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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9화 (120/232)
  • 119화

    “너희는 대체 뭐냐?”

    “......”

    내가 휘두른 동료의 팔에 두 다리를 잃고 쓰러진 ‘마지막 검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끼긱-

    아직 움직일 수 있는 팔로 내 목숨을 노릴 뿐!

    “다음에는 검술 좀 배워서 와라.”

    팅- 댕강.

    놈이 휘두른 날카로운 팔들을 가볍게 쳐내며 목을 잘랐다.

    “......”

    머리를 잃은 뒤에도 몇 초 동안 발버둥 친 검귀의 움직임이 차츰 둔화하다가 완전히 멈췄다.

    (검술을 배워? 너나 몸에 의지하지 말고 더 배워라.)

    “킁.”

    (피아니스트보다는 낫다만, 어디 가서 검술 좀 한다고 깝죽대지 마라. 듣는 내가 창피하다.)

    “......”

    선배의 핀잔을 들으며 도적의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올림픽은 어떻게 됐어요?

    (기뻐해라. 태권도 남성 20대와 전체연령, 둘 다 금메달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남해수의 꿈속에서 따지 못한 태권도 금메달을 현실에서 땄다. 내가 직접 참가하진 못했지만!

    체급(體級)?

    경기자의 몸무게로 등급을 나누는 방식은 P의 적성검사기가 등장한 이후로 싹 사라졌다. 타고난 체격도 적성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30대와 40대는 부족한 체력만큼 기술이라도 좋을 줄 알았는데, 별반 다르지 않더군.)

    “뭐...”

    태권도 전체연령 금메달이신 분께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과거에 체급으로 세분화하던 종목 대다수가 나이로 바뀌었다.

    20대, 30대, 40대, 전체연령.

    육상과 수영처럼 금메달이 많은 종목이랑 균형을 맞추고, 격투선수 특유의 투쟁심을 꾸준히 발산하는 이점이 있다고 배웠다.

    (흐흐! 나에게 패배한 놈들에게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본인의 한계를 깨닫고 선수를 그만두겠지!)

    저기요?

    내 몸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살짝 불안했다.

    (이미 끝났다만, 지금부터는 네 마음대로 날뛰어도 돼. 한동안 경기가 없어서 호텔에 틀어박혀 있을 테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피메달에 감사해라.)

    “피메달...”

    올림픽에서 가장 영예로운 순간은 금메달 수상식이 아니다.

    피메달(P-Medal).

    하계와 동계를 합쳐서 가장 많은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주어지는 단 하나의 메달!

    올림픽의 역사를 바꿔버린 P의 업적을 기리고, 지난 2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선수란 상징성까지 고루 갖춘 최고의 명예(名譽)다.

    이게 고마운 이유?

    (남은 올림픽 일정을 알려주마. 축구, 농구, 야구가 끝나면 육상이다. 그 뒤에 권투, 수구, 수영이지.)

    “운이 좋네요.”

    구시대처럼 여러 종목이 동시에 진행되면 금메달을 선택해야 하는 불공정한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래서 올림픽은 총기간이 매우 길어지더라도 한 종목씩 차례대로 진행.

    피메달을 노리진 않지만, 내가 복수 종목에 무리 없이 참가할 수 있는 이유도 이 규정 덕분이다.

    다만,

    (내가 조종하면 네 몸뚱이는 능률이 절반쯤 떨어지는 것 같다.)

    “절반이나...”

    선배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이해한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육상과 수영은 네가 직접 뛰지 않으면 동메달은커녕 꼴찌 확정이다. 수영 10km 마라톤은 금메달이 가능할 수도 있겠군. 체력은 절반으로 줄어도 쓸만한 편이니까.)

    “꼴찌는 좀... 그렇네요.”

    망신을 당할 바에 안 나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네 주치의가 제안하더라.)

    뭘요?

    (환자의 생명이 거의 끝났다. 병원에서 비싼 유지비를 들여 억지로 붙잡아두고 있지.)

    “......”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들어라. 생명유지장치를 끄면 환자는 30분 안에 죽는다는군. 이미 오랫동안 혼수상태였고, 집에 돈도 없기에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돈이 없어서.

    혼자가 된 내가 최근까지 가장 많이 했던 변명이었다.

    (너에게는 좋은 일이지. 환자가 죽으면 너도 능력이나 뇌세포를 잃는 후유증 없이 꿈을 빠져나와서 육상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

    “흠...”

    입 밖으로 튀어나온 신음을 애써 삼켰다. 선배의 말은 냉정했지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으니까.

    (어떻게 할래?)

    “......”

    (너를 시험하는 게 아니다. 순수하게 물어보는 거다.)

    제 생각을 읽으시면 되잖아요?

    (착각하지 마라. 내 술법은 훔쳐본 기억을 토대로 생각을 추측할 순 있어도 단정은 못 해. 그게 가능했다면 이런 구차한 대화도 필요 없지.)

    “...정했어요.”

    환자를 설득하려는 노력도 안 해보고 이대로 끝낼 순 없습니다.

    (흠. 좋다.)

    “가서 덕춘이만 만나면 돼요.”

    환자를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이미 생각해뒀다.

    (덕춘이의 생각을 읽을 셈이군. 나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 아니냐?)

    “흠흠.”

    반성은 나중에 할게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왕궁도 수도를 둘러싼 성벽과 성문이 반파되어 있었다.

    “서둘러!”

    “영차영차!”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백성이 보수에 동원되어 돌을 나르거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제발! 엄마~!”

    “아버지... 흑흑!”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비통한 절규와 울음도 사방에서 들렸다.

    “흠...”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서 전쟁을 지겹게 경험했기에 이 정도의 참상은 나에게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여기도 검귀가...’

    이 시대의 석재 기술로는 절대 불가능한 매끈한 절삭력.

    검귀가 나만 습격한 게 아니었다. 그 숫자도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도적 빼고 가장 강한 궁기병이 감당 못 할 수준으로 습격한 것 같은데...

    (서둘러라.)

    “...네.”

    도시의 거리도 엉망이었다. 내가 도적의 은신처로 향할 때만 해도 활기가 넘쳤는데, 지금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시체와 폐허로 가득했다.

    왕궁은?

    “허... 저기도 뚫렸었네.”

    도시를 둘러싼 외벽만 무너진 줄 알았다. 그런데 왕궁의 마지막 방어선인 내벽마저 일부 허물어져 있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자.

    “실례합니다. 왕세자 저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내 질문을 받은 경비병이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하의 식객이군. 대전(大殿)으로 가보게. 현재, 요괴에게 당하고 매우 위중한 상태이시네.”

    “...큰일이군요.”

    왕세자 옆에 왕세자빈이 된 덕춘이도 있을 터. 만날 수 있을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막아서면 다른 수단을 강구하면 그만이다.

    (축구 끝났다.)

    “컥!”

    벌써요?!

    (뭘 놀라냐? 올림픽 전에 예선전을 끝내고 16강부터 시작했다. 하루에 1판씩, 4판만 이기면 우승이지.)

    “......”

    그래서 놀랐다. 이 짧은 시간에 현실에서는 4일이나 흘렀으니까. 환자의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는 의미.

    ‘손해가 크네.’

    몰랐던 탓이지만, 다음부터는 건강이 안 좋은 환자의 꿈속은 절대 들어가지 않으리라. 내가 잃어버리는 현실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어머! 나리...!”

    다친 병사들의 피와 고름이 묻은 수건을 잔뜩 품에 안은 덕순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 못난 꼴을 보여드렸네요. 일손이 다들 부족하다 보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권력에 욕심이 없다면 궁녀는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다. 괜한 오해로 왕의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궁녀인 덕순이도 마찬가지다.

    ‘꼭 그렇지도 않나?’

    궁녀에게 매우 관대한 로맨스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설정 때문에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나리.”

    “...뭐지?”

    시간이 없는 나를 또 불러 세운 덕순이 때문에 살짝 짜증이 났다.

    “사모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이미 혼례를 치르셨거나...”

    “있다.”

    “아...”

    “주제넘게 조언하자면, 본분을 잊지 않는 편이 좋아.”

    “본분... 소녀는 궁녀였지요. 조언 감사합니다.”

    “흠.”

    발걸음을 서둘렀다.

    (볼 때마다 신기하군. 저 궁녀는 잘난 부분이 하나도 없는 네놈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든 거지?)

    “킁.”

    말씀이 심하시네요. 찾아보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은 검술에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말은 똑바로 해라. 두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이인자를 싫어할 여자도 있냐? 개국공신 아몰랑 백작?)

    “끙...”

    할 말이 없었다.

    (송선영처럼 매우 특수한 사건을 계기로 집착하는 여자가 아니면 너를 좋아하기 힘들지.)

    “으아아...”

    선배의 자비 없는 언어폭력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훈련이라고 생각해라. 술사는 정신력 싸움이다.)

    ...마녀요?

    (그래. 최근에 안 보인다고 방심하지 마라. 뛰어난 술사는 준비 기간이 길수록 위험하니까.)

    네.

    단순히 나를 괴롭히기 위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았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저하를 뵙고 싶습니다.”

    “너는... 저하의 식객으로 궁에 머무는 야인이군.”

    고위관료로 짐작되는 노인이 주름 가득한 이마를 찡그렸다.

    (어의다.)

    아하!

    왕궁에서 일하는 의사 ‘어의(御醫)’가 검귀에게 당한 왕세자를 치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하는 어떻습니까?”

    “이제 막 잠드셔서 안정을 취하고 계시네. 용체(龍體)를 잃은 충격이 크셔서 지금은 휴식이 필요하니, 멀리서 뵙는 것도 허용할 수 없군.”

    “어디를 잃으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어렵겠군.”

    “저는 저하의 호위를 위해 고용됐습니다. 알 권리가 있습니다.”

    “흠...”

    고민하던 어의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줬다.

    “두 다리네.”

    “그렇군요.”

    두 다리!

    무엇이든 간단히 절단하는 검귀에게 당했으니 당연한 걸까? 하지만 한쪽 팔도 아니고 두 다리를 잃으면 앞으로 생활에 치명적이었다.

    “지금은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매우 크시네.”

    “나중에 오겠습니다.”

    나는 어의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내가 정말로 찾던 사람은 왕세자가 아닌 덕춘이였으니까. 그녀가 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저하.”

    “...대화할 기분이 아니구나.”

    남편이 잘못되는 바람에 덕춘이는 매우 우울해 보였다. 명예로운 상처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했으니까. 후계자 지위도 위태로운 수준이다.

    “그를 만났습니다.”

    뚝.

    내게 등을 돌린 덕춘이의 발걸음이 바로 멈췄다.

    “...그를 어떻게 했느냐?”

    “사랑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그의 사면을 약속했습니다. 독단적인 결정이기에 왕세자 저하께 허락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거짓말.”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설정에 사로잡힌 덕춘이는 왕세자빈이 된 후에도 도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살짝 거짓말을 섞기로 했다.

    “그가 저하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얼른 고하라!”

    “그렇다면 잠시 실례할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하마. 어머?!”

    탁.

    나는 덕춘이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으며 말했다.

    “덕춘아. 약속을 못 지켜서 정말 미안하다. 행복해라.”

    “아...”

    이별을 통보받은 여주인공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윽-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거뒀다.

    “저하.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배!

    (기다려라.)

    덕춘이에게 왕세자를 선택하라고 부추긴 인물.

    시간이 걸리는 이유?

    사극 <궁녀 덕춘이> 원작에는 그녀에게 왕세자를 선택하라고 ‘원래’ 주장하는 인물이 많기 때문이다.

    즉, 원작이랑 비교하면서 다른 인물을 찾아야 하는데...

    (찾았다.)

    “오!”

    누구인가요?

    (바보의 몸을 조종하면서 나도 바보가 된 모양이군. 그 아가씨가 아무런 접점도 없는 너를 무작정 좋아할 때 눈치챘어야 했거늘.)

    “설마...?”

    (그 설마가 맞다.)

    휙!

    명확한 목적지가 생긴 나는 지붕마저 뛰어넘으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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