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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8화 (119/232)
  • 118화

    세계의 규칙.

    송선영, 최강민, 남해수처럼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꿈의 세계는 간섭이 덜하지만, 문학 작품을 기반으로 창조된 세계는 다르다.

    마법, 무공, 술법...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설정이 자연의 섭리처럼 자리매김하고 있다.

    ‘참 안타까워.’

    그런데 이게 단순히 세계관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인물의 성격, 생각, 평판, 관계...

    작품에 한 번이라도 등장한 인물은 이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A는 B를 어릴 적부터 사랑했다.

    작품에 이런 ‘과거 진행형’ 문장이 있다면 고스란히 반영된다. 하지만 이 문장뿐이라면 이후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A는 B를 어릴 적부터 사랑했다.

    -A는 B가 C를 좋아해도 괜찮았다.

    -A는 B의 모든 면이 사랑스러웠다.

    -A는 B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작품에 설정이 많아질수록 빠져나갈 구멍이 줄어들면서 강한 구속력이 생긴다.

    이 녀석도 그 피해자.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사랑한다는 대사를 남발한 탓이다.

    “야. 아직도 덕춘이가 좋냐?”

    “사랑한다!”

    팔다리가 부러진 채로 은신처 한복판에 누운 도적이 외쳤다.

    순간이동? 그의 복부에 내 발이 올려져 있어서 쓸 수 없었다.

    “도련님...”

    여우불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나에게 맨몸으로 무모하게 돌진했다가 발차기 한 방에 고꾸라진 구미호.

    흙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도적을 바라봤다.

    “얌전히 있어. 까불면 저 여우를 박제해버릴 거야.”

    “큭.”

    내 협박에 도적은 부러진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려는 행동을 멈추고 고분고분해졌다.

    동료를 못 버리는 성격.

    이것도 사극 <궁녀 덕춘이>가 그에게 부여한 강력한 족쇄 중 하나였다.

    “나는 너를 구해주고 싶어.”

    “헛소리!”

    “안 믿어도 상관없어.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탁.

    나는 양손을 활짝 펼친 후, 도적의 머리 위에 최대한 넓게 얹었다.

    대뇌(大腦).

    인간의 사고를 주관하는 생체기관.

    나의 세계로 이것을 덮어버리면 작품의 설정을 깨고 융통성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무슨 속셈이냐?”

    “덕춘이는 왕세자랑 결혼했어. 이미 몸도 여러 차례 섞었어.”

    “...안다.”

    “너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그녀를 납치해서 뭘 어쩔 셈이지?”

    “그야... 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시원하게 대답하려던 도적이 멈칫했다.

    빠직-!

    세계의 충돌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손맛을, 도적의 머리를 붙잡은 양손을 통해 확실하게 전달받았다.

    “네가 덕춘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를 기다려준 여자들이 주위에 많아.”

    그녀들도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설정에 속박된 불쌍한 영혼들.

    내가 구제해주겠다.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안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 덕춘이는 이제 왕세자빈이야. 그녀가 너를 쫓아서 화려한 궁궐 생활을 포기하고 평생 초가집에 숨어 살면 행복할까?”

    “아니겠지.”

    멍청했던 도적이 드디어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덕춘이를 포기한다고 약속하면 왕세자에게는 내가 잘 설명해줄게. 더는 숨어 살지 않게 해주마.”

    “정말인가?”

    “역적으로 낙인찍힌 너를 안 죽이고 설득하는 나를 믿어봐.”

    “...알겠다.”

    도적이 유일하게 멀쩡한 목을 움직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가 문제네.’

    (그렇구나. 네가 손을 떼자마자 족쇄가 다시 채워지면 소용없지.)

    선배. 태권도는요?

    (방금 끝났다. 돌려차기 한 방으로 끝내버렸는데, 송선영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며 계속 잔소리하는 중이다.)

    고생하시네요.

    (알면 나에게 잘해라.)

    스윽-

    나는 도적에게서 양손을 떼고 천천히 물러섰다.

    ‘괜히 떨리네.’

    내가 잃어버린 능력의 원한이 깊긴 하지만,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피똥을 쌀 때까지 도적을 두들겨 팼다.

    보면 볼수록 불쌍하달까?

    사극 <궁녀 덕춘이> 원작에서도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감독과 작가에게 버림받을 예정이란 이야기를 듣고 짠해졌다.

    “사랑했는데... 사랑했는데... 흑흑!”

    도적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체념의 눈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알 수 있었다. 꿈이 끝나면서 호위기사 발렌타인이랑 강제로 헤어졌을 때, 하염없이 울었으니까.

    (아직도 못 잊었냐?)

    “쿨럭.”

    비밀입니다.

    (그 호위기사가 너에게 참 잘하긴 했었지. 네가 좋아하는 다리도 송선영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검술로 단련된 근육질 팔뚝이 유일한 흠이라고 생각했었구나?)

    “크흐음!”

    이 아저씨가 선을 넘네!

    (...후배야.)

    또 왜요?

    (진법이 뚫렸다.)

    “음?”

    선배의 경고 직후, 내 귀를 자극하는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기긱-

    끼긱-

    ‘검귀가 저렇게나 많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당장 내 시야에 들어온 검귀만 13마리. 어두컴컴한 숲속에 더 있을 것 같다.

    “검귀가?! 큭!”

    도적은 놈들을 아는 눈치.

    하지만 내가 팔다리를 부러트린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령! 흉악하게 생긴 이 요괴들은 대체 뭐요?”

    양손으로 도끼를 든 산적 두목이 도적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답은?

    “도망치십시오!”

    “뭐-”

    댕강!

    산적 두목은 도끼째 온몸이 토막 나며 검귀에게 살해됐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손발.

    나처럼 고유의 세계를 가진 검귀들은 진법을 무시하고 우리를 향해 일제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또?!”

    파스스...

    나처럼 세계의 규칙을 무시하는 놈들에게 구미호의 여우불은 성냥개비만도 못했다.

    사락~

    나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여우처럼 잽싸면서도 우아한 몸놀림으로 후퇴했다.

    “여우. 너의 님을 데리고 도망쳐.”

    “...감사합니다.”

    구미호는 도적의 마음을 돌린 나에게 인사하더니 둔갑을 풀었다.

    사라락~

    꼬리 9개 달린 새하얀 여우. 덩치는 호랑이보다 살짝 컸다.

    “도련님. 조금만 참으세요.”

    “큭...!”

    긴 꼬리로 도적의 온몸을 칭칭 감은 구미호는 하늘 높이 수직으로 솟구치며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나는?

    “침입자들끼리 놀아보자고.”

    “......”

    “......”

    나를 증오에 찬 얼굴로 노려보는 검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2쌍의 팔을 위협적으로 치켜들고 일직선으로 돌격할 뿐.

    총 15마리.

    아무리 생각해도 열세였다.

    (이 답답한 새끼야! 뭘 놀아? 멋 부리지 말고 얼른 도망쳐.)

    “하핫!”

    선배의 핀잔을 웃음으로 넘기며 뒤돌아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끼기긱!

    끼긱!

    도망치는 나를 15마리의 검귀가 맹렬하게 추격했다.

    서걱! 퍽! 우직끈...!

    놈들은 가로막는 나무와 바위 등의 장애물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넓게 포위하는군.)

    “지능이 있네요?”

    (인간처럼 생긴 머리가 장식은 아니란 의미겠지.)

    모든 검귀가 기차처럼 줄줄이 나를 추적해주면 좋았겠지만, 놈들은 숲의 모든 나무를 베어버릴 기세로 넓게 흩어졌다.

    “곤란한데...”

    (나도 곤란하다. 태권도 경기를 나가야 해.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 내가 신호를 보내면 잠시만 멈춰라.)

    “쉽게 말씀하시네요!”

    그 잠시를 검귀들이 얌전히 기다려줄 것 같지 않습니다!

    (엄살 부리지 말고 해내! 나는 시답잖은 약자의 발에 맞아주기 싫다!)

    “큭.”

    (지금부터 5초다.)

    “5초나?!”

    뚝.

    나는 제자리에 멈췄다.

    하나, 둘-

    “......”

    “......”

    검귀 2마리가 나를 향해 스케이트 선수처럼 상체를 숙인 채 돌진했다.

    무시무시한 투기와 살기!

    손에 땀이 날 정도로 환도를 꽉 움켜쥔 채 기다렸다.

    (됐다.)

    “흡!”

    점수로 승부를 결정하는 태권도 시합이 몇 초 만에 끝난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휙!

    환도를 휘둘렀다. 발렌타인에게 배운 검술로-

    댕강!

    “어...?”

    환도가 절단됐다. 검귀의 날카로운 손에 공기처럼.

    휙-

    휘릭-

    놈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내 몸을 난도질할 기세로 공기를 가르며 2쌍의 팔을 휘둘렀다.

    (이 답답한 새끼야! 네 머리는 장식이냐?! 칼도 비슷한 수준이어야 검술이 통하지!)

    “큭!”

    억울하다고 변명하거나 대꾸할 틈도 없이 온몸을 비틀었다.

    서걱-

    세계로 보호받는 덕분일까? 놈들의 날카로운 손은 내 몸까지 공기처럼 베어내진 못했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검귀의 손.

    그러나 나를 상대할 때는 매우 날카로운 평범한 칼이었다.

    (쯧. 왼팔은 날렸군.)

    댕강.

    선배가 혀를 차자마자 내 왼팔이 검귀의 손에 절단됐다.

    “......”

    나는 고통을 참으며 검귀의 복부를 오른발로 힘껏 걷어찼다.

    푹!

    철갑옷처럼 단단한 피부. 근거리에서 쏜 총으로도 한 방에 안 뚫렸던 검귀의 몸이 움푹 휘어졌다.

    순수한 물리력.

    검귀의 세계를 무시한 내 발차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후배여. 너무 늦은 깨달음을 안고 죽어라.)

    “후읍!”

    불길한 소리를 하는 선배를 무시하고 오른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내 왼팔을 잽싸게 낚아챘다.

    톡.

    그리고 절단 부위에 가져갔다.

    (변태 같은 재생력이군.)

    “감사요.”

    온몸에 난 생채기도 빠르게 아물며 사라졌다.

    팟!

    다시 달리기 시작한 나는 도적의 은신처로 돌아왔다.

    “......”

    검귀에게 처참히 살해된 산적 두목이 보였고, 그의 옆에는 자루만 남은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젠 철봉(鐵棒)이라고 해야 할까?

    충분했다.

    ‘좋아.’

    스윽-

    내가 흘린 피를 철봉에 묻혔다.

    (응용력이 제법이군.)

    “그렇죠?”

    주변을 깔끔히 정리해서 내가 숨을 장애물을 없앤 검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끼긱-!

    그리고 완벽히 포위망을 갖추자마자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알아서 해라. 나는 귀찮게 달라붙은 기자들을 상대하러 가마.)

    “네.”

    부웅-

    내 피로 붉게 물든 철봉을 힘차게 휘둘렀다.

    “......”

    검귀는 그것을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베어내려고 했고-

    퍽!

    철봉이랑 충돌하자마자 날카로운 손이 유리처럼 부서진 검귀. 그대로 머리까지 한 방에 허용했다.

    빠각!

    시원하게 머리가 짓뭉개진 검귀가 튕겨져 날아갔다.

    “......”

    그리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하핫!”

    만족스러운 결과에 시원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의 피. 나의 세계.’

    철봉에 내 피를 묻혀서 ‘나의 철봉’으로 바꾼 것이 정답이었다. 이 방법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환도를 잃지 않았을 텐데.

    아니-

    철봉이기에 괜찮았던 걸까. 내 피를 묻혔음에도 단단한 철봉이 반쯤 절단되어 있었다. 그만큼 검귀의 손이 날카롭다는 방증. 평범한 환도로는 피가 마르기도 전에 칼날이 상하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

    “......”

    검귀들은 동료를 잃었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냥감을 포위한 늑대 무리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퍽!

    빠각!

    생김새는 칼을 무척 잘 다룰 것처럼 생겼으나, 실상은 초보자에게 칼을 쥐어준 것처럼 서툴렀다.

    무엇이든 베는 세계.

    그래서 굳이 검술이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놈들의 검술은 정말 형편 없었다.

    ‘심지어 제각각이야.’

    일부 검귀는 칼을 좀 다룰 줄 아는 것 같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괴물이라고 보기에는 개성적인 얼굴만큼 석연치 않은 부분.

    팅~!

    철봉으로 검귀의 머리를 4마리째 짓뭉갰을 때,

    “이런.”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철봉이 절단되면서 못 쓰게 됐다.

    끼긱-

    끼기긱-

    그런 나를 비웃듯 검귀들이 손을 비비면서 끔찍한 소리를 냈다.

    “웃지 마라. 나는 아직- 어?”

    휘청~

    어질어질한 머리. 절대 지치지 않을 줄 알았던 내가 짙은 피로와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피를 많이 흘린 탓은 아니다.

    “......”

    “......”

    나의 약한 모습을 본 검귀들의 입꼬리가 잔혹하게 올라갔다.

    “...얕보지 마라.”

    팍.

    나는 죽은 검귀의 팔꿈치 관절을 밟아서 날카로운 팔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손목을 그어서 피를 잔뜩 묻혔다.

    여기까지 한 박자.

    내 의도를 눈치챈 검귀가 달려들었으나 너무 늦었다.

    팅! 댕강!

    “......”

    검귀의 손으로 다른 검귀의 손을 튕겨내고 목을 단숨에 베어냈다.

    “덤벼.”

    대구르르-

    몸통을 잃은 머리를 축구공처럼 걷어차며 남은 놈들을 도발했다.

    (아직도 싸우냐?)

    “그쪽이 빨리 끝난 겁니다.”

    (오호? 너의 그 조잡한 실력으로 잘도 버텼구나.)

    “이 녀석들이 더 조잡한 덕분에요.”

    끼긱-!

    끼기긱-!

    조잡한 실력으로 빨리 끝내고 한숨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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