서 신경 쓰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너는 사람이 태어나는 방식이 다양해 보이냐? 검귀도 똑같을 거다.)

검귀의 태어나는 과정.

이 분야의 전문가인 선배랑 진지하게 토론하고 싶지만, 현재는 검귀가 될 뻔한 환자가 우선이다.

“타이밍...?”

“무사하십니까?”

몸은 이미 확인했다. 검귀에게 조금이라도 스쳤다면 왕세자처럼 사지 중 일부가 절단됐을 테니까.

“어, 어떻게...”

“무사한 듯하군요.”

내가 무심코 말한 단어 ‘타이밍’까지 완벽하게 이해한 듯했다.

이 정도면 현대인이 확실!

올림픽도 급하지만, 검귀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원인 불명의 사태에 오래 노출되고 싶지 않았다.

(농구가 벌써 끝나가는군.)

...현실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윤소라 양.”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설마, 당신도 죽었나요?!”

“혼란스러운 건 알겠지만, 여기는 현실이 아닌 사극 <궁녀 덕춘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꿈의 세계입니다. 당신의 꿈속입니다.”

“자, 잠깐만요! 혼란스럽다는 걸 전제로 설명하면 전혀 설득이...”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어가고 있을 뿐-”

끼기긱!

끼긱!

환자를 느긋하게 설득하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걸까?

개울가 건너편에서 검귀들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질주해왔다.

(후배야. 싸워볼래?)

미쳤어요?!

“실례!”

“네? 꺄앗?!”

나는 왼팔로 환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후에 반대편으로 달렸다.

“......”

“......”

넋을 놓은 얼굴로, 소리 없이 땅 위를 빙판처럼 미끄러지듯 전진하는 검귀 무리.

놈들이 십여 마리만 됐어도 내가 이토록 신속하게 등을 보이며 달아난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가 저렇게 많아?!”

“아, 아파요~!”

“저 괴물들에게 허리가 싹둑 잘리는 것보다는 아픈 쪽이 나을 겁니다!”

“...꿈이라면서요.”

“여기서 죽으면 현실의 병원에 누워있는 당신도 죽습니다.”

왕궁은 절대 안 된다. 피해 복구로 바쁜 그곳으로 도망치면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지리라. 곧 사라질 꿈일지라도 양심적으로...

“병원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가 얼마나 다쳤고 현재까지 입원비가 얼마 나왔죠?”

“...벌써 적응했네요.”

이 세계가 꿈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광속도인데?

이런 환자는 처음이다.

“알려주세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세요. 지금은 꿈에서 깨어날 생각만-”

“저에게는 중요해요. 부모님이 제 입원비를 내주실 리 없으니까요. 스토커에게 당해서 얼마나 다쳤죠?”

“...안 다쳤습니다. 당하기 전에 제가 막았습니다.”

끼기긱!

끼긱!

우리를 추적하는 검귀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살려~!”

“악~?!”

당연히 우리가 도망치는 방향마다 지옥이 펼쳐졌다. 봉변을 당한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미안하지만, 여기서 발을 멈출 순 없었다.

(농구 끝났다.)

선배! 환자의 기억을 읽어주세요!

(내 해설을 듣고 설득할 만큼 여유롭지 않을 텐데?)

“......”

비아냥이 섞인 선배의 지적에 반박할 수 없었다.

“전부 빚이잖아요. 당신이 제 입원비를 대신 내주고 있나요?”

“잘 들으세요.”

“네.”

“식물인간이 된 당신을 부모님이 100일 가까이 집구석에 버려뒀습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 위태위태한 상태로 구출된 당신을 제가 보호하고 있는 것도 맞습니다.”

“...깨어나서 빚을 갚으란 건가요?”

“돈으로 갚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을 돌봐주는 의사에게 며칠만 협조하면 됩니다.”

“인체실험...?”

“뒤를 돌아보십시오. 농담할 분위기로 보입니까?”

“......”

우리가 지나간 길은 수백의 검귀에게 난도질당하여 폐허로 변했다.

끼기긱-!

끼긱-!

“큭!”

전방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검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꿈의 세계 곳곳에서 검귀가 출현하고 있다는 방증.

놈들의 목적은?

(야구 8강전이 방금 끝났다. 이건 무림인들의 천리지망이랑 유사하군. 곧 포위당할 거다.)

보면 압니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놈들은 이 세계의 불청객인 나에게 강한 적의를 보였다.

끼긱!

끼기긱!

그리고 어째선지 꿈의 주체인 환자도 노리고 있었다.

“윤소라 양?”

“......”

“윤소라 양...!”

“...아! 죄, 죄송해요. 이 긴박한 상황에 졸음이 쏟아져서...”

“정신 차리세요! 지금 잠들면 영원히 못 깨어납니다!”

어째서 안 깨어나지?!

윤소라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올바르게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답답한 놈아.)

도와주세요!

(다음부터는 꿈의 세계만 예상하지 말고, 환자가 어째서 현실을 외면하고 꿈으로 도피했는지 생각해라.)

네! 훈수는 나중에 잔뜩 들을게요! 일단 도와주세요!

(부모.)

감사요!

“윤소라 양. 현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상현실게임에 빠져서 딸을 돌보지 않는 부모도 잊으세요.”

“...어떻게 잊어요?”

선배의 도움을 받은 내가 정곡을 찌른 걸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야구 끝났다.)

“부모가 없는 제가 보장합니다.”

“예?”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로 창고 같은 단칸방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다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저도 올해 졸업했어요.”

“압니다. 적성이 의사죠. 대학 앞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스토커에게 봉변을 당했잖아요?”

“조사하셨군요...”

“네. 당신을 꿈의 세계에서 구출하기 위해.”

뚝.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나는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

“......”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한 검귀 무리가 사형을 선고하듯 조용히 다가왔다.

산에서, 강에서, 호수에서, 마을에서, 숲에서, 논밭에서...

‘포위망이 아니었네.’

이번만큼은 선배가 틀렸다. 내 시야가 닿는 모든 장소에 검귀가 있었으니까! 놈들은 날카로운 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종이처럼 자르고 있었다.

“강문수 씨?”

“네.”

“침착하시네요. 저랑 동갑이란 게 믿기지 않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윤소라 양보다 훨씬 많이 고생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부모가 없는 삶은 어떤가요?”

(육상경기장으로 향하는 중이다. 망할 준비 해라.)

걱정하지 마세요. 경기 시작 전에 수천, 수만의 검귀에게 온몸이 썰리며 살해당할 예정입니다.

“바빠서 불행한 줄 몰랐습니다.”

“아...”

스윽-

그녀의 허리를 풀어준 나는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곱게 죽어줄 마음이 없으니까!

내 목숨값은 매우 비싸다.

“강문수 씨.”

“네.”

“앞으로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네?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그녀에게 말하는 도중에 세계가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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