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6장-5절] 한 방이오!
사극 <궁녀 덕춘이>의 작가와 감독은 쭉 ‘도적’을 응원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니까.
듣기에는 멋지고 낭만적이지만, 현실을 전혀 보지 않고 작품성만 추구한 그들은 괴물을 만들고 말았다.
(돌무덤이 보이지?)
“오! 정말이네요.”
돌멩이를 쌓아서 만든 탑 같은 게 보였다.
(이대로 진법을 부숴도 되지만, 놈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돌무덤을 조정해서 은신처에 가둘 거다.)
그게 가능해요?
(보통은 어렵지. 상대는 백두산의 신선이란 작자에게 선술을 배운 세계관 최고의 술사니까. 이 세계 한정으로 놈이 나보다 한 수 위다.)
“흠...”
쉽게 설명 부탁합니다.
(하지만 멍청한 네가 있으면 결과가 달라지지. 너의 세계는 진법의 간섭을 받지 않으니까. 내 지시대로 돌멩이의 위치를 옮기면 진법을 파괴하지 않고 우리의 뜻대로 조작할 수 있다.)
“오오...”
(돌무덤 3층에 있는 납작한 돌멩이가 보이지? 그걸 7층의 이끼 낀 돌멩이 옆에 세워라.)
톡.
진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는 선배의 지시를 부지런히 따랐다.
(이제 마지막이다. 놈이 이 돌무덤을 찾아서 파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술법을 추가할 거다. 지속시간이 길지 않기에 술법이 완성되면 바로 은신처를 급습해라.)
얼마나 지속되는데요?
(진법의 열쇠에 묻힌 네 피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피...?”
(피도 너의 일부니까. 도적의 선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너의 세계를 탐지할 순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평범한 피가 되지. 그전에 끝내라.)
이해했습니다.
(4층과 5층 사이에 피어 있는 연보라색 꽃이 보이지? 그게 열쇠다. 꽃을 뿌리째 뽑아서 8층의 네모 모양 돌멩이 밑에 깔아둬라.)
“네.”
시키는 대로 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술법을 해제하면서 진행했으면 닷새도 모자랐을 작업이 이토록 간단히 끝나다니. 세계에 침투한 네 몸뚱이는 존재 자체가 터무니없는 술법이다.)
검귀는요?
(놈들도 너랑 비슷하다. 하지만 구조는 훨씬 단순하지. 공장에서 찍어낸 양산품처럼 똑같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으니까. 개성의 문제지. 자! 이제 네 피가 필요하다.)
“얼마나...”
(네가 도적의 머리를 빨리 후려칠 자신 있으면 조금만 해도 돼.)
“...많이 하죠.”
여기서 놓치면 영영 못 잡을 것 같아서 안전하게 가기로 했다.
(열쇠를 누르는 돌멩이를 네 피로 물들여라.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충분히 적셔. 흘러내려도 상관없다.)
왕세자에게 받은 환도로 과감하게 손목을 그었다.
주르륵...
내 왼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돌멩이와 꽃을 검붉게 적셨다.
(뭐해?)
“...예?”
(이 답답한 녀석! 어서 움직여! 오로라 같은 화려한 마술쇼 효과라도 기대했냐? 이미 진법은 시작됐다.)
“아!”
달렸다.
강자랑 경쟁할 수 있는 약자를 만들기 위해 작가와 감독이 온갖 설정을 욱여넣어서 탄생한 괴물.
약자의 탈을 쓴 강자를 처치하기 위해 은신처로 파고들었다.
“어?”
“누구...?”
바로 옆에 개울이 흐르는 산속에 초가집 3채로 구성된 소박한 마을.
도적 혼자만 살지 않는다.
‘도적 대신 살림하는 구미호, 패배하고 부하가 된 산적 두목.’
인간으로 둔갑한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요괴를 짝사랑하는 숫총각 산적의 안타까운 이야기.
쓸데없이 분량만 잡아먹어서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무시해.)
“......”
선배의 말이 맞다.
‘도적만!’
나랑 술래잡기하느라 체력이 상당히 소진됐을 터.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자고 있을 수도?
“침입자...!”
치마 아래로 새하얀 꼬리 9개가 돋아난 백발의 미녀가 내 앞을 겁도 없이 가로막았다.
구미호(九尾狐).
설화와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사극 <궁녀 덕춘이>의 구미호는 도적이 애먹었을 만큼 강한 요괴라는 설정이 있다.
화륵! 화르륵~!
푸른색 불꽃 덩어리 9개가 구미호 주위에 형성됐다.
‘여우불.’
다른 이름은 도깨비불.
100년마다 하나씩 늘어나는 꼬리의 숫자만큼 만들 수 있기에 여우 요괴는 나이가 많을수록 강하다.
슝! 슝! 슝...!
여우불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나를 향해 쏘아졌다.
회피 불가! 소화 불가!
표적에 명중할 때까지 꺼지지 않고 따라오는 탓에 잘난 도적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유감인걸.”
모든 여우불은 내 몸(세계)에 닿자마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부스스...
“무슨- 꺼윽?!”
내가 도망치거나 여우불에 당할 줄 알았던 걸까?
상식을 벗어난 현상에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뜬 구미호의 이마에 내 주먹을 선물해줬다.
빡!
(이 여우는 선물이냐? 여우불. 재미난 술법이군.)
뇌진탕에 빠진 구미호는 본모습인 여우로 돌아갈 틈도 없이 실신했다.
털썩!
“여우 아씨?! 이놈...!”
용감하게 도끼를 치켜든 산적 두목이 내게 돌진했다.
퍽.
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태권도 뒤돌려차기로 그를 날려버렸다.
“...없나?”
소란을 들었다면 도적이 집에서 뛰쳐나와야 정상인데?
너무 조용했다.
흠칫!
어두컴컴한 초가집의 문 앞에 도달한 나는 몸을 비틀었다.
그 직후,
쾅!
도적이 절단된 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내게 돌진했다.
‘기습이 제법인걸?’
신속하게 허리에 찬 환도를 발도(拔刀)한 나는 놈의 생명에 지장이 없는 다리를 노렸다.
“쯧.”
그러나 다리를 베기 직전에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순간이동. 성가시네.’
하지만 놈의 움직임은 이젠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밑을 향해 휘두른 환도를 멈추지 않고 위로 치켜들었다.
캉-!
눈에 보이지 않는 도적의 칼과 내 환도가 충돌하며 불꽃이 튀겼다.
“괴물이냐...”
“섭섭한 소리.”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도적은 피로에 찌든 눈으로 잽싸게 주위에 쓰러진 둘을 살폈다.
구미호, 산적 두목.
그리고 망설임 없이 순간이동으로 내 눈앞에서 사라진 놈은 구미호의 허리를 끌어안고 도주했다.
(예상대로군.)
“그러게요.”
(구경하지 말고 빨리 끝내라. 나는 곧 태권도 시합이다.)
“켁!”
국밥 한 그릇 먹고 돌멩이를 조금 옮긴 사이에 하루가?!
현실의 속도가 미쳤다.
* * *
“운현 오빠. 문수는 주점에서 국밥을 먹은 뒤에 뭘 하고 있어요?”
“그만 좀 물어봐라.”
혈신 소운현은 태권도 시합장까지 이동하면서 수시로 물어보는 송선영에게 질려버렸다.
“가르쳐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이렇게 자주 말해준다고 약속하진 않았어!”
“자주 안 물어본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는데요?”
“...기다려. 방금 구미호를 안고 도망치는 도적을 제압했다.”
태권도 도복을 입은 소운현은 살짝 지친 어조로 꿈의 상황을 알려줬다.
“어째서 문수가 구미호를 안 죽였죠? 덤볐잖아요?”
“...산적 두목도 안 죽였어.”
예쁘지 않은 후배를 굳이 변호해줄 필요는 없지만, 나중에 피곤해질 것 같아서 살짝 도와줬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송선영 양.”
“......”
송선영은 바로 옆에서 부르는 1살 연상의 소녀, 전지은을 깔끔히 무시하며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게,
“강문수 씨는 곧 1경기에 출전해야 합니다. 방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방해?”
거슬리는 단어에 송선영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송선영 양.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당신의 자유지만, 태권도 메달을 아깝게 놓친다면 그 원망은 당신의 몫이 될 겁니다.”
“알겠으니 그만 참견하세요.”
“이건 참견이 아니라...”
“언니.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아 줄래요? 나는 문수가 올림픽에 출전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강문수 씨의 몸입니다. 그것까지 부정할 셈인가요?”
“말이 안 통하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찌릿-
신경전을 벌이는 두 소녀의 모습에 소운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안 지치나...?”
이 정도 싸웠으면 둘 중 하나가 항복하거나 포기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조금도 물러서질 않았다.
“강문수 선수!”
“흠.”
기자와 카메라맨이 다가왔다.
“마라톤을 뛰시고 하루도 안 지나서 태권도에 출전하셨는데요. 몸의 상태는 괜찮으신가요?”
“오늘 경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소운현은 강문수의 말투와 표정을 연기하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후배의 음란마귀까지 꿰찬 송선영 수준의 변태가 아니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할 터!
“그 말씀은, 마라톤 신기록을 20분이나 단축하고도 여력을 남겨뒀다는 말씀이신가요?”
“체력이 유난히 좋을 뿐입니다. 나중에 수영 10km 마라톤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수영 마라톤까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말실수를 유도하는 기자에게 등을 돌린 소운현은 강문수의 몸을 조종해서 태권도 시합장 위로 향했다.
‘같잖군.’
상대가 누구인지 소개해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현재 관심사는 백두산에 사는 신선이 도적에게 전수한 신묘한 선술뿐.
“시작...!”
심판관의 우렁찬 호령으로 태권도 예선전 1경기가 시작됐다.
“타합!”
상대가 먼저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조금 아쉬워.’
강문수였다면 순수한 육체 능력만으로 순식간에 시합을 끝냈을 텐데,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똑같은 몸.
똑같은 지식.
그런데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느리군.’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호위기사 발렌타인은 강문수에게 재능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 말은 틀린 걸까?
아니다. 맞다.
하지만 강문수는 P의 적성검사기가 보증한 무당. 그의 비정상적인 강함은 거기서 나온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얻는 다양한 힘과 경험.
무당의 무기다.
그렇다면 소운현은 어떨까?
“흡!”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눈빛이 예리하게 돌변한 그가 근육 하나하나 세심하게 움직였다.
선녀와 혈마 사이에서 태어난 천마.
태생부터 비범하고, 직업은 세계관 최강자이며, 중원을 피로 물들인 화려한 전적도 보유했다.
전투?
그 재능은 갓난아기의 몸으로 어른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상식과 규격을 한참 벗어났다.
“어...?”
상대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뺨을 허용했다.
빠악-!
투구로 보호했음에도 소운현의 발차기 한 방에 정신을 못 차린 선수는 술에 취한 듯이 위태롭게 빙글빙글 돌다가 쓰러졌다.
털썩.
그리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어색하군.”
적의(敵意)를 보인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게 어색했다. 그래도 실수하지 않은 건, 선수가 너무 약해서 생각할 여유가 넘친 덕분!
‘충격파로 혈도를 긴장시켜서 막는다는 개념을 심판관이 알까?’
호흡은 있지만, 흔들어도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 선수.
막힌 혈도(血途)를 푸는 방법을 모른다면 이대로 끝나리라.
“...시합 불가능! 강문수 선수 승!”
심판관은 점수판을 무시하고 승패를 결정지었다.
황당한 시합. 그리고 결과.
최단기간에 끝난 태권도 경기로 기록에 남을 듯했다.
“...뭐가 불만이냐?”
간단히 1승을 거두고 선수 대기실로 돌아온 소운현은 뺨을 복어처럼 부풀린 송선영을 볼 수 있었다.
“소운현 오빠. 문수처럼 싸워야죠. 뒤돌려차기.”
“이 약해진 몸뚱이로? 농담이지? 아가씨는 강문수의 몸이 일방적으로 처맞길 원해?”
“안 맞고 잘 좀 해봐요.”
“......”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질 않았다.
“문수는 뭐해요?”
“녀석이라면...”
소운현은 꿈속의 강문수랑 동기화하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했다.
“......”
물어본 횟수만큼 자주 보았던 모습이기에 송선영도 더는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말은 안 했지만, 전지은도 매우 궁금한 눈치.
스윽-
금방 다시 눈을 뜬 소운현이 두 소녀에게 가르쳐줬다.
“도적의 몸으로 실험 중이다.”
“무슨 실험이요?”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관 설정을 깨는 실험.”
그도 실험 결과가 매우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