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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16화 (117/232)
  • 116화

    쾅! 쨍그랑!

    도적이 술법으로 던지는 온갖 잡동사니가 ‘나의 세계’에 닿자마자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역적이 침투했다!”

    “저하를 지켜라!”

    “못 도망치게 막아!”

    오자마자 발각되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도적. 그는 덕춘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악착같이 주위를 맴돌았다.

    사랑하는 그녀를 못 데려가면 여기서 죽겠다는 각오.

    ‘아이고...’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에 등장하는 수많은 미남처럼, 세계의 규칙이 또 멀쩡한 남자를 바보로 만들었다.

    “도망쳐! 바보야!”

    덕춘이가 옳은 소리를 하는군.

    “싫다!”

    그래도 바보는 바보였다.

    “......”

    “......”

    왕궁에 침투한 역적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왕세자빈을 호위하던 장수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왕세자의 명령 탓인지 별말 하지 않았다.

    ‘진짜 성가시네!’

    보이지 않는 검술로도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도적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격이 아닌 오직 회피만을 위한 순간이동!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답답한 후배 새끼야. 침착해라. 순간이동도 무한정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사극 감독과 작가가 설정하지 않은 조건과 규칙이 있어.)

    그게 뭔데요?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나는 곧 마라톤 뛰러 씻고 나가봐야 한다. 너도 마라톤 망치기 싫으면 그만 날뛰고 적당히 타협해.)

    “......”

    타협?

    결론이 났다.

    “너는 정체가 대체 뭐냐!”

    “나? 너에게 원한이 있는 인간.”

    “뭔...”

    사극 <궁녀 덕춘이>에는 나오지 않지만, 도적이 밀회할 때마다 수많은 경비병과 책임자들이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받았다.

    지위 강등, 봉급 감소, 불명예...

    모든 궁녀가 왕의 소유물이니까. 도둑을 막지 못한 신하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왕의 위신(威信)이 떨어진다.

    ‘이런 해충은 죽어야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놈의 체력이 떨어져서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뛴다.)

    뚝.

    하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아... 젠장.’

    추적하던 발걸음을 멈춘 나는 도적이 왕궁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다.)

    왜요?

    (내가 조종하면 몸뚱이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다.)

    “......”

    정말로 최악인데?

    (압도적인 1위는 힘들 것 같군. 문제는 다른 종목이다. 네가 출전해도 간신히 금메달을 딸 수준인 단거리 육상과 수영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괜찮아요.”

    지금은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서 금메달을 하나라도 보유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송선영의 모친 장서연 감독님처럼 메달을 못 따면 재기하지 못하는 패배자 취급을 받으니까. 반면에 하나라도 보유하면 영웅 대접을 받는다.

    (14km에서 6위. 체력도 믿을 수 없기에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달리마.)

    네.

    나는 몸을 돌려서 덕춘이가 있는 곳으로 귀환했다.

    ‘궁금해!’

    환자의 생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텔레비전으로 올림픽 마라톤을 시청하고 싶은 기분!

    조마조마했다.

    (21km에서 4위. 너랑 다르게 체력이 깎이는 게 느껴지는군.)

    “...꿀꺽.”

    산책하듯 여유롭게 100km를 완주했던 나로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라톤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었으니까.

    여기서 금메달을 못 따면 다른 종목은 안 봐도 뻔하다.

    “그... 역적은 어떻게 됐느냐?”

    “아쉽게도 놓쳤습니다.”

    “...수고했다.”

    위기에 빠진 도적을 옹호한 말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덕춘이가 얌전히 호위를 받았다.

    왕세자빈이 불륜을?

    소문만 퍼져도 ‘정실’의 지위를 잃을 만큼 치명적인 중죄다.

    (순조롭군. 37km에서 1위. 네가 허튼짓만 하지 않으면 무리 없이 금메달을 딸 것 같다.)

    “휴우...”

    선배의 자신감 넘치는 해설에 한숨 돌렸다.

    탕!

    난장판이 된 신혼집에 뒤늦게 돌아온 왕세자가 외쳤다.

    “무사한가?!”

    “역적을 아깝게 놓치고 말았지만, 왕세자빈 저하는 무사하십니다.”

    “오오! 큰 공을 세웠도다! 대국의 무술을 믿고 맡기길 잘했어!”

    “......”

    역사 고증이 너무 잘됐군.

    (64km에서 1위. 나를 따라잡으려고 무리한 2위와 3위가 조금 전에 쓰러지며 탈락했다. 네가 예전에 했던 짓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군.)

    “저하...”

    “덕춘아. 걱정하지 말아라. 포기를 모르는 그 역적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네. 저하.”

    여주인공을 진하게 포옹한 왕세자의 지시로, 난장판이 된 신혼집이 빠르게 정리됐다.

    “히이잉~!”

    그런 내 눈에는 왕세자가 여기까지 타고 온 백마의 안장에 걸려 있는 화살집과 활이 보였다.

    ‘아쉽네.’

    이 세계에 오래 머물 수 있었다면 사극 <궁녀 덕춘이>에 등장하는 궁기병의 사기적인 궁술과 기마술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특히, 순간이동으로 빠르게 도망치는 도적을 잡으려면 활이나 총 같은 원거리 무기가 필요했다.

    (84km에서 여전히 1위. 뒤에 아무도 없군! 아주 좋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국의 무사 강문수. 원하는 게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 보아라.”

    “무례가 아니라면 저하께 궁술과 기마술을 가르친 스승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흠. 단순히 만나보는 게 목적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역적을 붙잡으려면 빠른 발과 활이 필요합니다.”

    “과연... 그런 이유라면 특별히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왕세자는 양팔로 덕춘이의 허리와 엉덩이를 안아 들고 유유히 떠났다.

    “...거참.”

    왕궁에 침입한 검귀보다 2세 생산이 훨씬 중요한 걸까?

    세계의 규칙으로 맹목적인 사랑을 주입받은 남주인공들은 여주인공만 엮이면 유감스럽게 바뀌었다.

    (100km 결승선 통과. 금메달 확정이다. 세계신기록을 24분 13초나 단축했다고 호들갑이군. 이젠 마음대로 날뛰어도 돼. 이미 끝났지만.)

    선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하핫!”

    부탁합니다!

    (답답한 네놈은 나에게 100번 절해도 부족하다. 기다려라. 호텔에 네 몸뚱이부터 처박아둔 후에 도와주마.)

    * * *

    중원을 피로 물들인 혈신(血神)은 머나먼 미래를 볼 수 있을 만큼 신통한 술법의 대종사(大宗師)!

    미래도 훔쳐보는 그에게 인간의 머릿속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관심법이라고 한다. 사람을 믿지 않는 내가 애용했던 술법이지.)

    ‘관심법...’

    나도 혈마의 도움으로 사천제일미에게 써보긴 했지만, 이 술법은 진짜 사기였다.

    (흥! 내면의 깊숙한 생각과 지식까지 읽을 수 없는 너와 혈마는 하찮은 맛보기 경지다. 그딴 걸 관심법이라고 칭하지 마라.)

    ‘까칠하시긴...’

    관심법(觀心法).

    나는 선배의 이 음흉한 술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백두산에 사는 신선의 선술(仙術)을 분석하기 위해 제자인 도적의 머리를 후려치라는 선배의 부탁을 듣고 떠올린 꼼수.

    탁.

    “무, 무슨 짓이냐?!”

    “실례했습니다. 장군님의 머리에 파리가 붙어서 무심코 손이 갔습니다.”

    “왕세자 저하의 손님이란 자가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가...”

    “죄송합니다.”

    (시커먼 사내새끼의 머릿속을 훔쳐보려고 익힌 술법이 아니다. 이젠 부탁이 아니야. 무조건 도적의 머리를 손으로 후려쳐라. 못 하면 송선영에게 발렌타인을 까발려주마.)

    너무한데?!

    선배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등골이 오싹했다.

    (왕세자에게 궁술과 기마술을 가르친 왕국 최고의 궁기병의 지식과 경험은 확실하게 챙겼다. 다음 꿈에서 시간이 될 때 전수해주마.)

    감사합니다!

    (도적이나 찾아라.)

    “...장군님.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뭐? 왕세자 저하께서는 자네에게 궁술을 가르쳐주라고 명하셨는데, 그냥 가겠다는 건가?”

    나에게 기습적으로 이마빡을 맞은 장군이 투구 밑으로 맞은 이마를 찡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미 배웠습니다.”

    “흠?”

    “한 번 시험해보시겠습니까?”

    “...좋다. 여봐라. 여분의 활을 가져와라.”

    나의 도발에 넘어간 장군의 주도로 준비된 즉흥적인 사격시험.

    병사에게 활을 넘겨받은 나는 선배부터 찾았다.

    선배님! 도와주세요!

    (이런 뻔뻔한 새끼를 보았나! 활대를 쥐는 방법부터 틀렸잖아? 엄지와 검지를 벌리고... 아니, 잠깐! 활대를 그렇게 꽉 움켜쥐지 마라. 양발은 어깨너비로 벌리고, 손가락의 첫 관절 안쪽에 현을 걸면 돼.)

    “...현?”

    (활줄 말이다! 이런 무식한 새끼! 활을 과녁 방향으로 들고 활시위를 당겨라. 두 어깨는 수평, 활은 수직, 힘은 활대를 미는 왼팔과 현을 당기는 오른팔에 절반씩.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가 턱 아래에 닿을 때까지 당겨. 이젠 왼쪽 눈을 감아.)

    “흠...”

    선배에게 혼나면서 미세한 자세 조정에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내 지시에 따라 각도를 조금씩 바꿔라. 왼손을 살짝 위로... 아니, 너무 올렸어. 하! 바람이 그새 또 바뀌었군. 어쩔 수 없지.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숨을 참고 기다리다가 쏠 수밖에.)

    “......”

    원래는 바람까지 계산해서 활을 쏴야 하지만, 내 실력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적합한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금!)

    선배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활시위를 놓았다.

    피용- 탕!

    구박 받으면서 쏜 화살의 화살촉이 과녁 정중앙에 박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자세가 굉장히 엉성했었는데.”

    왕세자를 가르친 왕국 최고의 궁기병이 무척 놀라워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군. 운이 좋았던 거야. 한 발을 더 쏴보게.”

    (또 시키면 죽는다.)

    “...죄송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이젠 가봐야 합니다.”

    “흠. 미덥지 않지만, 명중한 건 사실이니 믿어볼 수밖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군이랑 작별하고 사격장을 빠져나온 나는 왕궁 밖으로 향했다.

    내 목적지는?

    “주모~!”

    “이모~!”

    서민들이 애용하는 주점이었다.

    사극 <궁녀 덕춘이> 원작에서 자주 등장한 초가집.

    대낮부터 일은 안 하고 술을 마시는 사내들이 주점의 미망인과 예쁜 여식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재현해놨다.

    (멋진 생각이군.)

    “어디 보자... 아, 오네요.”

    주점 마당의 빈자리에 앉은 나랑 눈이 마주친 주인의 딸이 당찬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참고로, 사극 <궁녀 덕춘이>에서 비중은 적은 그녀도 유명한 배우가 배역을 맡은 까닭에 미모가 상당했다.

    (구제할 길이 없는 음란마귀 새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처음 뵙는 오라버니. 뭘 주문하시겠어요?”

    “예쁜 얼굴에 뭐가 묻었네.”

    “네?”

    톡.

    나는 소녀가 반응할 틈도 안 주고 손으로 이마를 건드려서 ‘나의 세계’로 간섭했다.

    (확실하게 읽었다.)

    “유명한 역적을 잡으러 가야 해서 든든한 국밥 한 그릇.”

    짤랑!

    적당한 돈을 식탁 위에 올리며 주문했다.

    내 말에,

    “유명한 역적이라면... 관두시는 편이 좋아요. 그를 잡겠다고 떠난 사람 중 대부분이 못 돌아왔어요.”

    주점 딸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 나중에 후회하셔도 몰라요.”

    “그래.”

    (역적을 짝사랑하다니... 제 어미처럼 남자 복이 없군.)

    “그러게요.”

    소녀가 죽기 전에 실컷 먹으라고 곱빼기로 챙겨준 따스한 국밥.

    탁!

    바닥까지 깔끔히 핥아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쪽에 보이는 산으로 가라. 도적의 은신처는 그 중턱에 진법으로 숨겨져 있다. 해체는 내가 도와주마.)

    “감사요.”

    도적의 머리통을 깨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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