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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20화 (121/232)
  • 120화

    [6장-6절] 매우 심란해요

    윤소라의 가정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엉망이었다.

    이용자 점유율 30년 연속 51%라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세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존재 탓!

    하지만 탓만 할 순 없다. 그 가상현실게임이 없었으면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으니까.

    왜?

    “그 새끼는 잠도 없나? 어떻게 볼 때마다 레벨이 바뀌지?”

    “최강의 편의점? 소문으로는 편의점 주인이라는데, 편의점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게임만 하나 봐.”

    “우리도 비슷하게 하고 있잖아.”

    “여보. 소문을 믿지 마. 분명히 한가한 부잣집 도련님일 거야. 돈으로 뭘 못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가 내 위에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들은 소문인데, 올해 말에 <몰랑 판타지>에서 대규모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이래. 기회가 올 거야.”

    “무슨 기회? 이용자들이 고이다 못해 석유가 된 이 게임에서.”

    그녀의 부모님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단순한 경쟁자였던 두 사람은 협력해서 몇 번 함께 싸우기 시작하며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확인했고...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저...”

    윤소라는 조용히 입술을 뗐다.

    “왜?”

    “뭐니?”

    가상현실게임의 세계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부모님도 밥을 먹고 싸야 하기에 하루에 한두 번, 20분 정도 현실로 돌아온다.

    “적성검사결과가 나왔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딸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적성검사결과마저 관심 없는 부모님.

    그들의 머릿속에는 빨리 영양소를 섭취하고, 기저귀를 갈아입은 뒤에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로 돌아가자는 생각밖에 없다.

    “의사래요. 세부적인 전공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의견을 존중하마.”

    슬슬 <몰랑 판타지>에 접속할 시간이라고 판단한 부모님이 딸의 말을 대충 흘리며 일어섰다.

    “여보. 녀석 밥은 먹였어?”

    “당연하지. 키우다가 허리 휘겠어.”

    “호호! 나중에 다 보답받을 거야. 그러니 엄살 부리지 마.”

    “엄살? 당신도 말로만 키우지 말고 직접 해봐.”

    부모님이랑 대화하기 위해 윤소라도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에 대해 공부는 했다.

    부모님이 말하는 ‘녀석’.

    강력한 용을 사냥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알에서 태어난 새끼 용이다.

    “......”

    윤소라는 혼자 남은 식탁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봤다.

    요리도, 설거지도 그녀의 몫.

    직접 낳지도 않은 입양아만도 못한, 가상현실게임 전자신호에 밀린 자신의 위치가 너무나 비참했다.

    “우리가 경매장에 올린 재료는 팔렸을까?”

    “흐흐. 팔렸으면 좋겠네. 꼭 제련하고 싶은 무기가 있거든.”

    “선 넘네. 내 옷이 먼저거든?”

    “크흠! 잘 알지.”

    중요한 순간에 소변이 마려워서 사냥을 망친 뒤부터 아기처럼 기저귀를 착용하기 시작한 부모님.

    딸을 대신 키워준 부모(조부)가 돌아가신 날에도 기뻐하셨다. 상속금으로 가상현실게임 아바타에 더 좋은 장비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이 정도는 약과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포기해야겠지...’

    의대 학비를 내줄 리 없다. 그럴 돈이 있으면 가상현실게임에서 키우는 새끼 용의 사료를 사실 분들이니까.

    윤소라는 P의 적성을 단념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 * *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의 국민이 법적으로 P의 적성검사결과를 받은 순간부터 자립이 인정되는 성인(成人)이다.

    독립.

    윤소라의 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낳아주기만 한 부모에게 받은 외모와 체형 관리(?) 덕분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싹싹하게 잘하네.”

    대학교 앞 카페 주인아주머니가 흐뭇한 미소로 칭찬했다.

    “감사합니다.”

    “스스로 가꿀 줄 아는 예쁜 애들이 부지런해서 일도 더 잘하는데, 소라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어릴 적부터 열심히 살았어요.”

    부지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군살 하나 없는 몸매가 부럽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 그녀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살이 찔 틈이 없을 만큼 가정이 힘들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래? 가정 교육을 잘 받았구나.”

    “...그런 셈이죠.”

    스스로 챙겨 먹지 않으면 학교급식이 없는 주말 내내 굶어야 했던 그녀의 가정환경이 과연 좋을까?

    그녀는 그렇다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내 가게에서 오래 일해줘. 소라 보려고 오는 손님이 늘었어. 적성이 정말로 의사야?”

    “하하... 보셨잖아요.”

    카페 주인아주머니가 그녀의 부모보다 P의 적성검사결과를 세심하게 살펴봤다.

    “정말 부럽네. 요즘은 적성만 가지고는 경쟁이 안 돼. 올림픽 금메달보다 잘생긴 은메달이 돈을 더 번다고 할 정도니까.”

    운동복은 운동선수를 광고모델로 채용하지만, 못생기면 반짝 주목받고 연금으로 끝!

    같은 의미로,

    “환자도 이왕이면 예쁜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어하잖니?”

    “...네. 맞아요. 나중에 제 병원에 오시면 싸게 해드릴게요.”

    “어머! 말뿐이라도 기뻐라~”

    “......”

    카페 주인아주머니의 말대로, 적성도 적성 나름이다.

    엇비슷한 재능끼리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적성 외에도 추가로 무언가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적성을 살리지 못하면 예뻐도 소용없어...’

    적성검사결과 ‘의사’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 의사 면허증이 아니다. 의학지식과 경험은 적성이 아닌 학습으로 얻어야 하니까.

    톡.

    “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윤소라는 심란한 마음을 애써 진정하며 일에 집중했다.

    “한 잔만 줘요.”

    “예?”

    그런데 손님이 커피 한 잔을 그대로 남기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한 잔은 아침부터 내 눈을 정화해준 당신을 위해 제가 사는 겁니다.”

    “어... 감사히 잘 마실게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단순한 요령.

    대학을 졸업하게 돼서 그만둔 미모의 전임자가 가르쳐줬다. 이성적으로 지나친 호의를 보이는 손님들이랑 적당히 거리를 두되, 기분 나쁘지 않도록 성의를 보여주라고.

    “소라야.”

    “네.”

    “앞으로는 마음만 받는다고 해. 저런 손님을 배려하다가 오해를 사면 더 성가셔져.”

    “그래도 안 되면요?”

    그녀는 처음으로 돈을 만져보게 해준 이 카페에 애정이 있어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직원 규정이라고 해. 어기면 해고될 만큼 중요하다고.”

    “아...”

    “네 전임자는 그런 처세술이 매우 좋았어. 적성이 연극배우였거든.”

    “그건 몰랐네요.”

    “아! 말 나온 김에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게.”

    “뭔데요?”

    “이거.”

    “매주 챙겨보시는 사극 <궁녀 덕춘이>네요.”

    윤소라는 카페 주인아주머니의 스마트폰을 보자마자 어떤 방송을 시청 중인지 바로 눈치챘다.

    “여기에 네 전임자가 나와.”

    “어?! 정말요?”

    “주연은 아니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출연한 작품이야. P의 적성검사는 배우의 외모보다 연기에 높은 비중을 두지만, 현실은 다르니까.”

    “무슨 역할이에요?”

    “구미호.”

    “뭔가... 어울리네요.”

    남자를 홀리는 여우 같은 인상이었던 전임자의 얼굴을 떠올린 윤소라는 바로 수긍했다.

    “호호! 그래서 애가 화면에 나올 때마다 신기하게 보고 있어.”

    “그럴 것 같아요.”

    바로 얼마 전까지 옆에 데리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유명한 공중파에 매주 출연하고 있으니...

    공짜는 아니었지만, 그 배우의 학비와 용돈에 한 손 보태준 카페 주인아주머니는 뿌듯하지 않을까?

    “소라도 심심할 때는 봐도 돼.”

    “네. 꼭 볼게요.”

    카페 아주머니의 제안. 하지만 윤소라에게는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나 다름없었다. 일이 어렵지 않으면서 아르바이트 시급은 좋은 이 카페에서 오래 일하려면 고용주랑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 * *

    “덕순아. 이것도 같이 빨아줘.”

    “네. 언니.”

    윤소라는 왕세자를 바로 선택하지 않고 고민하는 사극 <궁녀 덕춘이>의 답답한 여주인공 ‘덕춘이’보다 짝꿍 ‘덕순이’가 좋았다.

    덕춘이의 부모는 전염병에 걸려서 돌아가신 반면, 덕순이의 부모는 유복한 양반 가문!

    세자빈 자리를 노리고 딸을 궁녀로 보내는 전형적인 권력 추구 형태였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딸을 아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역으로,

    ‘너무 아껴서 탈이시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스러운 내 딸만이 이 나라의 국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으니!

    그리고 실제로, 사극 <궁녀 덕춘이>에 ‘구미호’로 출연한 전임자랑 간혹 통화하는 카페 주인아주머니가 슬쩍 말하길, 왕세자와 덕순이가 맺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탁! 탁!

    “덕순이는 좋겠다.”

    “왜요?”

    옆에서 빨래방망이를 함께 두드리는 연상의 궁녀가 탄식했다.

    “정말로 몰라? 저하께서 덕춘이 옆의 너를 그윽한 눈길로 보셨어.”

    “그랬나요?”

    이미 알고 있다. 카페에서 일하며 남자들의 시선에 익숙해진 만큼 항상 살피고 있으니까.

    정실(正室)은 덕춘이에게 양보.

    어쩔 수 없다. 왕세자가 덕춘이에게 계속 얽매여 있으면 그녀의 차례가 한없이 미뤄질 테니까.

    부모의 사랑을 받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일만 하다가 늙어 죽기 싫은 윤소라는 두 번째 아내, 왕세자의 첩실(妾室)을 노리고 있었다.

    다만,

    ‘덕춘이도 이런 마음이었구나...’

    두근두근.

    그녀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며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강문수.

    왕세자와 덕춘이의 생명을 구해준 중원 출신의 낭인.

    스토커의 칼에 찔려 어이없게 죽고 덕순이의 몸으로 눈을 뜨기 직전,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늠름한 남자랑 너무 비슷하게 생겼다.

    이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나?

    “후우...”

    “어머! 설마, 내 말 때문에 심란해?”

    “그런 것 같아요.”

    배부른 투정이겠지만, 왕세자의 첩실이 되어 호화롭게 산다고 해도 진정으로 행복할 것 같진 않았다.

    겨울에는 온돌이 있어서 괜찮지만, 에어컨이 없는 여름은 끔찍! 재래식 변기를 처음 마주하고 며칠 동안은 변비로 고생했으며, 지금도 수세식 변기가 무척 그리웠다.

    특히,

    ‘여기서도 사랑할 수 없구나.’

    그녀는 궁녀다. 왕족 남성 외에는 사랑할 수 없는 신분.

    덕춘이처럼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그 남자를 짝사랑 중이니 더욱 답답한 상태! 덕춘이를 욕할 자격이 없다.

    끼기긱-

    소름 돋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든 윤소라의 정면에,

    “히익?! 칼 요괴야!”

    “꺅! 도망쳐!”

    흉흉하게 생긴 괴물의 접근을 눈치챈 궁녀들이 개울가에 빨랫감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

    윤소라도 그녀들을 따라,

    “어...?”

    갑작스러운 현기증으로 온몸이 무겁게 느껴지며 휘청거렸다.

    끼기긱!

    끼긱!

    괴물들은 이런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아... 또 칼에 죽는구나.’

    질끈!

    윤소라는 엄습하는 죽음과 고통의 공포를 억누르듯 눈을 감았다.

    “......”

    그러나 몇 초를 기다려도 몸은 무사했다.

    “마치 짠 것처럼 타이밍 한 번 예술이지 않나요?”

    번뜩!

    짝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윤소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타이밍...?”

    이 시대에 절대 있을 수 없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음을.

    “무사합니까?”

    “어, 어떻게...”

    “무사한 듯하군요.”

    괴물들을 처리한 강문수가 늠름한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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